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상 생활은 징조(신호)에 의존하는 바가 실로 크다. 도로의 표시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낯선 도시의 교차로에 이르면 도로 표시를 찾느라고 애먹기 일쑤다. 중요한 고속 도로들에 도로 표시가 눈에 띄게 세워져 있을 때는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다. (21.1)
 필자는 어린 시절, 영국 살리스베리 평원을 여행할 때 어느 심하게 구부러진 도로 지점을 알리는 위험 신호판들이 일정한 거리로 세워져 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현장에는 훨씬 큰 신호판에 “위험하다”는 경고가 기재되어 있었다. (21.2)
 필자는 사내 아이가 태어난 직후에 시카고에서 일단 정지 표지를 무시하고 달린 죄로 교통 위반 딱지를 받은 일이 있다. 그때, 필자는 교통 위반 딱지를 받으면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일단 정지 표지가 어디 있길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일까 하고 유심히 살펴보니 웬걸 그 표지에 카페와 음료 간판들이 어지럽게 엉켜 있는게 아닌가? 제아무리 애기 아빠가 된 홍분으로 들떠 있기로서니 살리스베리 평원에서처럼 크고 확실하게 표지판이 서 있었던들 못 보고 지나칠 리가 없었다. (21.3)
 제자들은 간청하였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 24:3). (21.4)
 이중 질문
 제자들의 질문은 자신들의 심란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개의 다른 사건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는 질문은 성전의 파괴를 언급하는 것이었고,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사오며”라는 질문은 세상의 종말을 언급하고 있었다. 제자들에게는 성전의 종말과 세상의 종말이 동일한 사건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오직 세상의 종말만이 참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5)
 그들은 두 개의 사건을 하나로 묶은 다음 이를 위한 단 하나의 정보를 알고자 했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즉, 그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 주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가 그것이었다. (21.6)
 성경 주석가들은 예수님 자신도 답변의 말씀을 하실 때 두 사건에 대한 정보를 하나로 묶으셨다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소개한 마태복음 24, 25장의 본문을 관찰해 볼 때, 그리스도의 답변의 말씀은 쉽사리 분류할 수가 있다. 예수님은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들에 해당하는 다른 징조들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제시하셨다. (21.7)
 분명하고 하잘한 징조(표지)들
 예수님은 성전의 파괴에 대해 하나의 확실한 징조를 주셨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마 24:15)이라 하셨다. 이는 상징적인 예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누가복음 21장 20절에서 설명하기를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이라 하셨다. (21.8)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는 매우 독특하고도 짧은, 징조들의 목록을 제시하셨다. 즉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고(마 24:14), 천체에 이상한 현상들이 발생하고(마 24:29), 번개처럼 만인이 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예수님이 직접 재림하신다(마 24:27, 30)는 것이다. (21.9)
 재림의 방식
 일견할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서 정곡을 회피하고 계신 듯한 인상을 준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그분께서 가장 강조하신 징조는 적군의 도착이었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에 대해 가장 강조하신 징조는 당신의 재림하시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제자들의 질문의 정곡을 찌르는 진지한 답변이었다. (22.1)
 일이 진행되면서(예수님이 보신 그대로), 기원 후 66년에 적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건이야말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모든 징조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왜냐하면, 로마의 군대가 갑작스럽게 예루살렘에서 퇴군하였고, 이로써 예루살렘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로마군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예루살렘을 떠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22.2)
 그분은 당신의 재림의 징조로서 재림의 방식을 특별히 강조하셨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22.3)
 “인자(사람의 아들)의 징조”는 그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다. 마치 영국의 국왕이 국가 행사에 그 유명한 황금 마차를 타고 행차하고 미국의 대통령이 공군 1호기를 타고 날아다니듯 이 인자도 대단히 중요한 행사에 초자연적인 구름을 타고 행차하시는 것이다. (22.4)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구름을 타고 행차하시는 모습을 세 경우에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

 (1) 그리스도가 땅에서 승천하셨을 때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행 1:9) 하였다.

 (2) 재림 전, 심판이 시작될 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옛적부터 항상 계시는 이에게로 나아갔다(단 7:9~14; 계 12~14장).

 (3) 재림시에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계 1:7).

 다 구름을 타고 만인이 보는 가운데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야말로 인자의 가장 중요한 징조이다. (22.5)
 경계와 경고
 재림의 징조에 대해 질문할 때 제자들이 마음속에 기대했던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카운트 다운의 시기를 예상할 수 있는 초기 경보의 자료들이었다. 물론, 오늘날도 우리는 그런 비밀 정보를 갖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무의식 중에 재림의 방식에 불과한 재림의 징조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을 것인가 하는 불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22.6)
 이 문제는 뒤에서 좀더 깊이 다루기로 한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간표 같은 것을 작성하는 데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셨다는 점만 유의하기로 하자. 그 때로부터 6 주 후,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행 1:6, 7)라고 대답하셨다. (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