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전쟁 및 로마 군대와의 관계에 대한 근대의 학술적 고찰은 1625년에 유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저 유명한「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Felli ac pacis)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전쟁관을 다룬 것이 그 효시였다. 그로티우스는 위 저서의 제 1권 제 2장에서 신약성서와 교부들의 전쟁관을 다루고 그리스도교가 전쟁을 거부한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본 주제의 연구 역사는

 1) 17세기에서 19세기말까지,

 2) 19세기말부터 제 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3)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 시기로 나누어 그 성과와 특색을 살펴볼 수 있다.1 (12.1)
 1. 17세기에서 19세기말까지
 그로티우스로부터 시작되는 연구사의 제 1기는 대부분 화란, 영국, 미국 등 해양국가들의 학자들에 의해, 주로 그리스도교의 평화론과 정전론(正戰論)의 논쟁 형태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1888년에 나온 베튠-베이커(J. F. Bethune-Baker)의「전쟁에 미친 그리스도교의 영향」2을 제외하면 그 대부분이 간략하고 단편적인 것들이었다.3 (13.1)
 본 주제에 대한 보다 본격적이고 중요한 연구 업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말로 들어서면서였다.4 이 기간에 이루어진 정력적인 연구의 배후에는 두개의 역사적 사건이 있었다. 그 하나는 비스마르크(Bismark)와 독일 로마 카톨릭교회가 충돌한 이른바 문화투쟁(Kulkurkampf, 1871-1884)이라는 사건이다. 독일의 학자들은 이 문화투쟁기를 거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역사적 규명을 초기교회 시대에서 시도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전쟁의 문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로마제국,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로마 군대의 관계에 대한 접근의 일환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띄었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취하는 입장에 있어서는 학자들이 로마 카톨릭계와 프로테스탄트계로 양분되었다. (13.2)
 2. 19세기말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제 2기 연구의 배후를 형성한 역사 사건은 제 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신보수주의 신학이 태동하여 신학적으로 자유신학과 대립하는 양상이 초래됐는가 하면 윤리학도들과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평화주의적 반전론(反戰論)과 정전론(正戰論)의 첨예한 대립이 야기됐다. 평화주의적인 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는 제 1차 세계대전이 전쟁의 가공스런 본질의 구체적인 실례들을 제공한 셈이었다. (14.1)
 이같은 역사적 배경을 안고 진행된 본 주제의 논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1)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평화주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는가?

 2) 그리스도교회는 로마 군대의 전쟁행위에 어떠한 도덕적 판단을 가지고 있었는가?

 3) 콘스탄티누스의 시대 이전에도 로마 군대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존재했는가? 존재했다면 어떠한 형태로 존재했는가?

 4) 로마 군대와 그리스도인 병사들 사이의 갈등 요소는 무엇이었는가? (14.2)
 이 문제들에 대해 제시된 대답은 정전론과 반전론의 입장에 따라, 그리고 해당 학자들의 신앙적, 역사적 배경에 따라 달랐다. 즉 이들의 다양한 해답은 사용한 자료들의 차이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같이 사용한 동일한 자료들의 다양한 해석에 기인하는 부분이 많았으며 물론 그 다양한 해석의 뒤에는 각기 다른 이념적, 역사적 배경들이 작용했던 것이다.5 (14.3)
 대체로 로마 카톨릭계 학자들은 그리스도교 정전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로마 군대와 갈등을 겪지 않았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호 일치적 이해가 초기 교회 이래의 그리스도교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자유교회 계통의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은 그리스도교회의 평화주의적 반전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초기 교회는 신약 성경, 그 중에서도 산상수훈의 비폭력적 반전론의 원칙에 확고히 섰으며 이 원칙이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와 국가의 상호 일치적 체제에 의한 교회의 타락으로 포기되었다고 주장한다. 셋째 그룹인 국교회 계통의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입장은 한결같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초기 교회의 평화주의를 인정하면서도 그 성격을 교조적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상황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콘스탄티누스 체제하에서 교회가 정전론을 수용한 것은 원칙의 포기가 아니라 변화된 상황에 대한 새로운 적응이었다고 주장하였다. (15.1)
 로마 카톨릭측의 주장은 1902년에 나온 비겔마이어(Andreas Bigelmair)의「콘스탄티누스 통치 이전 기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인들의 공직 참여」(Die Beteiligung der Christen am Öffentlichen Leben in Vor-Constantinischen Zeit)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는 느낌이다.6 “문화투쟁”의 영향 아래서 나온 이 연구는 호교적 의도가 분명한 것이었다. 비겔마이어는 독일 카톨릭 교도들이 종교적인 성격 이외의 어떤 이유로도 정부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초기 교회의 사례를 빌어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초기 교부들의 로마 군대 기피사상은 유혈과 살상을 반대하는 평화적, 윤리적 이유나 혹은 반정부적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로마 군대종교의 우상 숭배적 특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7 그러나 초기 교회시대에는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로마 군대의 징집대상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우상숭배 문제로 인한 그리스도인들과 로마 군대 사이의 긴장은 실제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고 하였다.8 (15.2)
 그는 콘스탄티누스의 정교일치적 체제를 찬양하였으며 콘스탄티누스 이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정부에 대해 충성스러웠고 로마 군대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로 하여금 제국의 재건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의 지원을 갈망하게 한 요소는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충성심이었다는 것이다.9 그러나 비겔마이어의 연구는 자신의 변증적 의도를 위하여 초기 교부들의 반군사적 주장들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반유혈적 반폭력적 이유들을 무시하고 단지 우상 숭배적 관련성만을 강조한 편향성과「병사 순교열전」같은 일차적 자료들을 사용하지 않은 결함 등이 지적되어 왔다. (16.1)
 비겔마이어로부터 거의 한 세대가 지나서 프랑스의 레끄레르(Henri Leclerq)에 의해 로마 카톨릭의 주장을 계승하는 연구가 나왔다.10 이 연구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덜 긴장된 정치환경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비겔마이어의 경우에서 보다는 그리스도인들과 로마 정부 및 로마 군대간의 갈등 관계에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선배들의 연구에서 사용되지 않았던「병사 순교열전」과 그리스도인 묘비명 같은 새로운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점에 있어서 새로운 면모를 나타냈다. 그는「병사 순교열전」 자료에 기초하여 비겔마이어 주장과는 달리 초기 교회 시대에 이미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상당수에 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반군사적 적대감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었으며11, 병사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반군사적 신념에 따라 희생된 자들이 아니라 단순히 군대 기율에 대한 불복종으로 처형된 자들이라고 주장하였다.12 (16.2)
 그는 또 비겔마이어와는 달리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와 락탄티우스(Lactantius)같은 교부들의 반군사주의적 태도를 인정했으나 교회에 대한 그들의 영향을 과소 평가하여 그들의 주장이 전체 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락탄티우스의 반군사적 주장이 새로운 주장이 아니라 그 전 시대의 교회전통을 계승한 것임을 간과하였다. (17.1)
 자유교회적 프로테스탄트의 평화주의 주장을 대변한 대표적 연구는 영국 조합교회의 배경을 갖고 있는 카두(C. J. Cadoux)에 의해 이루어졌다.13 제 1차 세계대전의 배경 속에서 나타난 카두의 연구는 평화주의를 철저히 옹호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 때까지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모든 연구를 압도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술이었으며 학문적인 견실성과 실증적 고증이 돋보인 것이었다.14 카두는 다른 연구들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예수의 윤리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만약 예수가 전쟁과 살상에 반대했다면 당연히 초기 교회의 입장도 예수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론적으로 주장하기를 콘스탄티누스의 집권과 더불어 그리스도교회가 로마제국의 정치적 입장을 수용하여 반군사적, 반전쟁적 자세를 포기함으로써 군복무와 관련된 윤리적인 문제가 봉쇄된 것이라 하였다.15 이것이 이른바 그의 쇠퇴이론(衰退理論: declination theory)이다. (17.2)
 그는 자신의 쇠퇴이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교부들의 주장들뿐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교회법 자료를 광범위하고도 심도있게 분석하였다.16 그는「병사 순교열전」 자료도 충분히 사용하고 있으나 동일한 자료에서 로마 카톨릭계 학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추출하였다.17 그는 또 그리스도인 병사들의 묘비명 자료를 통하여 초기 그리스도 교회 시대에 그리스도인 군복무자들이 존재한 사실을 인정했으나 이같은 현상은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정전론적 입장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로마 군대의 평화적인 경찰 업무 등에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18 이른바 경찰 이론으로 일컬어지는 이 설명은 후에 베인톤(R. Bainton)에 의해 더욱 학구적으로 발전되었다. (18.1)
 카두와 거의 같은 시기에 카두와 같이 평화주의적인 관점을 가지고 본 주제를 취급한 학자가 화란 라이든(Leyden) 대학의 히어링(G. J. Heering) 교수였다. 라이든 대학의 신학 학풍은 사회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그 전통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 점에 있어서는 히어링 교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의 타락」(The Fall of Christianity)19이라는 저서명 자체가 저자의 평화주의적 관점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저자의 혐오감은 이미 그 서문에서 다음이 같이 강렬하게 표명되고 있다. (19.1)
 “이 책의 저술은 나에게 있어서 어느 한 때의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불가피한 필연성의 결과이다.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와 군국주의의 말없는 동맹관계를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교와 정전주의 사이에 쐐기를 박고 싶은 것이다.”20 (19.2)
 히어링의 의도는 카두와 동일했다. 그는 현대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전쟁문제의 해결을 위해 초기 그리스도 교회 시대의 역사적 증거를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를 통해 새로이 제시된 역사적 자료들은 별로 없었고 주로 하르낙(A. V. Harnack)과 카두의 자료에 의존했다. 카두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복음적 교훈에 비중을 두고 예수가 폭력과 전쟁을 거부했다면 초기 교회도 당연히 그러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기원 후 170년까지 그리스도인이 군복무에 종사한 역사적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군복무가 문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서의 교훈에 따라 군복무를 기피했기 때문이라 하였다.21 (19.3)
 국교회적인 프로테스탄트계의 관점을 대표하는 최초의 연구는 독일의 하르낙(A. V. Harnack)에서 나왔다. 하르낙은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인「기원 첫 3세기간의 그리스도교회의 선교와 확장」(Die Mission und Ausbreitung des Christentums in den drei ersten Jahrhunderten)22에서 초기 그리스도 교회와 전쟁 및 군복무 관계를 부분적으로 다루었는데 1905년에는 이 부분을 확충하여「그리스도의 병사」(Militia Christi)23란 제목의 작은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이 저서는 그 때까지 이 주제를 다룬 모든 연구서들 중에서 가장 철저하고 학구적인 것으로서 이 후에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모든 연구들의 길잡이가 되었다. 하르낙의 이 저서는 자신이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 앞서 1902년에 나온 비겔마이어의 정교일치적이고 정전론적인 입장을 논박하기 위한 것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19.4)
 하르낙의 주장을 요악하면 이렇다. 즉 그에 의하면 초기 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본래 폭력을 거부하는 영적인 군대라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의 병사(Militia Christi)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는 그리스도의 병사 개념이 통속적인 뜻으로의 그리스도인 병사 또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군대로 변했으며 이것이 다시 중세의 무서운 십자군 개념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24 그는 「그리스도의 병사」 제 1부에서 초기교회의 전쟁 및 군복무관을 규명하기 위하여 그의 유명한 군사 은유론(軍事隱諭論)을 전개하였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을 평화주의적인 영적 병사로서 묘사하기 위하여 군사 은유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군사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교회 자체에 영적인 군사 집단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로마 군대 같은 교회 밖의 제도나 조직들에 대한 유비적(類比的) 성격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교회는 교회 자체의 기강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대 조직의 기율개념을 모방할 필요를 느꼈다는 것이다. (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