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낙은 주로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의 자료를 이용하여 초기 교회가 다음과 같이 군사 은유 또는 군대 유비(類比)들을 사용한 사례들을 소개했다.

 1) 그리스도교 침례서약 명칭은 로마 군대 서약 의식의 명칭과 똑같은 사크라멘툼(Sacramentum)이다.

 2)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회라는 영적 군대의 사령관(imperator)이다.

 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군대의 영적 병사들이며 순교자들은 이 군대의 장교들이다.

 4) 로마 군대가 황제를 위해 싸우듯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 전투하며 각기 자신이 이룩한 전공에 따라 상급을 받는다. 영적 싸움에서 뒤로 물러나는 교도들은 탈영병(desertor)과 같다.

 5) 교회와 감옥은 하나님의 병영(castra dei)이다.

 6) 교회의 이단자들은 군대의 반란분자들(rebelliones)과 같다.

 7)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의식들은 병영 주변에 초소나 불침번을 세우는 것과 같다.25

 하르낙은 위와 같은 군사 유비들이 이미 신약성경 에베소서 6장 10-17절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21.1)
 하르낙은「그리스도의 병사」 제 2부에서 평화복음 기관으로서의 그리스도 교회와 국가 권력의 핵심부인 로마 군대간의 갈등을 군복무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구체적인 정황에서 다루었다. 그는 우상숭배 문제 이외에도26 초기 그리스도 교회와 로마 군대 사이에는 그리스도의 반폭력적 가르침,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해야 하는 장교와 사병의 책임, 무조건적인 군대 서약에 충돌하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계명, 그리스도교 윤리에 배치되는 군대 생활의 여러 악습 등이 갈등 요소로 끼여 있었다고 주장하였다.27 (21.2)
 그러나 이같은 갈등 요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복음의 확장과정에 편승하여 로마 군대에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의 수효는 계속 증가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르낙에 의하면 교회와 군대 양쪽이 그리스도인의 군복무를 부분적으로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하였다.28 그리고 결국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와서는 교회와 국가 양쪽이 모두 변화된 사태에 대해 임시변통 이상의 원칙적인 방안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르낙에 의하면 로마 제국의 체제 이념이 최초로 이교로부터 그리스도교로 바꾸어지는 역사적 대사건이 발생한 곳도, 그리고 그 변화가 최초로 공인되었던 곳도 바로 로마 군대였다는 것이다.29 그리고 그리스도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여 초창기에 표방하였던 영적 군대로서의 그리스도 병사 개념을 수도원의 덕목으로 제한시키고 대신에 자신의 보호를 황제의 팔에 맡기게 되었다는 것이다.30 (22.1)
 이보다 20여년 후에 평화주의적 입장의 대표자로 나타났던 카두의 쇠퇴론적 설명은 위와 같은 하르낙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었다. 단지 하르낙에 있어서는 초기 그리스도교회 평화주의의 후퇴현상이 콘스탄티누스의 집권 이전에 발생하고 있으나, 카두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 첫 3세기 전체를 “사람들의 생활을 영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개혁하려는 교회의 과업이 정력적으로 이루어진” 황금시대로 보려했다는31 점에서 달랐다. (22.2)
 하르낙과 같이 국교회주의 프로테스탄트 입장을 계승하면서도 부분적으로 하르낙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학자 모팟(J. Moffatt)이다.32 그는 평화주의자인 카두와 마찬가지로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여 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카두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 정전론을 열렬히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초기 그리스도교회와 전쟁문제를 다루었다. (23.1)
 그의 주장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로, 그는 하르낙이 말하는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군사 은유들이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문헌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라 고대 세계의 여러 문헌에 빈번히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회 문헌에 나오는 스포츠 은유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스포츠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듯이 군사 은유들도 그리스도교회의 전쟁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둘째로,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반전주의적 평화공동체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고 하였었다. 모팟의 주된 관심 사항은 두 번째 주장이었다. 역사적 상황은 달랐지만 그가 도달한 결론은 앞서 독일의 비겔마이어가 주장했던 것과 유사했다. 즉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정부에 충성스러웠고 초기 교회와 로마 군대 사이의 주요 마찰 요인은 우상숭배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원 170년까지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발생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리스도인들이 그 미천한 사회적 신분 때문에 로마 군대에 징집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였다.33 (23.2)
 따라서 그에 따르면 반군사적, 반전쟁적 평화주의의 그리스도인들은 초기의 정통교회 전통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마르키온파와 같은 초기 교회의 이단적 외곽집단의 전통을 따르는 자들에 지나지 않았다.34 그러나 마르키온파 등 이단파 그리스도교 집단들이 평화주의적 주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통교회를 그 반대의 위상에 두어 반평화주의의 공동체로 간주하려는 논리는 상이한 신념들을 가진 그리스도교파들을 공간적으로만 대치시키고 그 시간의 전후문맥을 등한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말해 몇몇 초기 그리스도교 이단집단은 그 평화주의 때문에 이단으로 정죄된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평화주의는 바로 초창기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한 것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24.1)
 3.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본 주제에 대한 연구사의 제 3기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기간에 해당한다. 제 3기에 나온 훌륭한 연구성과의 배경에는 제 2기의 경우와 유사하게 제 2차 세계대전의 충격이 있었다. 제 3기의 특징은 비록 학자들 사이에 초기 그리스도교회와 로마 군대의 문제에 대한 기본 시각이 평화주의와 정전주의로 양분되는 경향이 계속되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교회 화합적 분위기 때문에 사료 해석의 공정성과 객관성,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을 소화하려는 진지성이 크게 진전된 사실에 있다. 이로써 지금은 금세기 초처럼 평화주의와 정전주의의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편향된 증거들을 나열하는 연구 방식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24.2)
 1946년에 나온 베인톤(Roland Bainton) 교수의「초기 교회와 전쟁」(The Early Church and War)35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평화주의 전통에서 나온 최초의 연구로서 본 주제와 관련된 자료들에 내재된 여러 가지 복잡성과 모순성 및 그 상이점들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 준 수작이었다. 베인톤은 과거에 여러 학자들이 교부들의 반군사적 태도의 근거로 제시했던 여러 설명들을 1) 우상숭배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혐오, 2) 그리스도의 신속한 재림, 3) 로마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개심 등의 셋으로 대별하고 이들을 차례로 비판하였다. (24.3)
 그는 카톨릭계 학자들에 의하여 단골 메뉴로 사용되어 온 우상숭배 문제에 대해서는 주로 교부문서들을 근거로 하여 그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반군사적 태도를 취하게 한 주요 이유이기는 하지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36 둘째로 초기 교회의 반군사적인 태도와 예수의 신속한 재림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교부 문서와 병사 순교열전 자료에서 그같은 언급을 찾아볼 수 없고 또 기원 2, 3세기에는 교회 내에 재림의 기대가 오히려 크게 후퇴했었다는 사실을 들어 배척하였다.37 셋째로 로마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개심 문제에 있어서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을 따랐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정부에 대하여 단지 충성의 형식을 달리했을 뿐이지 충성심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 못지 않았던 훌륭한 시민들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로마 정부에 대한 적개심이 교부들의 반군사적 태도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5.1)
 베인톤에 따르면 로마 정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은 절도 있고 질서를 존중하는 일상생활과 황제와 제국의 안녕을 위한 기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나타나고 있었다. 이것은 로마인들의 전통적인 충성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같은 태도는 그리스도인들이 충성의 대전제로 생각하는 평화의 개념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평화를 단순히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 정도로 파악하는 이교적, 전통적 이해를 넘어서서 히브리인들의 살롬(salom) 개념에 기초한 평화의 좀 더 본질적인 내용에 관심하고 있었던 것이다.38 (26.1)
 결국 베인톤에게는 유혈행위에 반대하는 평화주의적 근거만이 교부들과 초기 교회의 반군사주의의 중요한 이유로 남게 되었다.39 그는 특히 세베루스 황제 이후부터 로마군대 내에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증가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유혈행위를 반대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신념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로마 군대 업무의 점진적인 다양화 현상에 주목하였다. 즉 군대의 업무가 폭력과 유혈에 관련되는 것들 외에 평화적인 성격의 경찰, 체신, 토목, 소방 등의 업무로 다양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병사들이 평화주의적 신념에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도 군복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40 이 설명은 앞서 카두에 의해 시작된 경찰이론을 더욱 학구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는데 그리스도교회와 전쟁의 문제를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시각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군대의 시각에서도 보려고 했던 의도가 크게 돋보인다. 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평화주의가 지역 및 시기별로 그 형태가 다양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부분도41 진전된 관찰이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병사 순교열전 자료가 의도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26.2)
 베인톤의 논지를 계승하는 괄목할만한 성과는 1960년 프랑스의 오르뉘(J. M. Hornus)의「복음과 라비룸」(Évangile et labarum)에 의해 이루어졌다.42 이 저서는 이 분야의 관련자료 집성으로서는 가장 방대한 것이었다. 가능한 모든 자료들이 망라된 느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화주의적 전통을 따르는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기피해왔던 병사 순교열전 자료들을 철저히 분석하여 그 신빙성의 의심을 받은 자료들을 걸러낸 최초의 학자로 평가되었다. (27.1)
 제 2차 세계대전 후 로마 카톨릭의 정전주의 주장을 계승한 최초의 연구는 미국의 라이안(E. A. Ryan) 교수에 의해 나왔다.43 라이안은 그리스도인들과 군복무의 문제를 밀라노 칙령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어 그 발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다. 세 시기는 1) 기원 170년까지, 2) 170년부터 디오클레디아누스 황제까지, 3) 디오클레디아누스 황제로부터 밀라노 칙령까지이다. (27.2)
 첫 기간인 기원 170년까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시간적, 사회적, 신학적 배경뿐만 아니라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정치 사회 및 군사적 여건이 두루 작용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군복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두번째 시기인 170년 이후에는 그리스도교 선교의 확장과 제국 국경의 불안정을 배경으로 하여 로마 군대 내에 꾸준히 증가되어온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군복무가 현실적인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라이안 교수에 의하면 이 문제의 현실성과 심각성은 그리스도교회와 이교사회 양측에 의해 거의 동시적으로 환기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교측의 켈수스(Celsus)와 그리스도교측의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였다. 켈수스는 로마 제국이 야만족의 침입을 받고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교회측 신민들의 반전주의적 태도에 불안과 불만을 표시하였고 테르툴리아누스는 반전주의적이어야 할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군복무 추세에 우려를 나타내었다.44 라이안 교수는 마지막으로 세번째 기간인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와서는 상당수에 달한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로마군대의 황제숭배 강화로 새로운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다고 하였다.45 (27.3)
 라이안은 교부들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과 대다수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타협적인 태도를 구별하였을 뿐만 아니라 앞서의 카톨릭의 학자들과는 달리 초창기 그리스도교회의 강력한 반전적 자세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3세기 후반부터 현저해진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타협적 자세는 교리적 전환이 아니라 “일단 묵묵히 현상을 참고 견디어 좋은 날이 오기를 기다리자”는 잠정적인 타협이었다고 주장한 점이 주목되었다.46 (28.1)
 2차 세계대전 후 국교회주의 프로테스탄트 전통을 잇는 최초의 중요한 결실은 캄펜하우젠(H. V. Campenhausen)의 “초기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군복무”(Der Kriegsdienst der Christen in der Kirche des Altertums)에서 이루어졌다.47. 캄펜하우젠의 연구에서도 세 시기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이 나타나고 있으나 그 구분은 법률적, 이데올로기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원 2세기까지의 제 1기는 강제 징병제가 적용되지 않았던 시기여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군복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이 시기의 반군사적인 태도는 그리스도교의 평화적 신념 못지 않게 그들의 정치적 무관심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교부들의 주된 관심은 목회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에 정치적 판단같은 것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48 그러나 교부들의 반군사적 태도도 히폴리투스의 교회법과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으로 대표되는 강경론과 알렉산드리아의 키프리아누스(Cyprianus)로 대표되는 온건론으로 대별되었다고 하였다. (28.2)
 캄펜하우젠이 말하는 제 2기는 그리스도교 인구의 상대적인 증가와 더불어 이들의 정치적인 책임을 추궁하는 이교도측 여론에 대해 신학적으로 대응하는 시기였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오리게네스(Origenes)이다. 그는 야만민족의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는 로마의 평화가 그리스도인들의 반군사적 태도로 말미암아 더욱 위태롭게 되었다는 켈수스의 비난에 답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이 비난에 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윤리가 허용하는 모든 시민적 책임을 수용해야 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도 피 흘리는 행위에는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을 제시하였다.49 그런데 캄펜하우젠은 오리게네스의 이같은 반전 사상의 배경에 신플라톤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50 이것은 오히려 그의 반전주의의 복음주의적 기초를 간과한 관찰이었다. (29.1)
 캄펜하우젠이 말하는 세 번째 발전은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책임문제가 가상적 또는 관념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눈앞의 현실적인 문제로 등장하게 된 콘스탄티누스 체제 이후의 사태를 뜻했다. “제국의 시민 대부분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게 된다면” 이라는 불가능한 가정이 현실화되었고, 더욱이 황제 자신까지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게 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군대의 일원이 되어야 했으며 그것도 개인적이거나 잠정적인 타협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전반적이며 원칙적인 차원에서 그 책임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교회가 외부 세계의 일부 요소들은 수용했다고 해서 교회가 이제 세상의 원리를 수용하여 기존 교회의 도덕적 원리를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단지 교회가 그 사항에 한하여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했음을 뜻할 뿐이다.51 이같은 캄펜하우젠의 연구는 그의 주장이 제한된 역사적 증거에 의존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