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30. 화목제 (나의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의 것임)
 제물드리는 자로부터 자신의 몫을 받는 제사장
 제사장에게 주어진 특정한 부분은 “가슴”“우편 어깨(뒷다리)” 였다(레 7:30~34). “가슴”은 어머니가 주는 위안과 영양을 상기시켜 주고, “뒷다리 [어깨]”는 아버지의 힘과 부양을 뜻한다. 기뻐하는 목자는 위험에서 구출함을 받은 양을 들어, 실상 “여호와께서 ∙∙∙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신 33:12)고 말함으로,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가슴]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아 8:6)는 기도를 응답하여 주신다. 이것들은 사랑과 능력의 상징이다. (385.4)
 여호와께서는 제단 위에 놓아 둔 자기 몫의 화목제를 완전히 증발시킴으로써 경배자에 대한 만족을 보여 주셨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올라가는 연기를 “향기로운 냄새”(레 3:5, 16)로 여기었고, 주인으로서 연회에 나온 자기 몫을 이런 방법으로 잡수셨다. (385.5)
 소제와 전제를 요구하는 화목제
 화목제에는 적합한 소제와 전제가 항상 수반되어야 하였다(레 7:11~14). 이 무교병, 무교전병, 혹은 기름으로 튀긴 반죽 조각들을 세 다른 측, 즉 제단 위의 하나님, 제사장과 그 가족, 환호)하는 백성들이 먹었다. 연회를 끝맺는 순서이었던 떡과 포도즙을 희생 제물의 종류에 따라 정확한 비율로 드렸어야만 한다(민 15:3~12). 만일 경배자들이 선택하면, 어떤 종류의 화목제에는 “유교병”을 가져올 수조차 있었다(레 7:11). 하지만 이 유교병의 어떤 부분도 제단 위에 올려 놓아서는 안 되었다. (385.6)
 반복해서 말하지만 포도즙은 결코 마시지 않았다. 그것은 항상 제단에 부었다. (386.1)
 소제의 일부분은 여호와께 “요제”로서 바쳤고, 이 바친 것에서 “표”로서 조금을 떼어 제단에 놓아 불에 살랐다. 제사장은 이런 다음에 “요제”의 나머지 부분을 자기 소득으로 취하였다. 비록 희생의 더 큰 부분을 경배자가 취하였지만, 그 희생 전체는 하나님께 맨 먼저 드려진 것이었다. 맨 먼저 드림으로 하나님께 맨 먼저 봉사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러고 나서 자신의 몫을 봉사하는 제사장과 숭배하는 백성들에게 다시 돌려 주셨다. 예수께서는 다락방에서 이 원칙을 따르셨다. 그분은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우리 인간의 희생으로서 드리셨고, 그 다음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아들을 주셨다. 예수께서는 그 다음에 제자들에게 자기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초청하셨다(요 6:48~58). (386.2)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축제에서 가져 온 자기 몫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요리하였다. 하지만 “거룩한 장소”에서 해야 하였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 요구 조건은 원래 성막 뜰을 의미하였으나, 후에 랍비들에 의하여 거룩한 도성의 성벽 안의 어느 곳이든지라고 해석되었다. 축하자가 대개 가족과 친구들을 칭하였듯이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와 눈먼 자와 절름발이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고 권면하셨다(신 12:18; 16:11; 눅 14:12~14). 모세도 오래 전에 레위인을 배제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하여간 제사장과 그 가족은 자신들의 몫을 요리하여(레 10:14, 15) 봉사의 기쁨 가운데서 잔치를 벌였다(레 7:31, 34; 비교 민 18:9~19). (386.3)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결하”여야 했던 참가자들
 참가자들은 예식적으로 “정결”하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끊어질” 위험에 처하였다(레 22:3~7; 7:19, 21). 이 예식적으로 정결한 상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할 신부의 의를 예견하는데, 그 때 신부는 신랑의 품성의 “혼인 예복”을 입는다. 정결하신 하나님과 정결하신 제사장과 그 가족들이 화목제를 드린 정결한 사람과 함께 같이 앉아서, 하늘과 지상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기에 기뻐하며, 화목제의 의미가 온화함과 사랑으로 타오르는 이 연회를 마음속에 그려보라. 참가자들은 대속자 희생의 죽음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계속하여 그 와중에 기억하여야만 하였다.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당신의 은혜를 내려 주시어 우리로 항상 모든 축복이 갈바리에서 홀러나온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386.4)
 율법은 경배자들의 삶에서 세 경우에 화목제를 드리라고 권면하였다(레 7:11~21).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고, 그분의 사랑스러운 품성을 칭송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에 영화를 돌릴 때이고, 두번째 경우는 여호와께서 경배자와 그 가족에게 내려 주신 특별한 축복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자 할 때이고, 세번째는 여호와의 명예를 걸고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이행한 것을 축하하고자 또는 여호와의 이름에 주의를 집중시킬 어떤 일을 행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한 것을 축하하는 것이었다. 이것들에 대한 설명을 하나씩 검토하여 보자. (386.5)
 찬양을 표현한 화목제
 찬양과 경배를 표현하는 화목 제물은 드려진 당일에 먹어야만 하였고(레 7:12, 13, 15; 22:29; 시 119:108), 이것은 참가자들의 간절함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었다. 찬양은 항상 새로워야만 하였다. 이 감사 연회는 경배자들이 벗들과 하나님에 대하여 느끼는 바를 나눌 수 있는 모임이 되었고(시 50:7~15), 또 “구원의 잔”을 마시면서 그들이 숭배하는 창조자에게(시 51:17; 54:6; 56:12) “감사제를 드”렸다(시 116:12~19). (387.1)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감사하여, 또 자신들이 느끼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고자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호소하였다(히 13:12~15). 하지만 이 예식들도 폭식과 과시로 전락하였다(암 4:4, 5; 5:22, 난외주). 이스라엘의 사막에서 방황하던 중에 배은 망덕하였던 것을 기억하며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시 107:21, 22). (387.2)
 감사를 표현한 화목제
 이 찬양 제물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받은 특별한 은전(恩典)—특히 죄를 용서받은 경우—을 인하여 감사를 표현하는 화목제이다(레 7:11~19; 9:4; 시 116:17~19; 대하 29:31).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라고 북돋아 주기 위하여 그들이 약속된 땅에서 화목제를 확실히 드릴것을 약속하시었다(출 3:16~22; 5:3). 그 날에 전 민족이 “그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압제로부터의 해방과 그 기쁨을 경축할 것이다. (387.3)
 신약성경이 샬롬이 미친 영향은 상응어인 희랍어 단어 에이레네(eirene)가 사용된 용례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의 결과(사 53:5)인 메시야의 평화의 축복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는 역설적인 예고의 성취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분께서 고난을 당하고 돌아가시었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들은 인생의 모든 축복을 누린다. “평화(평안)의 복음”(사 52:7; 엡 6:15, 19, 20)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예수의 죽음으로 산 바 되었고,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면서 그 마음에 “안식”이 있게 한다. 이제 하나님과 인류 사이에는 속죄로 인하여 새로운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롬 5:19, 10), 그 결과로 외적인 요인에 영향을 입지 않는 든든한 안녕이 있다. 바울은 이 점을 알았기에 자신이 편지를 써 보내는 모든 교회들에게 하늘의 평화가 임하기를 기원하였다(엡 6:23; 등등). (387.4)
 여호와께서는 고대의 자기 백성들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과 평화”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화목제를 고안하셨다(빌 4:7; 골 3:15). 하늘과 의식적인 화해를 하면 이러한 기쁨을 갖게 된다. 여호와께서는 어떤 제물도 그러한 축하에서는 받으신다. 경배자들이 진실되고 열렬하기만 하면 심지어는 흠이 있는 것 조차도 받으시고(레 22:21~23), 또 누룩이 든 것도 받으신다(레 7:12, 13). (387.5)
 역사상 화목제를 드렸던 경우
 야곱과 그의 납치되었던 아들의 오랜 이별은 환희의 절정을 이루면서 끝을 맺었다. 야곱이 짐을 실은 나귀들의 행렬을 보았을 때 요셉이 늙으신 아버지를 고센 땅에서 말년을 보내도록 모시고 올 수레를 직접 보낸 애굽의 총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 때 이 덕망 있던 부조는 이 경우를 당하여 화목 제물을 잡음으로써 자기 가족을 재연합하도록 한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섭리를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표현하였다(창 46:1). (38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