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03, 104편(269.1)
 손가락을 만드신 위대한 노바디 (Nobody)
 스탈린 시절에 그의 동상을 제작하던 조각가 부부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여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특별한 제간을 주신 것 정말 감사하지요?” 깜짝 놀란 남편이 목소리를 낮추며 대꾸했다. “무슨 큰일날 말을 하고 있소, 우린 그동안 하나님이 없다는 교육을 철저히 받지 않았소.”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이 엄지손가락 하나만 없어도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작품 활동을 할 수가 있겠어요, 우리가 이렇게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래도 그 ‘누군가’(somebody)가 이 손가락을 만든 것 아니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해요, 하늘에는 아무도 없다니까(There is nobody in heaven).” (269.2)
 “좋아요, 나는 최소한 내 엄지손가락을 만드신 그 위대한 하늘의 ‘노바디(nobody)’를 혼자서라도 마음속으로 찬송할 거예요.” 젓가락 숟가락을 잡고서 음식을 먹고, 손재주를 써서 이름을 내며 손을 움직여 돈을 벌어 살아가면서도 최소한 그 손가락을 만드신 하나님을 단 한 번도 찬송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염치없는 양심이 찔림을 받게 된다. (270.1)
 어리거나 젊은 사람이 장하고 기특한 일을 하면 칭찬((稱讚)을 하고 어른이 훌륭한 업적을 이루면 칭송(稱頭)을 한다. 세상을 창조하심으로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찬송(讚顔)하는 것이다.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바”(시편33편 1절), 지성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270.2)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해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자식을 낳으면 부모의 신분(身分)은 갖추지만 부모다운 속성(屬性)을 지니지 못하면 자식들의 진정한 존경을 받지는 못한다. 부모라는 신분 때문에 복종은 하지만 존경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은 부모다운 속성인 것이다. (270.3)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까닭은 창조주이신 신분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지니신 속성 때문인가? 시편 103편104편에서 우리는 그 여부를 확인하게 된다. (270.4)
 찬양해야 하는 까닭을 찾게 되는 것이다. (270.5)
 개인의 경험인 수직적인 찬양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로 시작하여 같은 말로 끝나는 103편104편은 모두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까닭을 시인의 경험과 역사를 통하여 증언하고 있다. 논리의 순서도 정연하게 103편은 먼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속성(nature)을, 104편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분(status)을 가장 아름답고 자상한 서정의 시어(詩語)로 읊고 있어 설명의 필요도 없이 읽는 이의 심금을 찬양으로 세차게 울려 주고 있다. (270.6)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개인의 수직적인 경험〉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개인의 깊은 경험〉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반복되고 깊어져야 하는 찬양〉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은혜에 기초한 찬양〉

   (103편 1, 2절). (271.1)
 그렇다. 찬양은 심령의 깊은 데서 의식된 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와 오장 육부가 모두 공명하게 되기까지는 완전한 찬양이 되지 못한다. 찬양은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인간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271.2)
하나님을 왜 찬양해야 하는가? 시편 103편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신 속사정을, 104편은 마땅히 찬양을 돌려야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신분(身分)을 서정의 시로 수놓고 있다.
(271.3)
 잊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것들인가? 그것들이 곧 이어서 열거된 찬양의 절실한 이유들인 것이다. (271.4)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죄를 용서하심〉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병을 고치심〉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파멸에서 건져 내심〉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명예를 회복시키심〉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소원을 이루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기억력을 회복시키심〉

   (103편 3~5절). (271.5)
 모두의 겸험인 수평적인 찬양

 이처럼 개개인에게 절실한 은혜를 넘치게 베푸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든 백성, 특별히 언약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베풀고 계신다. 이리하여 찬양은 나의 수직적인 경험에서 우리의 수평적인 경험으로 확산되는 것이다. (272.1)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공의를 집행하심〉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약자를 옹호하심〉

   ∙∙∙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자비를 베푸심〉

   노하기를 더 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완전한 용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자비로운 아버지의 연민〉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인간의 본질을 아심〉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심〉

   인생의 그 날이 풀과 같으며〈인간의 일생이 짧을을 아심〉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인생의 무상함을 아심〉

   ∙∙∙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 영원까지 이르며〈영원히 인자하심〉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영원히 의로우심〉

   곧 그 언약을 지키고〈찬양의 내용인 의, 의의 기초인 언약〉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영원히 언약을 지키심〉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우주를 통치하심〉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는도다〈확고하게 다스리심〉

   ∙∙∙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창조함을 받은 모든 대상들〉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창조함을 받고 보살핌을 받는 모든 피조물들의 본분인 찬양〉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개인의 경험이요 본분인 찬양〉

   (103편 6~22절). (272.2)
 실락원(失樂園)의 애수가 얽힌 찬양
 “찬양하다”(to praise)는 영어의 본 뜻은 “값을 매기다”(to appraise)는 뜻이다. 예배(worship)라는 말도 “값어치가 있음”(worth-ship)을 어원으로 하고 있다. 예배나 찬양은 할만한 가치가 있고 까닭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찬양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솔직한 평가(評價)인 것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그것이 예배의 내용인 찬양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103편에서 진정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worthy)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屬性)을 경험으로 증언한 시인은 104편에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worthy) 창조주의 신분(身分)을 삼라 만상(盛羅萬象)의 광활한 전시장에서 가장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치는 어휘와 문체로 공개하 고 있다. 그런데 그 배경은 비록 범죄 이후의 세상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내용이 창세기 1장의 창조주일의 순서와 일치하고 있어 그 의미 심장함을 한층 고조시키고 있다. 실락원(失樂園)의 애수(哀愁)가 얽힌 찬양을 이제야 부르는 것이다. (2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