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30. 화목제 (나의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의 것임)
 화목제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즐거운 축제 중의 한 축제이었다. 각 개인, 가족, 지파는 언제든지 화목제를 바칠 수 있었다. 이 예식을 종결짓는 거룩한 식사는 경배자들의 주인이시고 또 경배자의 손님이신 하나님과의 친교를 두드러지게 강조하였다. 화목제가 희생 제사 주기상에 있어서 속죄제와 번제에 뒤이었기에 화목제의 히브리어 명칭, 즉 풍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샬롬(shalom)에서 파생된 쉘렘(shelem)은 실현을 뜻한다. 온전성(wholeness)과 배상(restitution)을 의미하는 샬롬은 적과 화친하는 것(수 11:19), 동맹국 간의 화합(호 9:15, 10:1, 4), 하나님과의 언약을 굳게 하는 것(민 25:12; 사 54:10)을 표현한다. 이 셈족어 어근에서 파생된 이슬람이란 명칭도 하늘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알라를 믿는 이슬람교도(a Moslem)는 언제든지 또 어떤 상황에서든지 “만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 ”을 선언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이 동사는 맹세를 지키는 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사용되었다(시 50:14; 56:12; 76:11; 116:14; 사 19:21; 욘 2:9; 나 1:15). 이러한 기본 지식을 가지고 화목제를 차근차근 살펴보자. (382.1)
 화목제는 기쁨을 표현하고자 하나님께 드려졌고, 시편 기자는 “즐거운 제사”(시 27:6; 혹은 “기쁨의 희생”)라고 간단하게 칭하였다. 이 화목제는 해결된 곤란함, 실행한 서약, 완결지은 사업상 거래 뿐만 아니라 믿음과 복종을 통하여 하늘과 화합하는 것을 축하하고자 드렸다(신 20:12, 13; 왕상 22:44). 히브리어로 화목제인 쉘렘은 단수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고, 복수형으로 열렬함을 뜻하면서 축제에 가득 차 있는 열렬한 환호에 초점을 맞춘다. 복수형은 또 정신적, 신체적, 가족적, 사회적, 그리고 무엇 보다도 영적인 평화를 뜻한다. (382.2)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네 번이나 이 기쁨의 희생 제사법을 “영원한 규레”로서 여겨야 한다고 상기시켜 주었다(레 3:17; 23:14, 21, 31).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선하심을 감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견실, 완전, 건강, 번영, 평안, 평화의 개념이 히브리어 샬롬과 화목제에 후광과 같이 둘러 있다. (382.3)
 언약의 식사인 화목제
 화목제는 하나님과 제사장, 그리고 경배자가 참여하는 친교 연회로 절정에 이르는 유일한 희생 제사(자바크<zabach>)이었다. (382.4)
 영어로 번역된 한 성경은 이 제사를 “공유하는 제사(shared offering)”(민 15:8, NEB)라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인간은 사실상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이 “천산의 생축”(시 50:10)의 소유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고대 백성들에게 그들의 모든 재산을 다 주신 후에 자신의 성소에 선물을 돌려주라고 명하시었고, 곧이어 신실한 자들에게는 기쁨의 축제로 되돌려 주시었다! 식사하는 이들은 이 희생의 일부분을 음미하면서 은혜를 베푸신 보이지 않는 이의 선하심을 시인하여야 하였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초청에 응하여 간절히 감사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제사는 사랑과 감사를 나타내 보일 기회이었고, 그 감사의 식사는 하나님의 가족간의 유대 관계를 굳게 하였다. 이 화목제는 봉헌 희생 제사로서 매시야 나라에서 바라는 축복을 가리킨다(시 51:17; 54:6; 116:17~19). (383.1)
 여호와께서는 식사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친교 연회의 신성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식사를 할 장소를 정하여 주셨다. 이 식사는 “거룩하”거나 “정결한” 장소에서 해야 한다. 성막 뜰은 그러한 거룩한 장소이었다(레 10:12). 하지만 축하자의 숫자가 너무 많아졌을 때에 다른 장소가 필요하였다.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진영이, 후에는 예루살렘 도성이 거룩한 곳으로 지정되었다. 참회자와 그 친구들은 희생의 일부분을 먹으면서 희생과 하나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 자신과 품성과 목적에서 하나가 되라고 초청하셨다. (383.2)
 모든 기쁨의 근거인 살육된 희생 제물
 “화목 제사”(zabach shelem)란 예전(禮典)적인 표현은 이 제사의 기본을 이루는 도살에 초점을 모은다. “화목 희생”이 더욱더 명료한 번역일 수 있다. 성경은 “희생”(zabach)이란 단어만을 거의 100번이나 화목제에 수반된 이 제의적 식사를 칭하는 데 사용하였다(“죽이다,” 신 12:15, 21; 등등). 이 단어는 제물이 당한 폭력적인 죽음에 초점을 맞추는데, 이 죽음만으로도 친교 식사에 참예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또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가리킨다. 진정한 평화나 친교는 십자가 처형없이 있을 수가 없었다. (383.3)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동안에 교육을 더 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음식을 위하여 사용되는 모든 동물을 성소에서 잡고, 그 피를 제단 위에 뿌리라고 권고하시었다(레 11:1~47; 17:1~16). 이 규칙은 사람들이 성막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살았었던 약속된 땅에서는 수정되었다(신 12:1~21).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이 살생을 위하여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시었다고 이해하였다(이 “명령”신 12:21에서 추론한 것이다; Hullim 1: 1, n. 7). 오늘날 조차도 모든 셈족 나라들은 식탁에 올려 놓기 위하여 동물이나 새를 잡을 때에 하나님의 이름에 기원한다. 이 규칙들은 음식용으로 죽게 된 동물의 죽음이 죄로 인하여 야기되었다는 개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갖고 있게 하고, 제물이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그 생명을 바쳤다는 것, 그리함으로써 여호와의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383.4)
 죄가 없었더라면 사망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제사는 구주께서 성례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을 “먹기”를 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기”“음료”를 주라고 하는 아버지의 명령에 응하여 주실 것을 예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떡덩이 마다 갈바리의 십자가의 인이 찍혀 있다”(시대의 소망, 660)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384.1)
 “희생”(zabach)이란 용어는 또 피의 언약이란 개념을 떠올린다. 성경시대에는 참가자들이 “언약의 소금”이 넣어진 희생 제물의 살을 공동으로 식사함으로써 유기체에 융합되어 갔다(창 15:9~18; 비교 렘 34:18, 19; 시 50:5).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연합시키고, 서로 연합되도록 고안한 성만찬 예식에서 이 개념들을 체현하셨다. 이 새 언약의 축제는 전 시대에 걸쳐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들이 그분의 “몸”의 지체로서 함께 연관되어 있다는 사상을 새겨 주었다. 성육하신 말씀의 “살”“피”는 그분의 온전한 순종의 삶과 그분이 이 땅에 있을 때에 보여 주신 아버지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을 나타낸다(히 10:5~10). 구세주의 품성의 이러한 특성들은 영감받은 말씀에 나타내졌다(요 6:63). 우리는 영감받은 말씀의 교훈을 읽고, 믿고, 실천하면서 받아들인다. 그리함으로써 은혜 안에서 우리 주님을 닮아 자라난다. (384.2)
 정결한 동물은 어떤 것이든지 드릴 수 있음
 이스라엘 백성은 허용된 여러 피조물들 가운데 희생 제물로 어떤 것이든지 택할 수 있었고(레 3:1, 6, 12), 원할때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성소의 뜰에 가져오면 제사장은 제물을 주의 깊게 검사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사장은 경배자와 함께 도살 장소로 가서, 짐승을 묶고, 내 던졌다. 번제와 속죄제에서는 이 시점에 참회자가 손을 대속물의 머리에 얹은채 죄를 자백하였다. 하지만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화목제에서 예식 참가자가 제물의 목을 깊숙이 베기 전에 자기가 받은 주부을 일일이 열거하였다고 회고하였다. (384.3)
 제사장은 피를 그릇에 담아 성막 뜰로 가지고 가, 제단의 사면에 뿌렸다(레 3:2, 8, 13). 제사장은 반대 방향인 북동 방향과 남서 방향으로 몸짓을 하면서 피를 뿌렸다. 이 “뿌린 피”가 속죄를 이루었다. 탈무드는 통찰력 있게 “피가 제단에 닿을 때마다 제물을 드린자가 속죄함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A. Edersheim, op. cit., 117에 인용됨). 이 한 쌍의 피의 선물은 하나님께 드리었고, 제단 위에서 타고 있는 거룩한 불길에 의하여 가납된 대리물의 “생명”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은 제단의 아랫부분에 나머지 피를 부었다. 이 제사는 이 행위로 다시 “갈바리는 모든 속죄의 토대에 놓여 있다”고 선언하였다. (384.4)
 제사를 드린 사람은 시체의 가죽을 벗기고 “적절하게 나누었”는데, 제사장이 그 가죽과 “가슴”을 소득으로 가져 가도록 하였다(레 7:7, 11, 30~34; 비교 삼상 2:12~17에는 이 규정을 남용한 사건이 나온다). 원래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여겨진 가슴(레 7:2~5)은 제사장이 제단 앞에서 그 가슴을 “흔들음으로”써, 하나님께 드려졌다(민 18:8, 11, 19; 레 7:32). 그러고 나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봉사자가 그것을 “내리는” 동작을 행함으로써, 그 가슴 부분을 여호와를 나타내는 제사장에게 기부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레 7:30, 34). (384.5)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여, 그것이 수평적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그것을 옆으로 “흔든” 다음에, 자신의 몫으로 치워 놓았다(레 2:2, 9; 7:32, 33; 10:15; Menahoth 5:6). (385.1)
 제단에서 태운 여호와의 몫
 “내장”“기름” 혹은 지방, 그리고 양의 경우에는 기름진 꼬리(fat tail)도 놋대야에서 떠온 물로 씻고 소금을 쳤다. 간의 일부분인 “대망막(大網膜)”“두 신장”은 제사장에 의하여 여호와의 특별한 “음식” 혹은 “떡”으로서 드려졌다(레 3:11; 7:31; 21:6, 8, 21, 22; 22:25; 말 1:7, 12). 그 제물은 “여호와의 상”이라고 칭하여진 제단 위에 놓여져 이미 타고 있는 “번제물 위에서” 소멸되었다(레 3:5). 거룩한 불은 물론 하나님이 가납하시는 임재의 상징이었다.(왕상 18:24, 38; 레 9:24; 히 12:29). (385.2)
 이 “내장”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매우 가치 있게 여기신 희생 제물의 본질적이고 귀중한 부분을 나타내었고, 대리자 예수의 내적인 역동성과 측량할 수 없는 추진력을 가리킨다.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신장과 가슴”을 매우 가치 있는 보물로서 여기었다. 이 은밀한 부분이 제단에서 불살라져, 하늘의 요구를 만족시켜야만 예식을 마무리짓는 제의적인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모든 축복과 가치는 갈바리에서 완결된 희생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우리에게 감사의 선물을 주시옵소서. (3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