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드라마 성소 제 2 장 진영에서 뜰문에 이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사람이 이 이끄심에 응할 때에 그가 회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죄인은 잃어버린 양으로 상징되었으며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친히 나아가 찾아가지고 돌아오지 않는 한 결코 제 우리로 찾아 돌아올 수 없다.”8 죄인이 어떤 모습으로 나아가든지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기를 기뻐하신다. (40.1)
  (40.2)
 탕자의 비유는 죄인이 하나님을 떠나 방종과 죄악적 쾌락에 몰두하다가 비록 불행한 처지에 빠져 있을지라도 다함없는 사랑과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계신 하늘 아버지를 소개하고 있다. 탕자는 아버지의 권고에 싫증을 느끼고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을 구속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장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다만 아버지의 많은 유산과 현재의 쾌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많은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외국으로 갔다. 더 이상 아버지의 권고가 없는 곳에서 악한 동무들을 만나 술과 여자로 자신의 재물을 다 허비해 버렸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청춘과, 젊은 날의 영적 포부마저 정욕의 불꽃에 소멸시켜 버렸다. 궁핍과 흉년이 압도해오는 시절에 돼지가 먹다 남긴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던 탕자는 자신이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죄의 줄에 매인”(잠 5:22) 자신을 발견한 어느 날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사단의 기만적인 세력은 깨어지고 그저 고향을 향하여 그의 발걸음을 옮겼다. (40.3)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눅 15:18~20). 이것이 받으심이다. 탕자가 비록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품은 그를 안아주시기에 족하였다. (41.1)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 부친은 종들에게 명하여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9고 하였다. (41.2)
 2. 뜰의 문은 받으심을 상징함
 뜰의 문은 탕자가 더럽고 냄새나는 옷을 입었음에도 아버지가 그와 입 맞추고 자신의 겉옷을 입혀 주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받으심을 상징한다. 제사장이 제물을 이끌고 오는 자를 문밖에서 맞아 성소 휘장을 통과하여 안으로 인도하여 들이는 것처럼 예수님은 죄의 누더기를 가려주시는 의의 휘장을 우리에게 주신다. 그리고 곧 죄의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신다. (42.1)
 뜰의 문은 동쪽 중앙에 20규빗의 크기로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수놓아 짠”(출 27:16) 화려한 휘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놋 기둥의 네 은 갈고리에 휘장이 걸려있다. 이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어떤 죄인이든 회개케 하고 용서하시기 위해 받으심을 상징한다. (42.2)
 3. 성소 휘장을 경계로 나타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계단들
의의 계단 휘장과 의의 경험 그리스도의의 내적인 적용
1) 이끄심 세마포 울타리 밖의 경험 성령에 이끌리어 양을 끌고 성소에 나아가는 경험
2) 받으심 뜰의 문장(출 38:18)을 통과하는 경험 죄의 옷을 입은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시는 경험
3) 칭의 뜰 안의 경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씻기시는 경험
4) 성화 첫째 휘장(성막 문, 출 26:36)안의 경험 입혀주시는 의를 입고 성소에 들어가 나누어주시는 의 가운데 자라남
5) 영화 둘째 휘장(회막 안 장, 출 40:26)안의 경험 성화가 하나님께 가납되어 영화로운 몸을 입을 준비가 이루어짐
(42.3)
 1) 이끄심
 이끄심의 단계에 있는 사람도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한다. 그러나 은혜의 역사를 통해 완전한 굴복과 전적인 회개에는 도달하지 못하여 아직 성소의 세마포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회개하기 위하여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장막에서 성소의 뜰문까지 이끄심의 과정을 구원받은 경험, 혹은 칭의로 오해하고 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42.4)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인정은 하면서도 동시에 저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멀리하고 저희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저들의 개인적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저들의 신앙은 단순히 정신적인 동의에 그치며 진리를 판단하는 것으로 전부를 삼는다. 그러나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그 영혼을 성결케 하지 못하고 그 품성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부르심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 이끄는 것이며 성령께서 그 마음에 역사하사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10 (43.1)
 “이 이끄심에 반응을 보이는 모든 영혼은 악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사람은 땅에서 하늘에 닿은 사닥다리에 발을 올려놓는 것과 같습니다.”11 (43.2)
 2) 받으심
 받으심의 단계에서는 제사장이 희생제물을 끌고 오는 죄인을 문 앞에서 맞아 안으로 들이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예수님께 전적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납하시게 하려면 우리의 생애가 어느 정도 개선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고 새 마음을 받기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그대로 받아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실수하고 죄 많은 상태 그대로 그리스도께 나가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구주의 공로를 온전히 의지하고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 주신다.”12 “그는 저들에게서 죄로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의의 흰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려고 기다리신다. 그는 저들에게 살고 죽지 말라고 말씀하신다.”13 (43.3)
 탕자가 어떻게 그 부친에게로 영접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는 탕자의 옷을 갈아입히기 전에 집밖에 먼저 마중 나와 있었다. 탕자를 끌어안고는 자신의 옷으로 비참한 누더기 옷을 덮어주었다. 이것이 받으심이다. “부친은 자기 아들의 비참한 모습과 누더기 옷을 경멸의 눈초리로 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가 자기 어깨에 걸쳤던 넓고 좋은 외투로 아들의 남루한 꼴을 덮어 주자 그 아들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집으로 데리고 갔다.”14 (44.1)
 3) 칭의
 (1) 성소에 이른 죄인이 희생제물 위에 자신의 모든 죄를 전가시키고 번제단에서 속죄와 물두멍에서 씻음을 경험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Justification by faith)은 죄의 옷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다’(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는 의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아본: 죄악, 형벌)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슥 3:4), 이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다는 것은 의롭다 하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것이 곧 바울이 열렬히 주장하는바 의롭다 하심이다.”15 (44.2)
 (2)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니다. 품성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이 생애의 원칙이다.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전체를 바치는 것이며 마음속에 있는 하늘의 원칙에 마음과 생애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이다.”16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