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29. 소제와 전제 (나의 모든 소유는 그리스도의 것임)
 첫번째 방법은 “떡”이 요리하는 동안 부풀지 않도록 구멍을 뚫어 놓는다. 그것의 히브리어 명창인 찰라(challah), 즉 “찔림을 당한 떡”(pierced bread, 레 2:4)은 고통으로 흐느껴 운다. (374.5)
 예수께서는 해골이라 칭하는 곳에서 시련을 겪기 오래전에 “나의 ∙∙∙ 중심이 상함[구멍 뚫리다]이니이다”고 예언적으로 부르짖었다(동일한 단어가 레위기와 시편 109:22에도 사용되었다). 명민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제물을 예언자적인 믿음으로 쳐다보면서 수세기에 걸쳐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았다(슥 12:10; 비교 요 19:33~37; 시 22:16). (375.1)
 떡을 굽는 데 사용된 “화덕”“풀무”로 번역되기도 하였고(창 15:17; 사 31:9), 그리스도께서 견디셨던 모진 고통을 묘사한다. 다윗은 악인들의 운명에 관하여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시 21:9)고 썼다. 예수께서는 문자적으로 “—을 통하여 던지는 자”를 뜻하는 디아볼로스(diabolos)가 던진 불타오르는 창을 피하여 그 자신이 살아남았기 때문에(비교 엡 6:16; 벧전 4:12) 완전한 “찔림을 당한 떡”이 되셨다. (375.2)
 두번째 방법은 얇은 떡(wafer)을 조각으로 나누어, 기름을 섞고, 번철 위에서 굽는다(레 2:5, 난외주). “전병”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도리깨나 므나(셈족의 화폐 단위)를 뜻하고, 우리의 생명의 떡이신 분께서 겪으신 또 다른 고난들을 감동적으로 말하여 준다. (375.3)
 세번째 방법은 떡을 솥에 삶아 만드는 방법이다(레 2:7, 8). “삶다”는 말은 열로 끓어오르게 한다는 뜻이다(시 45:1 난외주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랍비 가말리엘은 “삶는 솥은 속이 깊고, 그 안에서 만든 음식에는 수축성이 있다. 반면에 굽는 솥은 납작하고 그 위에서 한 음식은 단단하다”고 기억하였다(Menahoth 5:8). (375.4)
 떡을 만드는 데 있어서의 불의 역할
 이런 요리 방법들 간의 차이점은 불이 반죽에 어떻게 다다르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화덕에서 전병은 열을 주위에서 받는다. 열은 번철을 지나 떡 속까지 스며든다. 삶는 솥의 경우에 뜨거운 기름은 민하(mincah)에 고루 미쳤다. 이 기술들이 하늘의 번제물이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결국 살라질 곳인 아버지의 번제단—상(altar—table)을 위하여 준비하면서 견디어낸 수많은 “혹독한 시련” 들을 묘사하였는가? (375.5)
 신선한 첫 열매는 불이 살짝 구웠고, 곡식은 “찧어 졌다”(레 2:14~16). 이 행동은 모든 죄인들을 치유하여 주는 채찍을 휘두르는 분(사 53:5, 난외주)께 깨어 있으라고 마련되었던가? (375.6)
 기름과 소금을 섞어 만든 이 떡은 유향이 더하여진 접시에 얹어서 가져와(레 2:13~16), 제사장에게 드렸다. 제사장은 제일 먼저 떡을 조각으로 나눈 다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자를 주목하시라고 요청하는 “기념물”로서 하늘을 향해 든다(시 20:1~3; 행 10:4). 그러고 나서 이 표(token)로 돌은 떡을 제단 위에서 이미 연기를 내고 있는 번제 위에다 놓고 태운다. 제사장은 민하의 나머지 부분은 자기 집으로 가져가 가정에서 사용하였다(레 2:3, 10; 7:9~11; 10:12, 13). (375.7)
 제물이 단지 “고운 가루”이면 봉사자는 한움큼을 집는다. 랍비들은 손에 그득하게 집지도 말고, 너무나 조금 집지도 말라고 경고하였다(Menahoth 1:2). 제사장은 소금과 유향을 가지고 그 제물을 “기념물”로서 불살랐고, 남은 가루는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제물이 전병이라도 떡과 같이 다루었다(레 2:9). 민하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향기로운 냄새”로서 여호와께까지 올라갔고, 여호와의 마음에 자신의 신실한 자녀들로 인하여 “안식”, 만족감, 또는 성취감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375.8)
 “가장 거룩한” 소제
 소제는 네 가지 “가장 거룩한 것들”에 속하기 때문에(다른 세 가지는 향, 진설병, 그리고 속죄제이었다), 집행하는 제사장과 그 가족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다. 이 장소는 원래 “성막의 뜰”을 뜻하였으나 후기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벽 안의 어떤 장소든지 괜찮다고 해석하였다(1BC, 739). 이 “먹음”은 제사장과 제물이 하나가 되는 것을 묘사하였고, 경배자들에게 메시야께서 제사장이자 소제로서 오실 그 날을 깨어 기다리게 하였다. 드리는 민하(mincahs)의 양은 제물을 드리는 자들이 가지고 오는 동물 희생의 유형에 따라 항상 결정되었다(민 15:1~16). (376.1)
 여호와께서는 소제를 매 번제와 매 화목제를 드릴 때에 같이 드리라고 명하셨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은 오직 흘린 피에 의거하여서만 가납될 수 있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만이 모든 시대에 인간이 행한 일에 가치를 더하실 수 있다. 오늘날에 조차도 “종교 예식, 기도, 찬양, 참회하는 죄의 고백이 진실된 산자로부터 하늘 성소에로 향으로서 올라간다. 하지만 부패한 인류를 통과할 때에 너무나 더럽혀져서, 피로 정결케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께 가치가 있는 것이 결코 될 수 없었다. 그 향은 흠없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 간구자께서 자기 의로서 임재하시고 정결케 하지 않으시면 그 향은 하나님께 가납될 수 없다. 지상 성막에서 피어 올리는 모든 향은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핏방울로 적셔져야만 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자기 자신의, 지상의 어떠한 더러움의 얼룩도 묻어 있지 않는 공로의 향로를 들고 계신다. 그분은 이 향로에 자기 백성의 기도와 찬양, 그리고 자백을 담으시고, 여기에 자신의 흠없은 의를 놓으신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의 화목 제물(propitiation)의 공로의 향기가 나는 이 향은 하나님께 완전하게 또 전부 가납될 수 있는 것으로서 올리워진다. 그런 다음에 은혜로운 대답이 주어질 것이다. 순종과 참회와 찬양과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타오르는 의의 불 위에 놓아야만 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노라. 이 의의 향기는 속죄소 주변을 두르고 있는 구름과 같이 올라간다”(6BC, 1078). (376.2)
 소제는

 (1) 무교절의 둘째 날에 흔들어서 바친 곡식단으로서

 (2) 오순절에 누룩을 넣고 구운 두개의 떡으로서,

 (3) 매일 조석으로 드리는 소제로서,

 (4) 시기(猜忌)에 대한 제물로서,

 (5)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는 것으로서,

 (6) 한줌의 가루로 드리는 소제 속죄제로서,

 (7) 진설병으로서,

 (8) 유월절 떡으로서 바쳐졌다. (376.3)
 모든 소제의 근간인 피 - 희생
 민하가 유혈 제물에 기초하여서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규칙의 중요성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예증하여 준다. 가인은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무시한채 자신이 경작하여 거둔 농산물들을 드렸지만 아벨은 이 번제물(<gam>, 창 4:4)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제”(아벨의 민하는 두 번이나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를 드렸다. 여호와께서는 동일한 단어를 가인의 제사를 언급할 때 하였던 것처럼 아벨의 소제물를 언급할 때 두 번 사용하시었다. (376.4)
 몇몇 성경 학도들이 민하를 따로 구별하여 언급된 아벨의 동물 희생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는 근거 없는 것이다. “만일 소제물을 어린양 없이 가져오면 거기에는 그 제물을 허용하도록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Menahoth 4:3)는 랍비들의 경고는 이 고대 이야기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고, 레위기의 예식법에 완전히 일치하는 말이다. (377.1)
 “아벨은 양떼 중에서 처음 난 것을 바치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잠시간의 축복[자신의 민하로 인정되어진]을 주시는 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한 동물의 피가 예표하는] 구세주를 주는 분이시라는 것을 시인하였다. 아벨의 선물은 그가 드릴 수 있는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구체적으로 요구하신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땅의 소산물만을 가져왔고, 그의 제물은 여호와께 가납되지 않았다. 그 제물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지 않았다. 우리들의 모든 제물들은 속죄의 피가 뿌려져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신 소유물로서 주님께 우리 자신들의 개인적인 삶을 드려야만 한다”(1BC, 1086). (377.2)
 수단의 헌신을 알리는 소제
 희생 제물은 헌신한 경배자가 자신을 제단에 완전히 올려 놓는 것을 나타내었고, 인간의 대속자인 예수를 가리켰고, 민하는 인간의 노력을 수확한 것과 인간의 인격 안에서 개발되어진 “성령의 열매들”을 묘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정죄하심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의 대속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제단 위에 스스로를 올려 놓을 때까지 그 물질적인 제물들을 받으시지 않을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3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