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침해(요일 3:4), 혹은 믿음의 부족으로 인하여(롬 14:23) 그 표준에 미달되는 것(롬 3:23)이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행하기를 거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약 4:17). 죄에는 설명이 있을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죄가 존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죄는 창조 전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기승을 부렸고, 그분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죄는 그런 다음에 전쟁을 초래하였고, 무수한 천사들이 행복한 하늘에서 쫓겨나게 하였다. 죄는 창조 후에 에덴의 향기나는 나무 그늘 밑으로 잠입하였고, 간드러진 말과 그럴 듯한 약속으로 인류가 입고 있던 빛의 옷을 벗겼으며, 이 세상을 흑암과 부패, 사망으로 던져 넣어 버렸다(롬 6:23). (391.1)
 하나님께서는 반역의 나무의 저주받은 과실로 인한 치명적인 병과, 그 병이 초래한 더럽혀짐을 치유하기 위하여 귀한 해독제를 가지신 의사 예수를 소개하여 주셨고, 이 의사에게 치료를 받기로 택하는 모든 이들은 나음을 입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이 의사는 치유하기 위하여 스스로 죄인 대신에 죽어서, 자기의 피로 죄인을 정결하게 하고 생명을 주는 약을 주실 것이다.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이 희생 제사 제도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 문에 나타났고, 이 진리들은 그 후손들에게 계속 전하여졌다(부조와 선지자, 68, 71; 창 3:15, 21; 4:3, 4). (391.2)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을 교육시킴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성소와 그 기구들에 집약된 수백 가지의 설명을 통하여 구속의 경륜의 세부 사항을 다시 가르치셨고, 성소의 제사장 직분, 희생, 예식적 축제 제도에 내포된 포괄적인 함축성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구세주의 고뇌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깊고 다양한 의미들을 묘사하기 위하여 무지하여 혹은 부주의 하여 지은 죄와 알면서 지은 죄를 다루기 위하여 속죄제를 고안하셨다. 성경 독자들은 이 제사를, “아론과 그의 아들들” 의 성별식 사건의 한 일부분으로 제일 처음 알게 되었다(출 29:10~14). 그 범위와 특징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391.3)
 우리에게는 무지로 지은 죄는 봐줄 수 있다고, 혹은 죄인에게 적어도 자비나 용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391.4)
 또 가끔 무지를 무죄와 동일시 하기도 한다. “육에 속한 사람”“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고전 2:14; 요 3:19),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자 무지한 채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무지하여 지은 죄로 인하여 속죄 제물을 죽이는 일은 이런 합리화에 대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답이시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뜻에 대한 고의가 아닌 위반을 “죄”라고 부르시었고(경고를 받지 않은 자가 죽는 것에 관하여 언급을 한 에스겔 33장 6절을 보라). 대속물을 죽게 하심으로써 범죄자가 유죄하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조하시었다. (392.1)
 희생 제물이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전 세계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면서 세상의 제사장으로서 그들이 짓고 있는 무서운 범죄를 알지 못하는 이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셨다(눅 23:34). 순교자 스데반은 자신에 대한 불법 행위가 무지 몽매하여 행하여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행 7:60). 스데반을 죽이는 데 일조를 한 다소의 사울은 그가 알지 못하였던 죄의 가증스러운 본질을 성령에 의하여 깨닫게 되었을 때에 자신이 “죄인 중에 ∙∙∙ 괴수”라는 것을 시인하였다(딤전 1:15). 무지의 죄는 죽음으로까지 이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죄인이 성령께서 행하시는 죄를 깨닫게 하는 봉사에 응할 때에 용서하여 주실 채비를 갖추고 계신다(요 16:8~11). (392.2)
 죄와 속죄제를 표현하는 한 용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각각 히브리어 단어인 하타(chattá th)와 희랍어 단어인 하마르티아(hamartia), 한 단어를 사용하여 “죄”“속죄제”를 표현한다. 성경 번역자들은 이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였으나, 세심한 독자들은 핵심 진리를 나타내 주는 이 관용구를 깊이 살펴보아야만 한다. 참회자가 성소에 속죄를 드릴 때 죄도 함께 가져왔다. 여호와께서는 벌써 유혹을 받고 있기에 죄를 범할 가인에게 그의 “속죄제”(숫컷 동물임, 비교 레 4:2. 레 4:28에 나오는 암하아 레츠<am há aretz>, 평민이 드리는 암컷 동물이 아님)가 그 자신을 대신하여 죽임을 당할려고 쭈그리고 앉아 있다고 확실하게 말씀하셨다(창 4:7). 바울은 고린도의 친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비록 “죄를 알지 못하”시지만 인류를 대신하여 “죄(속죄제)를 삼으셨”다고 말하셨다(고후 5:21; 비교 13, 15; 엡 5:2). 사도들은 로마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속죄제인 그 아들을 통하여 육신에 죄를 정죄하였다고 선언하였다(롬 8:3, 비교 난외주). (392.3)
 하타는 목표(잠 8:36) 혹은 표적(삿 20:16)에서 빗나가거나 벗어나는 것, 혹은 그릇 행하는 것(잠 19:2)을 뜻하는데, 이 단어의 강의 능동태형(피엘 형)은 속죄제를 드려 얻은 결과, 즉 속죄제가 죄를 덮어 주어 화목케하거나 속죄케 하는 것(대하 29:24), 정결케 하는 것(민 19:19; 출 29:36), 깨끗게 하거나 청정케 하는 것(레 8:15)을 강조한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한 것과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살인한 것을 회개하면서 자신의 기도시에서 이 관용어를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사용하였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속죄제물로 삼으소서]. 내가 정하리이다”(시 51:7). 이 기도는 죄인이 드리고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적용하신 이 희생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392.4)
 자기 자신의 제물을 가져온 참회자
 속죄제의 몇몇 세부사항들은 번제와 화목제의 그것과 비슷하였다. 참회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흠없은 적합한 수송아지를 구하였는데(레 4:2~4), 하나님께서 이 수송아지를 우선하여 마련하셨다는 것을 깨달았고(시 50:10), 이 결백한 피조물을 자기의 대속물로서 드렸다. 제사장의 지도를 받아서 그 희생 제물을 “제단 북쪽”의 성소 휘장 앞의 지정된 장소에 묶어 놓고 내동댕이 쳤다. 제물의 얼굴을 서쪽으로 돌려놓고, 양 손을 두 뿔 사이의 머리에 대면서 온 몸의 체중을 그 제물에 기대며 조용하게 하나님께 자신의 특정한 죄들을 자백하였다(레 5:5; 민 5:6, 7). “손을 얹어 놓는 행위”는 참회자가 자기의 죄를 제물에 전가하고 있다는 표시로서, 참회자는 이 제물에게 자신의 죄를 담당할 책임을 위임한다. 이렇게 함으로 참회자는 자신의 죄를 결백한 제물에 전가하였고, 이 제물은 참회자의 대속물로서 대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비교 레 16:21; 사 53:4, 5). 참회자는 칼을 꺼내 그 목을 위에서 아래로 베었다. (393.1)
 제사장은 제물의 피를 금대접에 받았는데(A. Edersheim, The Temple, 162 쪽을 보라), 그 금대접에 피가 쏟아지지 않도록 들고 있었다. 제사장은 그 동안 내내 피가 응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저었다. 참회자가 속죄제에서 할 일은 이 살생으로 마쳤다. 발생할 일을 깊이 생각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믿음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제사장이 행하는 봉사의 의미를 마음속에 새기었다. (393.2)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속죄제
 봉사자인 제사장은 경배자가 속하는 범주에 따라, 두 가지 방법 중 한 방법으로 속죄제의 피를 다루어야만 하였었다. 첫번째 예식에서는 성소와 뜰에서 네 단계의 일을 행하였다. 제사장은 피를 성소로 가지고 가서, 금 제단과 최내부(最內部) 휘장 중간에 서서 손가락을 피에 담그었다. 그러고 나서 제사장은 피를 손가락의 엄지 손가락으로 일곱 번 튕기었는데, 매번 마다 손가락을 피에 담가서 피가 휘장뿐만 아니라 휘장에 닿기 전에 바닥에 떨어지도록 하였다(레 4:5~7; Zebahim 5:1; Yoma 5:4; Menahoth 3:6). 제사장이 일곱 번 피를 튕기는 행위는 이 예식의 완전성과 철저성을 강조한다(사도행적, 585). (393.3)
 제사장은 금 제단의 앞쪽으로 가서 손가락을 피에 네 번 찍어, 네 뿔에 다 발랐다(레 4:7). 휘장과 제단에 이중으로 피를 바르는 봉사로 죄인은 속죄함을 받았다. 비록 참회자가 성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을 실제로 볼 수는 없었지만 참회자는 자신을 대신하여 행하는 제사장의 중재를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레 4:4~7, 16~18). (393.4)
 그리스도를 대표하였던 제사장
 제사장의 이러한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자신의 피로 봉사하는 일을 예견하였다(히 8:1~3; 4:14~16; 7:24~26; 9:12). 이 대속물의 생명의 상징의 효험이 성소에 “뿌려” 져서 그 거래를 완결짓고 속죄를 이루기 전에, 피가 성막 뜰에 먼저 “흘려져”야 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훌려진” 피는 그 자체만으로서는 충분치 않았다. 흘려진 피는 “뿌려진 피”가 되어야 하였다. 이 사실은 구세주의 봉사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393.5)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지만,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 하늘에로의 승천, 하늘 성소의 중재가 없다면 우리 모두는 가장 비참하게 될 것이다(고전 11:14~19). (394.1)
 제사장은 뜰로 다시 나와서 남은 피를 번제단의 봉사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그 아래에 붓는다(레 4:7, 18, 25, 30, 34). 솔로몬의 성전과 예수님 당시에 피는 제단 밑의 암석에 뚫려 있는 “두 작은 콧구멍 같은 구멍”을 통하여 흘러갔다(Middoth 3:2; Yoma 5:6; 비교 시대의 소망, 449). 그 피는 기드론 계곡으로, 결국에는 사해로 흘러갔다(레 4:30). 이 비유는 “허물과 죄로 죽어”(엡 2:1) 잃어버린 인류라는 망망대해에 흘러들어가는 그리스도의 능력의 피에 대한 예증이다(계 17:15; 비교 겔 47:1~12, 특히 8절). (3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