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의 요한계시록 연구 요한계시록 8:2~9:21 — 심판의 경고 나팔 1. 때때로 사랑은 고함을 지르게도 하고 매를 들게도 한다
 “철이야! 길 거리에서 나와! 지금 당장!” (226.1)
 어린아이가 복잡한 길 거리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 조용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걸음마를 겨우하는 어린 아기가 끓는 물 주전자를 뒤집으려는 찰라라면 보통 목소리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226.2)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조용히 타이르는 쪽을 더 좋아하신다. 예수님은 이 점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지상 생활의 대부분을 사방을 돌아다니시며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도와 주시는 것으로 보내셨다. 그러나 언젠가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성전 마당이 사나운 상인들과 협잡꾼들로 난장판이 된 것을 보시고는 채찍을 휘두르시며 “이것을 여기서 가져 가라”(요 2:13~17)고 소리치셨다.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흩어졌다. (226.3)
 하나님께서는 가을철마다 제사장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다가오는 대속죄일을 준비하도록 경고의 나팔을 불게 하셨다. 그런데 대속죄일은 해마다 한 번씩 맞는 심판일이기도 했다(맥스웰의 다니엘 연구 174~184참조). 요한계시록 8~11장에서는 하나님이 일곱 천사로 하여금 일곱 나팔을 불어 경고하게 하셔서 우리로 회개하고 우리의 길을 돌이키게 하고 계시다. (226.4)
 도입부로서 성소의 장면
 그러나 천사들이 일곱 번의 경고 나팔을 불기 전에 요한계시록 8장 2~5절은 도입부로서 성소의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226.5)
 우리는 이같은 개괄적인 성소 장면을 기대해 오지 않았는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이 소개되기 직전에 우리는 대제사장의 옷을 입으시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또 일곱 인을 떼시기 전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유월절 어린 양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 서 있는 모습도 보았다. 이때 한 천사가 금향단에서 향을 받들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촛대와 떡상과 금향단은 구약의 상징적인 성전의 첫째 칸 즉 성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226.6)
 요한은 말하기를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 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3~5). (226.7)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금향단 앞에 서서 우리의 기도와 함께 향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향을 드리고 있는 천사가 사실은 예수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맥스웰의 다니엘 연구 264~267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성경에서는 가끔 예수님이 천사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출애굽기 3장 1~6절, 창세기 48장 16절이 그런 경우다. 물론 예수님은 예사의 천사가 아니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천사가 전혀 아니시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천사라는 낱말은 “사자”(使者, 기별자, Messenger)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별의 궁극적인 담당자이시다. (226.8)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성경절에서 향단 곁에 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는 예수님 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226.9)
 이 천사는 오히려 요한계시록 14장 18절에서 소개되고 있는 제단과 불의 천사와 동일한 존재로 여겨진다. (227.1)
 요한계시록 5장 8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두르고 있는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성도들의 기도를 나타내는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8장에는 한 중요한 천사가 역시 우리들이 기도할 때 향을 올리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같이 중요한 하늘의 존재들이 우리들의 안녕에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크게 격려를 받는다. (227.2)
 “다른 천사가 와서 많은 향을 받았으니”
 틀림없이 이 향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다. 구약의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조그만한 금향단에서 향기로운 향을 올렸다. 어떤 경우든지 향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했다. 향은 예수님의 사랑스러움과 친절을 나타내며 특별히 십자가 상의 그의 희생을 상징한다. 이것은 그의 선하심 또는 그의 공로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온 우주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심이 전적으로 당연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향이 그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하기 위해 향을 올리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요 3: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 우리를 위해 살고 또한 죽게 하신 것이다. (227.3)
 성경이 우리가 궁금해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은 하늘이 우리의 기도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요한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한 천사가 금향단에서 향을 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227.4)
 그러나 요한은 그 천사가 그 일 말고 다른 일도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계 8:5). (227.5)
 그 불이 땅에 닿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 드러났다. “땅의 삼분의 일이 타서 사위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서 사위고 각종 푸른 풀도 타서 사위더라”(계 8:7). (227.6)
 이렇게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일변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금향단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와 관련이 있으면서 또 우리의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우리를 해롭게도 하시는가? “항상 살아서 저희(우리)를 위해 간구”(히 7:25)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 때로는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도 하시는가? (227.7)
 확실히 그렇다. 때로는 사랑이 고함도 지르고 벌을 내리기도 한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에 있는 완고한 죄인들에게 회개치 않으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다(계 2:16). 또 자기 만족에 빠진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하셨다. (227.8)
 「새 국제 번역 성경」(New Intermational Version)에서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내가 책망하고 단련시킨다. 그러니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로 번역되어 있다. 「현대 영어 번역 성경」(Today's English Version)에는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꾸짖고 벌준다. 그러므로 진실하며 너희 죄에서 돌이키라”고 번역되었다. 사랑은 때로 고함도 지르고 처벌도 한다. (2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