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챤과 술 제 7 장 주정 음료와 관련하여 잘못 이해된 성경 귀절 1. 신명기 14:26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고
 이 귀절이 중요한 이유
 신명기 14:22~26에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십일조를 성소에 가져와 하나님께서 풍성히 수확하게 하여 주심을 인하여 찬양을 드린 연례 추수 절기에 관한 독특한 법령이 나온다. 이 법령은 성소 가까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일반적인 규칙과, 멀리 사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규칙은 다음과 같다.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티로쉬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 14:22~23). (233.1)
 특별 규정은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야인이나 쉐카르) 등 무룻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신 14:24~26)이다. (233.2)
 적당론자들은 이 “지연된 십일조”에 관한 특별 규정을 성경이 분명하게 적당한 음주를 승인하는 전거구(典據句 : locus classicus)로 여긴다. 케네스 젠트리는 “이 귀절의 진의는 애매모호하지 않고, 하나님의 승인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쉐카르(shekar:독한 알코올 음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23절)’ 가운데 마시면 ‘여호와 앞에서도 (26절)’ 즐길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1 (233.3)
 문제의 본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분문상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본문이 하나님께서 먼 곳으로부터 성소로 온 이들에게 그들이 드리는 십일조의 일부로 음식 (우양) 뿐만 아니라 “포도주나 독주(26절)”를 사도록 허용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역 성경이 사용한 단어 “독주”는 히브리 어 명사로 쉐카르인데,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23번 사용되었다. 신명기 14:26과 그 외의 한 두 곳2 이와 같이 사용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쉐카르는 하나님께서 불허하신 취하게 하는 음료를 의미한다. (233.4)
 예를 들자면, 잠언 20:1“독주 (쉐카르)”“떠들게 하는 것”으로 정죄하고 있다. 이사야도 비슷하게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쉐카르)를 따라가는 자에게 화가 있을 것”(사 5:11) 이라고 선언하였다. 독주는 포도주와 함께 제사장들(레 10:9~11)과 나실인들(민 6:2~4; 삿 13:3~5)에게는 금하여진 것이었다. (234.1)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을 완전하게 불허하시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신명기 14:26에 언급된 연례 추수 절기에 그것을 마시는 것을 분명히 승인하셨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234.2)
 적당론자들이 제시한 해결책
 적당론자들은 하나님께서 “포도주와 독주”를 과도하게 마시는 것을 불허하시고, 적당히 마시는 것은 승인하셨다고 구별함으로써 이 명백한 긴장 관계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3 (234.3)
 그러나, 이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 첫째로,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신 14:23)라는 말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셔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추수기에 십일조를 드리고 곡식과 포도 음료(티로쉬—포도즙), 기름과 우양의 처음 난 것 (신 14:23)과 같은 수확물들을 성소에서 먹는 것을 말한다. 두번째로, 성경은 3장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주정 음료를 마시는 것을 그 마신 양에 관계없이 정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여기서 사용된 쉐카르란 용어가 통례적으로 사용되는 것과 다르게 사용되었든지, 아니면 성경 그 자체가 모순된다는 말이다. 성경 자체가 모순된다는 말은 성경상의 하나님의 계시와 영감을 부인하는 말이다 (딤후 3:16; 벧후 1:20, 21). 그러므로 이 단어가 여기서는 통례적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경우만이 남는다. (234.4)
 모세의 양보
 이 두 가지 해결책 외에 제시된 또 한 가지, 즉 세번째 해결 방안은 자기 백성들의 풍습에 관한 노련하고 긍휼심 많은 지도자의 통찰력이 이 문제의 해답이라고 보는 것이다. 즉 이 해결책은 하나님의 금주 명령을 무효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고대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과 축제에서 널리 행하여진 음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4 (235.1)
 즉 백성들이 알코올을 마시는데 중독되다시피 한 것을 알고 있는 동정심 많은 지도자의 양보(통찰력)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문맥과 상식은 이 해결책을 지지하여 주지 않는다. 부정한 음식을 삼가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맞도록 살라고 명하는 모세가 그 훈계의 절정에서 취하게 하는 “포도주와 독주”를 자유롭게 마시라고 훈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모세가 백성들이 술에 중독되다시피 한 상황을 알고 있었다면 십일금의 일부를 “포도주나 독주”를 사는데 쓰라고 권하였다고는 상식적으로 생각될 수 없다. 오직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만 그리할 것이다. (235.2)
 또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성경이 주정 음료에 관하여 가르치는 바에 있어서 모순된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235.3)
 만족시켜 주는 포도즙
 로버트 티치아우트는 이 신명기 14:26의 해석상의 문제에 중요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야인쉐카르가 함께 나올 때는 언제나 이 두 단어가 한결같이 중언법, 즉 포도 음료에 관하여 똑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 단어들은 대부분 취하게 하는 포도주를 언급하지만, 신명기 14:26에서 야인쉐카르란 두 단어는 함께 “만족시켜 주는 포도즙(satisfying grape juice)”5 이란 뜻이다. (235.4)
 본문과 문맥을 살펴보면 두 가지 점이 눈에 띈다. 본문에 나오는 쉐카르는 야인과 마찬가지로 “포도즙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칭할 수 있다”(참조 신 29:6; 민 28:7; 출 29:40).6 명사 쉐카르와 어원적으로 관련 있는 동사 샤카르(shakar)는 학개 1:5, 6아가 5:1에서 사용된 것처럼 근본적으로 “많이 마신다”를 뜻한다.7 그러므로 이 명사나 동사의 본질적인 의미는 술에 취함이 아니다. 그 의미는 이 단어가 속한 문맥과 마시고 있는 음료에 의하여 결정된다. (235.5)
 티치아우트는 “문맥이 구체적으로 그 음료를 여호와 앞에서’ 마셨다고 하기에 그 의미, 즉 ‘만족시켜 주는 포도즙’이란 뜻”이라고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으로 인하여 그 분 앞에서 적합하게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맑아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임재한 곳에서 임무를 집행하는 제사장들로 취하게 하는 음료 (죽음의 고통에 관하여一레 10:9)를 마시지 말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기에 하나님께서 똑같이 취하게 하는 음료들을 경배자들이 자신 앞에 가끔 올 때 마시라고 했다는 것은, 특히 그들이 자신들의 제사장들과 함께 있을 때에 그리했다는 주장은 더 더욱 하나님의 품성과 맞지 않다. (236.1)
 “문맥은 26절에서 그 이전 절에 비추어 볼 때, 오직 신선한 즙만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매우 강력하게 제시하여 준다. 23절에서는 이 추수 절기를 지키고자 온 이들이 야인이 아니라 티로쉬를 가져와 마신다는 것이 명확하다. 야인은 약간 모호한 용어(문맥에 따라 신선한 즙이나 발효된 포도주 둘 중에 하나를 의미할 수 있음)로 적절히 간주될 수 있는 반면, 티로쉬 는 38번 구약성경에서 사용된 모든 경우 신선한 포도즙만을 칭한다” (참조 83쪽 각주 1번). (2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