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6부 위험에 처한 관계 제32장 심판의 날은 결혼과 같다
 “여긴 베이셔—52, 난 살아있다. 도와 달라!” 토머스 핸드포드가 F-16 전투기로 보스니아 상공을 비행하고 있을 때에 그는 오그레이디 대위의 무선호출신호를 사용한 무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자신을 속이려는 적군의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한국 주둔때의 비행중대의 이름을 물어보았다(Time, 1995. 7. 19. 24). (272.1)
 말은 반드시 시험을 거쳐야 한다. (272.2)
 “저와 결혼에 주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고 대답한다면 청혼은 받아들여져 결혼을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식 전까지 그 말은 시험을 받을 것이다. 안내 방송이 나오고 3단 케이크도 준비되고 연주자들은 예행연습을 한다. 교회는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탁자는 선물들로 쌓일 것이고 가족과 친구들은 교회의 장의자에 앉을 것이다. 주례 목사님께서 등단하신다. 그런데 신랑이나 신부가 두려워하지 않고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272.3)
 결혼식 날 아침 자신이 막 시작하려는 헌신의 생애를 생각할 때 무섭고 두려웠을지라도 나와 결혼해준 신부에게 감사한다. (272.4)
 혼인 서약 “그렇게 하겠습니다.”란 짧은 두 마디는 아주 긴 의미를 가진다. 죽기까지 사랑하고 존중하며 서로를 아끼겠다는 약속이다. 결혼식 이후에는 생활을 통해 결혼서약을 시험받는 결혼생활이 있다. (272.5)
 그들의 말은 행동을 통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행동이 뒷받침 되지 않는 말은 값어치 없고 의미 없을 뿐만 아니라 연합을 깨뜨린다. (273.1)
 “주여! 주여!” 하는 외침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인다는 표현이다. (273.2)
 이 말은 아주 적절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도 검증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73.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273.4)
 그리스도의 이 질문은 자신이 믿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신자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지 여부를 시험한다. 과거에 우리가 예언하고, 귀신을 내쫓고, 과거에 하나님의 뜻을 행했던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과거에 용서를 받았던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계속 행해야만 한다. (273.5)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왕이 되심을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속죄일에 자신을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그분을 향한 지속적인 충성심을 나타낼 것을 요구하신 이유이다(레 16:29). (273.6)
 헌신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했다. 충성스런 이스라엘 백성과 불성실한 백성의 시금석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여부였다. (274.1)
 대속죄일의 제사의식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행위에 바탕을 두고 그들의 충성과 불충성을 심판하실 때인 세계적 심판을 묵시적으로 보여준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 염소 떼로부터 양 떼를 이끌어내 듯이 그분께서는 자신의 이웃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따라 그의 백성과 그의 백성 아닌 사람들을 구별하실 것이다(마 25:31~46). (274.2)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서 심판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274.3)
 각 사람의 행위는 믿음의 유무를 보여주기 때문에 심판에 있어 중요하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엡 2:8~9). 그렇지만 이렇게 질문해 보자. 우리가 진정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은 결국 행위를 관찰함으로 그 해답을 얻을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진정한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위를 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역사하며(갈 5: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약 2:26). (274.4)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274.5)
 비록 사람을 바꾸어 놓는 그 힘을 눈으로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 변화의 결과는 너무나 확실하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라고 말씀하셨다. 변화케 하는 성령과 은혜와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성령으로 새로나고 변화된 사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행함은 이웃에게 목격되고 이웃에 의해 증거될 것이다. (275.1)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고 살아있는 믿음이 없으면서 자칭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이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즉시 내치시는 대신 그들이 회개하고 자신에게로 돌아올 시간을 허락하신다. 알곡과 가라지를 나누듯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거짓 그리스도인을 나누실 그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내하신다(마 13:24~30, 36~43). (275.2)
 심판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에 나타나는 것처럼 예수님의 비유들 속에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비유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 비유는 왕의 결혼 잔치 초대에 응한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는 결혼예복을 입지 않아서 부적절한 옷을 입고 있었다. 결국 자신의 옷을 입은 채 결박되어 밖으로 내쳐졌다(마 22:1~14). (275.3)
 여기서 왕은 하나님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아주 좋은 출발의 신호지만 결혼식에서 결혼 예복이 없는 것은 그분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2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