안식일에서 주일로 제1장 서론
 주의 날과 현재의 위기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는 예배와 휴식을 위해 보내는 일주일 주기는 히브리 역사의 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일주일 중 하루를 구별하여 예배를 드린다. 그 날은 반복되는 일주일 주기 중에서 세속적인 행위를 멈추고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드리기 위해 선택된 날로써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13.1)
 하지만 최근에 우리 사회는 기술적, 상업적, 과학적, 우주적 업적들로 말미암아 급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Abraham Joshua Heschel)이 강조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공간적 사태의 횡포 아래 살아가고 있다.”1) 줄어든 노동 일수로 인해 이용 가능한 레저 시간이 증가됨에 따라서 6일의 노동과 하루의 휴식이라는 주기가 바뀌었고, 그로 인해 주님의 날을 성스럽게 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들마저도 바꾸어 놓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자신들에게 속한 사물 중 하나일 뿐이라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다. 시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사용되는 소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배에 대한 의무가 완전히 무시되지는 않았지만, 생활의 변화로 인해 종종 예배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쉽게 전락하고 있다. “거룩한 안식일” 이라는 성서적 개념은 하나님께 예배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대한 도움을 베풀어 창조와 구속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 세속적인 활동을 멈추는 시간으로 이해되는 것인데, 이러한 개념이 기독교 사상에 서 점차적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그 결과로 7일 주간의 패턴, 즉 매 7 일마다 반복되는 휴식과 예배의 순환 패턴이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 특별히 경제와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생산공장의 이용률을 극대화 하기 위해 예배일을 무시하고 교대근무제를 실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7일주간의 패턴이 변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13.2)
 이러한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로부터 조성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의도에서 일요일 준수를 주의 거룩한 날이라기보다는 단지 예배의 시간으로 간주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예배 의무를 이행한 후에 일요일의 남은 시간들을 떳떳한 마음으로 경제적인 활동이나 오락에 종사하면서 보내고 있다. (14.1)
 어떤 사람들은 주의 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그 날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신성모독이라고 염려하면서 일요일의 영적인 의미와 부합되지 않는 모든 행위들을 불법화하는 시민법을 제정하기를 강조하기도 한다.2) (14.2)
 그러한 입법 취지가 비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조차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저들은 때때로 환경보호라는 긴급한 사회적 필요에 호소하기도 한다. 만일에 인간과 기계들이 완전히 하루를 쉬게 된다면 우리의 에너지 자원과 불완전한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3)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아무리 일요일 휴식을 장려하고자 하는 것일지라도, 그러한 사회적이고 생태적 요구만으로는 경건한 자세를 가지고 그 날을 특별하게 여기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14.3)
 사실 일요일 휴식을 존중하도록 하는 일에 더 희망적인 결과를 기대 한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날”에 대한 성서적 의미와 경험들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신학적 기반을 확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일요일을 준수해야 할 성서적이고 역사적인 이유들은 무엇인가? 이 날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합법적으로 대신할 수 있는 날로 고려될 수 있는가? 십계명 중의 넷째 계명이 일요일 준수를 명령하는 것으로 인용될 수 있는가? 일요일이 주님께 속한 거룩한 휴식의 날로서 보다는 단지 예배의 시간으로서만 간주되어도 괜찮은가?4) (15.1)
 이러한 필수적인 문제들에 대해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요일이 “언제,” “어디서,” “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일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역사적 상황을 재구성하고 일요일의 기원에 영향을 끼친 주요 요소들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일요일 준수의 유효성 및 중요성을 재평가하는 과제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15.2)
 연구의 목적과 문제점
 초기 기독교사상사에서 나타난 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관련된 문제는 최근에 서로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학자들의 관심을 유발시켜왔다. 몇몇 박사학위 논문을 포함해 지난 20년 동안 발표된 방대한 학술적 연구들은 일요일 준수의 기원과 관련된 때와 장소와 원인들에 대한 흥미 진진한 문제들에 대하여 보다 더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기 위해 발휘된 새로운 관심과 노력들을 명백하게 보여 주고 있다.5) (15.3)
 최근의 연구들은 두 가지 방향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일요일 준수를 예루살렘의 사도적 공동체가 독점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으로 이해하는 방향이며, 6) 다른 하나는 그것이 태양 숭배와 관련된 “태양의 날”(dies solis)에 대한 이교적 풍습을 채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7) 그러나 너무 적은 인과요인들을 감안한 연구조사로 얻은 결론은 다분히 일방적인 것이고 불균형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구도에버(J. V. Goudoever)의 통찰처럼, 만일 우리가 “모든 부분의 예식들 중에서 영속적인 의미를 가진 축제의 경우에는 그 축제의 날과 형태가 변하는 것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변화되었다면8), 그런 변화를 일으킨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영원한 전통으로 준수해왔던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새로운 예배일을 도입하도록 하는데 영향을 끼친 복잡하고 심오한 동기들이 있었음을 예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인 과정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일로서 일요일이 채택되었던 역사적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가능한 인과요소들, 즉 신학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이교적인 요소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16.1)
 이 연구의 목적은 분명하게 두 가지로 한정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안식일 준수를 포기하고 일요일 예배제도를 도입한 책임이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논점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안식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을 분석해 볼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과 현현 및 성만찬 예식과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들의 문화 등을 연구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일요일 준수의 확립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일요일 예배가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의 시대에 기원된 것인지, 혹은 그것이 다른 지역에서 좀 더 후기에 시작되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일요일 준수의 역사적 기원을 확인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작업은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한 원인을 분석해 줄 뿐만 아니라 그 관습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적합한 것 인지를 해명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일요일이 실제로 주의 날이라면 모든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16.2)
 두 번째, 이 책은 반유대적 감정들, 유대인들에 대항해 취해진 로마의 억압 수단들, “태양의 날”과 관련된 일요일 예배 등과 같은 어느 정도 확실한 역사적 요소들을 평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특별히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포기하고 주의 날로서 일요일을 채택하도록 영향을 끼친 기독교 신학적 동기들을 평가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17.1)
 그러므로 이 연구는 일요일이 기독교의 예배와 휴식의 날로서 채택되도록 영향을 끼친 모든 시기와 원인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상황들을 탐구하고, 다양한 요소들로 모자이크된 역사적 자료들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더그모어(C, W. Dugmore)가 다음과 같이 제안한 것에 잘 들어맞는다. “놀랄만한 결론이 명확하게 입증될 수는 없을 지라도 때때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이미 지나간 일로 간주 되는 것들을 다시 고려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9)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이미 결론이 내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비평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이미 받아들여진 해답과 가설들을 재조사하는 것은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수행해야 만 하는 임무이자 봉사이다. (17.2)
 우리의 연구는 초기 기독교사상에 나타난 일요일 준수의 예전적이고 목회적인 국면들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그런 문제들은 이미 최근에 발표된 연구 논문들에서 철저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이다.10) 다만 우리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에 대한 시기와 원인들을 확립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공식적이고 실제적인 자료들,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거나 관계가 적지만 필요한 본문들을 검토할 것이다. 특별히 본 연구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 문제에 한정해서만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18.1)
 우리가 연구할 문서들은 후대의 본문들과 관련된 몇 개의 부가적인 참고문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 시대의 첫 4세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특별히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도교부들의 증언들은 마지막 부분에서까지 계속 연구가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이 자료들이 전체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자료들 중에서도 일요일 준수의 동기들에 대한 역사적 유효성 입증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을 기록한 사도교부들이 살았던 시기는 일요일 예배가 모호하게 시작되어 그것이 확실하게 시행되기까지 변화가 나타나는 기간이다. 이때는 교회 기관들이 여전히 미성숙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입수할 수 있는 자료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대의 문서들을 나중에 교회가 확립해 놓은 기준들과 함께 혼합하여 읽게 되면 잘못된 이해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초기의 자료들은 반복해서 신중하게 연구될 필요가 있다. (18.2)
 본 연구에서는 일요일 준수의 도입과 관련된 연대기적, 역사적, 지리적인 요소들을 고려하기 위해 그 자료들을 분석하였다. 특별히 중요한 구절들은 주의 깊게 연구되었는데, 다른 연구에서는 종종 그 본문의 문맥적인 문제들이 무시되었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방적인 해석은 부적합한 인식을 만들어 내었다. 예를 들어 화이트(N. J. White)가 주장하는 것처럼, 주의 날(kopeaki nuépa)이라는 용어는 일요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초기 사도시대 이래로 “완전하고 의문의 여지가 없이 교회에 의해 사용되어졌다”는 식이다. 11) (18.3)
 이 연구를 위해 활용된 문서들은 편지들, 설교문들, 논문들과 같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의 유래와 신빙성과 정통성은 항상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보 할 수 있는 모든 자료들은 대부분 그 자료들이기 때문에 그 자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억지로라도 연구해야만 한다. 엄정한 학문적 규범을 따른다면, 바르나바스와 같은 정경이 아닌 자료들을 활용하는 것에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에 기록된 문서들과 고고학적 유물들 그리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몇몇 단편들만을 분 석하는 것으로 연구의 범위를 스스로를 제한한다면,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진정한 진보를 이루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제한을 염두에 두면서 교부들의 문헌들과 경외서의 문헌들을 풍부하게 검토 할 필요가 있다. (19.1)
 본 연구를 평신도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신약 성서와 교부들의 텍스트들만큼은 평판이 좋은 영역본에서 인용하였다. 개정표준성서(The Revised Standard Version)가 주로 사용되었지만, 필요할 때는 네슬(E. Nestle)과 알란트(K. Aland)의 헬라어 본문이 삽입되었다. 특별한 관계가 있는 교부들의 본문들의 경우에는 활용 가능한 비평적 판본들이 다양하게 검토되어졌다. 영역본이 활용될 수 없는 곳이나 혹은 그 영역본 자체가 불만족스러울 경우에는 본 저자가 직접 번역하여 활용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헬라어와 라틴어 단어들은 괄호 안에 첨부하였다. (19.2)
 로르도르프(W. Rordorf), 레간(F. A. Regan), 모스나(C. S. Mosna)의 최근 연구논문들을 빈번히 인용한 것은 그것들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결론들에 대해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비평가들에 대한 분석을 마친 후에 본 연구를 가능케했던 연구 가설들이 의심 없이 차례대로 수정되고 교정될 것이다.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