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30. 화목제 (나의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의 것임)
 경건한 부부였던 한나와 엘가나는 대제사장 엘리와 함께 살면서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께 봉사하는 사무엘을 가진 특권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고자 화목제를 매해 드렸다(삼상 1:21, 24, 25; 2:18, 19). 그들이 드린 제물은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그들이 기도하여 얻은 아들이 만사 평탄할 것이라고 신뢰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그들은 화목제를 드리면서 사무엘을 하늘을 위한 봉사에 재헌신함으로써 자신들의 서약을 확증하였다. (388.2)
 다윗은 나단으로부터 밧세바와 자신의 정분 관계와 그 남편 우리아 살인에 대하여 책망을 받은 후에 자신의 가증스러운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였고, 참회하며 속죄제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가 넘쳐 흐르는 마음으로 회개한 군주는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하늘의 용서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였고,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것을 알리고(시 1:17), 진정한 회개의 삶을 이제부터는 살아가겠다는 서약을 하였다. (388.3)
 서약과 연관된 화목제
 화목제를 바친 세번째 이유는 서약을 이행하였다는 것을 표하고자 함이었다(레 7:16; 시 56:12, 76:11, 116:14; 사 19:21). 여호와께서는 서약 이행을 축하하는 곳은 집이 아니라 성소가 되어야 하며, 전 가족이 화목제를 드리는 데 참여하여 여호와 앞에서 기뻐해야 한다고 명령하시었다(신 12:17~19). (388.4)
 랍비들은 서원(vow)과 맹세(oath)를 구별하려고 시도하였다. 랍비들의 말에 의하면 서원은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자 하는 결심이고(레 7:16~18), 맹세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자 어떤 목적을 수행하고자 하는 결심이라고 한다(레 27:1~34를 보라). 하지만 그 대의가 무엇이든간에 여호와께서는 너무나 열광적인 백성들에게 서약을 행하는 데 실패하느니 차라리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경고하셨다(민 30:2). 사실, 성경은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자를 칭송하였다(시 15:4).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열렬하였기에 자신들의 소유를 판 돈을 다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좀 지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 본 다음에 약속을 어기기로 작정하였다(행 5:1~11; 비교 Nedarim 1:1, n. 1). 그 결과 무서운 일이 일어났다. 나실인은 특정 기간에 포도주를 마시거나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서원을 하였다. 나실인의 임무를 마칠 때에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의 도움으로 잘 마쳤음을 표하고 축하하였다(민 6:13~18). 바울은 잠깐 동안의 나실인 서원이 차는 날짜에 그러한 제사를 드리자는 것에 납득하였다(행 21:23~27). 이것과 밀접하게 연관 있는 점은 어떤 사업상의 거래이든지 양방간에 맺은 협정 혹은 계약을 굳게 하고자 제물을 드리는 일이었다. (388.5)
 이러한 예식을 통하여 호렙산에서의 첫번째 언약이 비준되었다(출 24:5).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를 모든 사업 관계에 있어서 중추로서 삼아야만 하겠다. (389.1)
 야곱은 여호와께서 그의 삶에 주신 많은 자비로 인하여 충성을 서원하였고, 신실하게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약속하였다(창 28:20~22). 도망자 요나는 고래 배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선교 계획을 행하겠다는 약속의 표로 화목제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하였다(욘 2:7~9). (389.2)
 솔로몬은 성전 봉헌식이 마쳐갈 때에 많은 화목제를 드려 수많은 경배자들이 민족적인 꿈이 성취된 것을 축하하도록 하였다. 환호하는 백성은 자신들을 하늘에 성별하겠다는 서약을 하였고(왕상 8:63; 대하 7:4, 5, 7), 배설한 언약의 잔치로 그 서약을 확증하였다. (389.3)
 언약을 비준한 화목제
 성경에서 여러 희생 제물의 죽음이 수반된 첫째 언약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간에 맺어졌다(창 15:9~18). 화목제와 언약의 구속력을 세우기 위하여 행한 거룩한 축제가 제일 먼저 나오는 곳(창 31:54)은 야곱과 라반의 이야기에 나온다. 양자가 정중한 관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도망자 야곱이 20년 전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한 바로 그 장소에 두 가족간의 경계선 표시로서 돌 무더기를 쌓았다(창 31:49~55). 이제 쌍방은 서로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약속하였고, 야곱은 화목 제물을 잡아 여호와께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의 증인이 되시고, 그 계약을 공인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뒤 이어 벌어진 연회는 “소금의 언약”으로서 이 협정을 확증하였고, 다음날 친척으로 이루어진 두 무리는 친선 관계를 이룬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간의 조화가 화목제를 통하여 확증되었다. (389.4)
 사무엘은 사울에게 백성이 충성 서약을 하도록 화목제를 준비하였다(삼상 9:12). 왕이 될 객은 “수석(首席)”에 앉았고(삼상 9:22), 그에게는 최상의 부분이 주어졌다(삼상 9:23, 24). 다윗이 보좌에 임명될 때에도 비슷한 연회가 행하여졌다(삼상 16:2~5). 이 경우들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에서부터 나오는 평화에 대한 감사, 하나님께 표현한 왕과 하나님의 이름이 백성들의 삶의 중재자(Arbiter)로서 기원되었다. (389.5)
 아삼은 메시야가 재림시에 성도들을 모아 행복에 넘치는 축하단을 구성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아삽이 이렇게 예고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성도들이 메시야의 죽음을 예견하였던 화목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의 관계에 오래 전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시 50:5).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삼의 말이 뜻하는 바는 명료하다. 갈바리의 희생만이 하늘과의 새 언약을 비준할 수 있다. 이 진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만찬 예식을 행할 때마다 되풀이 된다. (389.6)
 우리의 화목제인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로 돌아가시면서(엡 2:14) 자신의 평화를 교회에 유산으로 남기셨다(요 14:27). 그리스도께서는 겟세마네의 그늘 아래 서 계시면서 시편 기자가 순종하는 이들에게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시 119:165)고 예언한 내용을 성취하였다. (389.7)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롬 5:1)있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이것은 비록 “전에 ∙∙∙ 멀리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지만 예수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된 사람들의 행복한 숙명이 될 수도 있다(골 1:21, 22; 고후 5:18). (390.1)
 우리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성만찬 상에 앉아 언약의 식사에서 그분의 살과 피의 귀중한 선물에 상징으로서 참여한다. 갈바리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임을 기뻐하며, 이 지상에서 그분 앞에서 축제로 즐거워하고(신 12:12, 18),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실 것을 기다린다(눅 14:15; 마 22:2~10). (390.2)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평강이 있을 지어다!”는 인사는 주님의 죽음이 실제로 영원한 은혜의 언약을 비준하였다는 사실과 주님의 부활이 믿는 모든 이로 성취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탄생할 때에 천사들이 “땅에는 평화로다!”라고 약속한 내용을 갈바리에서 드리신 자기 몸의 화목제를 통하여 이루시었다. 그리고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산 언약의 백성들에게 승리가운데서 돌아오실 때에는 “평강의 왕”으로서 돌아오실 것이다. (390.3)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는 아버지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평화와 성취의 강이 흘러들어왔다. 새 언약의 원칙에 온전하게 순종할 때에만 온전한 평화와 “네가 나의 명령을 ∙∙∙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겠고”(사 48:18)라는 약속의 성취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의 속죄제이신 그리스도를 명상할 때에 그분이 속죄하여 준다는 보증은 지속적인 감사로 우리 마음을 유지하여 주고, 감동시켜 준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그분이 준비하신 감사 연회에서 우리의 화목 제물이신 예수님을 먹고 살아갈 때에 예수님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기쁨과 만족에 참여한다.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우리에게 평화(Peace)이신 예수님을 주시 옵소서. (3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