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29. 소제와 전제 (나의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의 것임)
 생명을 바치는 것을 뜻한 전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이 포도 음료 예식을 언급하였다. 바울은 네로 앞에서 받은 두번째 판결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서쪽으로 기운 해에 사형 집행인의 검이 번쩍이고, 자기의 길을 가리키는 것을 느끼면서 바울은 사랑하는 이들에게 보낸 복음의 글에서 “관제(灌祭)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수도마이<pseudomai>, 딤후 4:6)라고 기록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중간태를 사용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행동에서 자발적으로 관제가 되어 부어졌다는 것을 그리고 있다. 구약성경의 동사(종종 호팔형이나 사역형)는 전제를 드리는 경배자들의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은 30여 년 동안 봉사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매일 바쳤고(빌 1:20~22; 고전 15:31; 롬 12:1), 그 불길은 그를 그을렸고, 위협하였다. 그는 난파 당하고 몽둥이로 맞고, 채찍에 맞고, 돌에 맞았고, 햇빛에 그을렸고, 바닷물에 적시었다. 그리고 갑자기 체포되는 바람에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겉옷마저 두로 섬에 놔두고 와서 이제 어둠컴컴한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떨고 있었다. (380.3)
 게다가 한산의 극치로서 그가 자신의 피를 전제로서 자신의 몸에 부어야 할 시간이 이제 왔다. 그의 확언은 검에 의하여 죽은 순교자의 죽음에 어울린다. 로마 시민인 그는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이미 예견하였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고대 예식을 기억하면서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기 자신의 전제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큰 제단 위에서 소멸되어가고 있는 희생 위에 포도즙을 따라 붓는 제사장을 볼 수 있었고, 그 습한 감방에서 자신의 피를 언제든지 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느꼈다. (380.4)
 그는 상당히 오랫동안 자기 인생을 종결지을 이 사건을 예견하였고, 빌립보의 벗들에게 자신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리었다. 바울은 빌립보의 벗들에게 그들의 삶의 희생적 증거 위에(호티<hoti>)자신의 피를 전제로 붓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빌 2:17). 그는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디모데에게 쓰면서 이 일이 실현되어질 시간이 가까웠음을 덧붙였다. 바울이 자신의 “떠남”(아나루시스<analousis>, 딤후 4:6)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단어는 정박되어 있던 배가 풀려나가는 모습을 뜻한다. (380.5)
 사도는 배의 측면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배가 마지막 항구에로의 항해를 하기를 원해 참지 못하여 닿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울은 이런 맥락에서 자신이 전제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것으로 또는 절정에 이르도록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골 1:24). (381.1)
 하나님의 전제
 하나님께서는 직접 전제라는 은유를 두번씩 사용하여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킨 방법을 세상보고 보라고 가리키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 창조를 계획하고 이행한 분의 체현인 “지혜”가 하나님의 영원한 보좌를 덮도록 전제로서 태초부터 “부어졌다”(나삭<nasak>)고 선언하시었다(잠 3:19; 8:1, 23, 개역성경은 “세웠다”로 번역하였음).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품성과 봉사의 정수(精粹)와,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창조적인 사랑을 하늘의 구석구석까지 돌보시는 통치로서 나타내었다. 하나의 모든 피조물들은 이것을 지켜보면서 “오래된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창조자로서 항구히 찬송한다(계 4:11). (381.2)
 예수님이 탄생하기 약 1,000년 전에 영감의 기록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백성, 통치자 헤롯, 로마 총독 빌라도와 그 군사들의 손에 겪을 적대 행위를 드러내었다(시 2:1~5; 비교 행 4:25~28). 이 적대 행위는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이를 것이었다. 하지만 이 외관상으로 보기에 비극인 사건은 승리에 찬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선지자는 기뻐하는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늘] 성소의 산”에 위치한 자신의 보좌 위에 자기 아들의 구속적 승리의 정수(精髓)를 전제로서 “붓는다”(시 2:6, 나삭<nasak>을 “세웠다” 로 번역함). 아버지께서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에 취임하실 때에 뭇 나라들을 유산으로 주었다(시 2:8). 이제부터는 속량함을 받은 일단의 무리가 “새 노래”(계 5:9, 12)를 부름으로써 예수님을 구속자로 찬미할 것이다. (381.3)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정부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의 구속적 특성(자질)의 전제로서 “적심”으로써 이 창조적 능력의 상징을 헤아릴 수 없을만큼 풍부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이 세상에게 창조자의 지혜와 기술은 희생 제물—제사장의 사랑과 희생이 더하여 짐에 따라 무한하게 귀중하게 되었음을 깨달으라고 호소하신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보좌 중간에 서 있는 피흘리는 어린 양을 보는 특권을 받았다(계 5:6, 완료 시제는 그 결과가 계속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 어린 양은 마치 자기 자신의 피를 쏟아 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른(히 10:5~10) 그분의 피의 전제는 보좌에 넘쳐 흘러 구속하는 은혜의 광휘를 더하였다. (381.4)
 우리의 마음은 감사하여 “주님, 나의 존재의 모든 것을 당신의 제단 위에 부어 선물로 바치겠나이다!”고 부르짖어야만 한다.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들은 소제와 전제를 바침으로써 이 결심을 선언하였다. (3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