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3 부 안식일과 생명 제 5 장  안식일의 나라에서 생명의 양식과 죽음의 양식
 안식일의 “너 먹으라”는 명령과 “너 먹지 말라”는 명령
 안식일은 우리에게 창조와 재창조의 재현이다. 안식일의 계명은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이며 재창조의 명령이다. 안식일의 명령은 “너 있으라”(창 1:3)는 명령이다. “너 살라”(겔 16:16)는 명령이다.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명령이다. “너는 죽지 말라”는 명령이고 “죽지 말고 살라”는 명령이다. “지키고 살라는 명령”이다. “먹고 살라”는 명령이다 (316.1)
 인생에게 사는 것은 상당 부분 먹는 것이다.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 있으라” 하는 명령은 상당부분 “너 먹으라” 하는 명령이다. 하나님이 “너 있으라” 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너 먹어라” 하시는 은혜이다. 그래서 안식일의 살라는 명령, 창세기의 살라는 명령은 “먹으라”는 명령이다. 굶지 말라는 명령이다. 굶어 죽지 말고 먹고 살라는 명령이다. 살기 위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서 너는 먹으라는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음식을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한 것이라”(행 27:27)하시는 것이다. (316.2)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고 동산 가운데는 생명나무도 심으셨다”(창 2:9).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로 먹으라 하셨다”(창 2:16). 진실로 우리에게 “있으라,” “살라” 명령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때를 따라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주시는 자”(마 24:45)이시다. “하나님의 떡을 세상에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요 6:33). 그래서 안식일의 축복은 먹는 축복이다. 만나를 내리시는 축복이다. 풍성한 음식으로 잔치하는 축복이다. (316.3)
 안식일의 “너 있으라”는 명령은 “이웃을 있게 하라”는 명령이다. 안식일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는 명령일 뿐 아니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의 생명을 돌보라”는 명령이다(창 1:28). 네가 네 아우를 지키라는 명령이다(창 4:9).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명령이다. 네 아우가 건강하게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명령이다. 그리고 이웃에게 먹이를 주라는 명령이다. 고아와 과부에게 먹이를 주고 병자와 나그네에게 먹이 주고 소와 나귀에게 먹이를 주라는 명령이다. 먹이를 주어 살게 하라는 명령이다. (317.1)
 따라서 안식일의 명령은 죽이지 말라는 명령이다. 죽이지 말고 살게 하라는 명령이다. 굶기지 말고 먹이라는 명령, 굶기지 말고 살리라는 명령이다. 생명을 억압하지 말고 자유케 하라는 명령이다. (317.2)
 인생에게 사는 것은 먹는 것이다. 그러나 먹는 것은 상당부분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지만 먹고 죽는다. 먹어서 살기도 하지만 먹어서 오히려 죽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 있으라 하는 명령과 안식일의 너 있으라는 명령은 너 먹으라는 명령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 너 먹지 말라는 명령이기도 하다. 죽이는 것으로써는 먹지 말고 죽는 것으로써는 먹지 말라는 명령이다. (317.3)
 그리하여 태초의 창조주간에 너 있으라, 너 살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모든 열매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식물이 되리라고 명령하셨다.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먹으라 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명령하셨다(창 2:16, 17). 동산의 각종 나무와 생명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네가 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네가 죽으리라 하셨다(창 2:16, 17). (317.4)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라”(마 6:11)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것”(요 6:33)이라고 하셨다. 하늘이 주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면 사람이 강건해 진다”(행 9:19)고 하셨다. 하나님의 양식을 먹으면 “너희에게 구원이 된다”(행 27:27)고 하셨다. (318.1)
 그러나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요 6:27). 음식 아닌 음식을 위해 애쓰지 말라 하셨다. 먹으면 죽을 양식을 탐하지 말라. 먹어서 생명을 주는 양식이 아니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을 먹지 말라 하셨다. 너희에게 구원이 되지 못하고 너희에게 멸망이 될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318.2)
 그러면 무엇이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강건하게 하고 구원이 되는 양식인가. 또 무엇이 너희로 살지 못하게 하고 멸망이 되게 하는 썩을 양식인가.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은 네가 임의로 먹어도 되는 양식이다. 네가 임의로 먹는 네 양식이다. 반면 사람이 먹으면 반드시 죽는 음식, 곧 썩을 양식은 네가 임의로 먹지 못할 실과이다. 남의 과일이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네가 임의로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네 과일이 있고 네가 임의로 만지거나 먹지 못할 남의 과일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이다. 네가 임의로 할 수 있는 네 여자가 있고 네가 임의로 만지거나 다치면 반드시 네가 죽는 남의 여자가 있다. 네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네 소유가 있고 네가 임의로 손대지 못하는 남의 소유가 있다. 이것이 십계명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계명의 나라이다. (318.3)
 사람에게는 사는 것이 먹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사는 것은 먹지 않고 지키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는 관계 곧 생명의 관계는 먹이의 관계이고 지킴의 관계이다. 먹이의 관계로서 생명의 관계가 되고 상생의 관계가 되도록 그리고 지킴의 관계로서 생명의 관계가 되고 상생의 관계가 되도록 되어 있는 질서가 에덴 동산의 질서이다. 이런 질서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다. 이같은 먹이의 관계에서 먹고 먹히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생명의 질서를 어기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생의 관계가 되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관계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지킴의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먹고 먹히는 삶으로 나간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상생의 관계가 되지 못한다. 지키고 사는 삶을 파괴하게 된다. 피차 멸망하게 된다. (319.1)
 사람과 동산의 각종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의 관계는 먹고 먹힘으로써 상생하는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는 먹고 먹힘이 서로에게 “하나님의 떡을 하늘에서 내려 생명을 주는” 행위가 된다. 먹고 먹힘의 관계에서 서로가 “강건해 진다.” 서로에게 “구원이 된다.” 먹는 것이 절대로 죽이는 것이 되지 않고 먹히는 것이 절대로 죽는 것이 되지 않는다. (319.2)
 먹음의 원형적 형태는 물을 마시듯 먹는 것이고 공기를 숨쉬듯 먹는 것이다. 우리가 물을 마신다 해서 물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물은 내 밖에서도 살았고 내 안에서도 계속해서 산다. 밖에서 흘러와 나를 통하여 밖으로 흘러간다. 나에게 마시움을 당함으로써 물은 새로운 기능과 역할과 보람으로 자란다. 공기도 마찬가지다. 나는 공기를 마실 때에도 공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흡입됨으로써 공기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밖에서 불어와 나를 통하여 내 밖으로 불어 나갈 뿐이다. 우리에게 먹이로 주신 채소와 과일은 먹힘 자체가 존재하는 목적인 과일일 뿐 아니라 먹힘으로써 죽는 것이 아닌 과일이다. (319.3)
 이러한 채소와 과일의 특징은 풀이 씨와 구분되어 있고, 살과 씨가 구분되어 있다. 풀을 먹기 위하여 씨를 먹어야 할 필요가 없고 살을 먹기 위하여 씨까지 먹어야 할 필요가 없는 과일이다. 우리가 먹기 위하여 먹이의 생명까지 유린할 필요가 없는 채소이고 과일이다. 우리는 채소를 먹지 채소의 씨를 먹지 않는다. 과일의 살을 먹지 과일의 씨를 먹지 않는다. 채소와 과일의 살을 먹지 채소와 과일의 생명을 먹지 않는다. 사람은 채소와 과일을 먹을 때 물 마시듯 공기를 마시듯 그리고 공중의 새가 낱알을 먹듯이 먹는다. 소가 풀을 먹듯이 먹는다. 만약 사람이 씨를 먹어도 좋다면 새가 씨를 먹고 그 씨를 배설하여 그 씨가 땅에서 다시 새싹을 내듯 우리가 먹은 씨가 배설되어 땅에서 다시 생명을 키울 수 있도록 먹어야 한다. 절대로 씨를 씹어 생명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씨를 씹어 삼킬 수밖에 없는 우리의 먹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차선책이 무엇인가. 다시 씨와 열매를 맺을 종자를 남기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씨를 말리는 먹음 생활, 내가 먹고 살기 위하여 먹이의 종자를 말리는 방식은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다. (320.1)
 사람은 본래 산삼 씨를 먹어 심심 산천에 그 씨를 뿌리는 새처럼 곡식과 채소를 먹도록 되었다. 사람은 이렇게 먹고 살아야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강건해 진다. 이런 먹음이 사람에게 구원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먹혀야 곡식과 과일은 그 생명을 증가하고 증식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이 과일의 살을 먹지 않으면 그 과일은 씨가 될 수 없다. 그 과일은 생명을 이어가지 못한다. 그 과일은 강건하지 못한다. 그 과일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 과일의 살이 먹힘으로 없이 되든지 썩음으로써 없이 되어야 씨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 씨가 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씨가 제 할 일을 할 수 있다. 사람과 과일은 먹고 먹힘으로써 서로의 생명이 강건해지고 증식되고 성장하는 상생의 관계에 성실히 하는 것이다. (320.2)
 그러면 사람에게 먹이가 되지 않는 선악과는 어떤 과일인가. 사람이 먹으면 반드시 죽고 먹는 대신 “사람이 지키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을”(겔 20:13) 선악과는 어떤 과일인가. 선악과는 우리가 임의로 만지거나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다. 네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만지거나 손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공물이다. 거룩한 것이다. 상하지 말아야하고 훔쳐먹지 말아야 한다. 없애지 말아야 한다. 선악과는 우리가 훔쳐 먹지 말고 지켜야 하는 과일이다. (321.1)
 훔친 음식이 부정한 음식이다. 훔치는 것이 남을 부정케 하고 자신을 더럽게 하는 일이다. 청년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먹지 않기로 결심한 부정한 음식(단 1:8)은 돼지고기와 포도주만이 아니다. 부당한 음식, 훔쳐먹는 음식, 뺏어먹는 음식, 뇌물로 받는 음식, 놀고먹는 음식이 모두 부정한 음식이다. 선악과는 먹이로서 존재하는 과일이 아니고 있음 자체로서 존재의 목적인 과일이다. 자신의 지켜짐을 통해서 다른 피조물들의 생명과 순결도 지켜주는 존재이다. 자신의 생명의 지켜짐을 통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주는 주체의 목숨을 지켜주는 과일이다. 이 과일은 먹힘이 곧 죽음이 되는 과일이다. 이 과일을 먹는다는 것은 그 과일의 생명을 없이하고 죽이는 일이 된다. 이 과일을 먹이로 삼는 일은 그 과일을 살생하는 일이 된다. 이 과일을 먹는다는 것은 이 과일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된다. 먹는 자가 죄를 짓는 일이 된다. 먹는 자가 악을 알고 악을 익히는 일이 된다. (321.2)
 사람이 먹으면 오히려 죽고 사람이 그 과일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고 강건해지고 구원을 얻게되는 선악과는 먹힘으로써 죽는 과일이다. 이 과일의 특징은 살과 씨가 구분되어 있지 않다.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어진 곡식과 채소와 과일을 미루어 생각하면 자명해진다. 선악과는 씨가 없는 과일이거나 전부가 씨인 과일이다. 전부가 생명인 과일이다. 씨이면서 살인 과일이다. 살과 씨가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과일이다. 살과 생명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과일이다. 살이면서 씨이고 살이면서 생명인 과일이다. 살을 먹으면 씨를 먹는 것이 되고 생명을 먹는 것이 되는 과일이다. 살을 먹는 것이 곧 생명을 죽이는 것이 되는 과일이다. 이 과일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이 아니다. 사람이 먹으면 강건해지고 구원을 얻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다. 먹으면 사람이 죽는 썩은 양식이다. 먹고 사는 양식이 아니라 지키고 사는 율법과 같은 과일이다.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는 계명과 같은 양식이다. 사람은 그 앞에서 먹는 자로서가 아니라 도덕적 주체로서 자신을 자각해야 하는 과일이다. 선악과는 과일이지만 동물 같은 과일이다. 살과 피가 구분되지 않는 동물 같은 과일이다. (322.1)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은 짐승을 식물로 주셨다. 동물도 사람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짐승의 살을 일용할 양식으로 주셨다. 과일을 씨 빼고 먹듯이 피를 빼고 짐승의 살을 먹을 수 있다면 짐승의 살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되는 피채 먹는다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고 하셨다(창 9:3-6). (3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