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
 “열린”이라는 표현은 고전적인 신학의 영원한 초월적인 하나님이 시간적인 세계의 제한과 위험들에 열려 있어야 함을 이 견해가 표방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자유의지 유신론”으로도 일컬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는 화이트헤드가 미국 개신교에 끼친 영향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전되었다. 존 B.캅 주니어(1925년~) 같은 자유주의 개신교 신학자들 뿐 아니라 클라크 피노크(1937년~) 같은 보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는 고전적인 신학의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틀을 대체하기 위해 화이트헤드의 이해를 이용한다. 따라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재해석과 순응을 거친 후에야 신학 속으로 융합된다. 이 열린 견해에 대한 더 보수적인 지지자들은 화이트헤드 체계의 어떤 측면들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다. 즉 하나님이 절대적인 창조주가 아니라는 개념 그리고 하나님이 세계속에서 행동하는 방식은 설득적인 양태에 제한되어 강압적인 개입을 위한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개념 등을 비판했다(Hasker 139, 140). 이런 비평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는 하나님의 양극적인 본질의 수정된 설명을 암묵적으로 취했다. 하나님은 무시간적인 동시에 시간적이다. 고전적인 유신론의 무시간적인 하나님과 달리, “자유의지 유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 순서 안에서 그분의 피조물과 더불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열린 견해는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성경적 견해가 아니라 화이트헤드의 견해를 채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지식을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에 제한시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는 인간 존재의 자유로운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를 위한 여지를 두지 않는다(Pinnock 124; Hasker 187). 이런 신념은 성경의 예언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게다가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장기적인 안목의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우리를 이끌수 없다(Basinger 163). (182.2)
 F.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재림교회는 신론과 삼위일체론의 조직적인 발전과는 동떨어진 교리적 및 신학적 진술들에 자신들을국한시켜 왔다 이런 신학적 진술들의 대부분은 기독론, 속죄, 구속 등에 관한 연구의 맥락 안에서 나왔다. 사실, 재림교인들이 신학을 수행할 때 성경을 정보의 유일한 원천으로 강조함으로 하나님에 관한 신학적 사상이 새롭고 혁명적인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재림교인들은 전통적인 신학적 주장들을 체계적으로 비평하면서 오직 성경의 기반 위에 교리들을 세우기로 맘을 굳혔다. 재림교회에 신론에 관한 진술들이 별로 없는 이유는 이런 새로운 접근방식에 내포된 난제들 때문이다. 재림교회에서 삼위일체론에 관해 발전되어 온 신학적 진술들은 주로 세 부류이다. 그 세가지는 시간 안에서의 종속론과 관련된 진술들, 삼위일체론에 관한 고전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진술들, 삼위일체를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개념으로 지지하는 진술들이다. 이런 분류들을 기술한 다음, 현대의 추세를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183.1)
 1. 시간 안에서의(한시적인) 종속론
 일찍이 1854년에 J. M. 스티븐슨은 속죄에 관해 쓰면서 종속론을 분명하게 지지하는 주장을 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일시적으로 발생되었다, 즉 아버지로 말미암아 태어났다는 것이다(Stephenson 126). 그리스도는 태어났기에, 신적이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위의 책, 128). 유사한 견해를 지지한 재림교회 선구자는 제임스 화잇(1821-1881년), 조셉 베이츠(1792-1872년), 유라이어 스미쓰(1831-1903년), J. H. 왜거너(1820-1889년), E. J. 왜거너(1855-1944년), W.W.프레스코트(1855-1944년) 등이었다. 그러나 E. J. 왜거너와 유라이아 스미쓰는 그런 견해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골 2:9)이신 예수의 온전한 신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에 손상을 주는 것도 아니라고 여겼으므로(E. J. Waggoner 44; Smith 17) 그런 빗나간 가르침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는 없다. (183.2)
 2. 고전적인 삼위일체론을 거부함
 몇몇 재림교회 저자들이 신론에 대한 고전적인 신학적 해석을 배격했다고 그것이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의 계시를 완전히 거부했다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런 해석을 거부했지 삼위일체에 관한 사실들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삼위일체”(trinity)라는 단어가 성경적 용어가 아니라거나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님이 주신 인식과 이성에 맞지 않다는 매우 약한 논리에 근거하여 고전적인 교리를 거부했다. 때때로 삼위일체 교리가 성령이 비인격적인 영향력이 아니라 위격이라고 가르친다는 잘못된 논리로 그 교리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관한 고전적인 가르침을 거부하기 위해 좀 더 심각한 신학적인 이유를 제시했다. 몇몇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고전적인 해석이 성경에 제시된 경륜적 삼위일체와 양립할수 없다고 이해했다(Frisblie, in RH Mar. 12, 1857). 다른 이들은 그런 해석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삼위의 역사적 행동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속죄의 신적인 실재에 관한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화잇은, 고전적인 삼위일체론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단일성에 강조점을 둔 것은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에 있는 구별성에 관한 명료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Day—Star, Jan, 24, 1846). 한편 러프버러는 하나님이 삼위가 아니라 한 위격으로 되어 있다고까지 말함으로(RH Nov. 5, 1861)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한 위격임을 내비쳤다(Canright, in RH June 18 1876; Bates 204, 205). 그리스도와 영원하신 하나님을 동일한 분으로 여김으로써(J. White, in RH June 6,1871) 역사적 예수의 신적인 위치(J. White, in RH Nov. 29,1877)와 속죄의 위상(Stephenson 151; Hull, in RH Nov. 10 and Nov. 17,1859; J. H. Waggoner 174)을 격하시킨 것으로 본 것은 위격들에 대한 이런 혼동을 올바로 평가한 것이다. 그러나 초기 재림교인들은 성경적 사실들과 헬라의 철학적 개념들에 영향을 받은 고전적인 해석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재림교회 역사의 초기 수십 년 동안 반(反)삼위일체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183.3)
 3. 성경적 삼위일체를 확정함
 초기에 개진된 시간 안에서의 종속론, 성령을 비인격적으로 생각하는 경향(Smith 10), 고전적인 삼위일체론에 대한 강한 비판적 입장 등에도 불구하고, 재림교회 사상가들은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이 하늘 아버지의 위격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격들인 역사적 예수와 성령도 포함한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믿었다. 1888년에는 E. J. 왜거너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말하는 진리를 특별히 강조했다. 1892년에 퍼시픽 프레스가 삼위일체에 관한 새뮤얼 T. 스피어의 기사를 재출판하면서 삼위일체 교리가 명시적으로 제시되었다. 스피어가 재림교인이 아니었으므로 그의 기사에서 전통적인 단일신론을 강조한 점이나 아들의 위격과 관련하여 존재론적인 종속론의 잔여물이 발견된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점차 구체적으로 재림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지지했다. 먼저는 1872년에 유라이아 스미쓰가 “비공식적인” 교리 성명서를 썼고, 1931년과 1980년에는 공식적인 교리 진술을 발표했다. “그리스도 안에는 본래적이고 빌려오지 않고 파생되지 않는 생명이 있다.”(시대의 소망, 530)라는 엘렌 화잇의 1898년 진술은 삼위일체를 참된 성경적 가르침으로 지지하는 것을 위한(Dederen 5, 12) 그리고 그것을 교리로 이해하는 뚜렷한 방식을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엘렌 화잇의 진술은 초기 재림교회의 기독론과 신론 즉 선재하는 그리스도의 시간 안에서의 종속론과 관련된 기본적인 착오를 일소했을 뿐 아니라, 아들의 영원한 존재론적 종속을 포함하는 고전적인 교리에서 떠나야 함을 알렸다(Dederen13).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속에는 영원한 발생이 없고, 따라서 성령의 영원한 발출도 없다. 아들의 발생과 성령의 발출을 가리키는 성경적 개념은 창조와 구속 사업에 역사적으로 나타난 삼위의 위격적 행위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동등하고 영원하고 파생되지 않는 세 위격의 본질적인 시원성(始原性)이 있다. 또한 재림교회는 성경적 의미에 비추어 위격들에 관한 개념이 지성과 행동의 세 개체적인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Dederen 15). 마지막으로, 재림교인들은 무시간적인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인 개념에서 떠나 성경에 제시된 대로 하나님에 관한 역사적인 개념을 수용했으므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관계를 상응성보다는 동일성의 관계로 본다. 구원의 사역들은 내재적 삼위일체로 말미암아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뤄지는데(Guy 13), 의식과 행동의 중심들로 여겨지는 서로 다른 위격들을 통해 이뤄진다 따라서 재림교인들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의 불가분리성이 본질의 단일성(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인 전통이 가르치는 것처럼)이 아니라 구속의 역사적 과업의 단일성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본다(Dederen 20). 이런 입장과 관련된 삼신론의 위험은 하나님의 하나 됨이 인간 사회나 인간의 교제에 유비되는 단순한 연합으로 전락할때 드러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의 연합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하나의 실재로, 곧 그분이 역사에서 자신을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는 행동 안에서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하나의 실재로 보아야한다(Prescott 17). 인간의 정신은 삼위일체에 관한 고전적인 교리가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것, 곧 하나님의 존재의 내적인 구조에 대한 묘사를 결코 완성할 수 없다.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 됨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약 2:19). 엘렌 화잇은 이렇게 적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주신 당신 자신의 계시는 우리의 연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우리가 간파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최고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본질을 추측하고자 자신의 힘을 지칠 정도로 발휘할지라도 마침내 그 노력은 아무런 결실을 가져 오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에게 해결하도록 위탁되어있지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으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본질을 추리해내고자 몰두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는 침묵이 웅변이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치료봉사, 429). (184.1)
 4. 현대의 추세
 전반적으로 현재도 재림교인들은 구원론과 종말론적인 문제에 신학적 관심을 계속하여 집중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신론에 대한 전문적인 논의가 이슈로 부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밖에 속죄, 칭의, 성화, 종말론 같은 연관된 신학적 이슈들을 다루는 동안 하나님의 사랑과 선함과 자비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생겨 그분의 공의나 진노의 개념을 손상시키는 일이 어떤 저자들 가운데서 감지된다(참조 Provonsha 49). 또한 하나님에 관한 열린 견해를 지지하는 논의도 시작되었다(Rice 11-58; 참조 IX. E. 5). (1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