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관한 루터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출발점으로부터 그는 드러난 하나님과 숨겨진 하나님을 구분했다. 드러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로, 그 안에서 하나님은 신의 본 모습, 곧 사랑과 칭의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고유한 사업이다. 좀 더 폭넓게 말하면, 드러난 하나님은 내재성의 역사적 차원에 속한다. 숨겨진 하나님은 계시를 초월해 계시는 존재 그대로의 하나님이다(Luther’s Works 5:44-46). 에밀 부룬너에 따르면,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 및 합리적인 지식뿐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신비 그리고 절대권을 포함시킨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루터는 전통적인 도그마를 지지했다.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 그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예지와 예정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개념을 강화했는데, 칼뱅도 그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루터의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모든 자료를 충실하게 포함하여 다루지 못했다. (179.3)
 2. 장칼뱅(1509-1564년)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 신학에 체계적으로 접근했다. 그에게 하나님은 무시간적이고 단일적이고 무감정하고 불변하고 자존하는 분이었다(Institutes 3. 21. 5; 1, 2. 2; 1. 13. 2; 1. 17. 13;1. 18. 3;3. 2. 6). 칼뱅은 삼위일체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전적인 입장을 재확인했다(위의 책, 1. 13). 하나님의 행위에 관하여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더 강화했다. 하나님의 무시간성과 불변성에 기하여 예지와 예정을 동등하게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창조와 인간을 위한 그분의 영원한 의지의 발전이 되었다. 하나님에 관한 칼뱅의 교리 역시 하나님에 관한 모든 자료를 포함시킴으로 통합하지 못했다. (179.4)
 3. 재침례파
 급진적인 종교개혁자로도 알려진 재침례파는 16세기에 경건주의적, 실제적, 성경적 경향을 지닌 다원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재침례파가 실제적인 그리스도인 삶을 강조했기 때문에 실제적인 적용과 관련된 신학적인 이슈가 다뤄졌다 거의 예외 없이 재침례파는 교리에 있어서 정통적이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의 삼위일체론을 받아들였다. 이들은 하나님에 관한 사변적 또는 성경적 이해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요구되는 실제적인 이슈들을 해명해 주는 것으로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했다. 그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윤리적 및 공동체적 삶을 위한 틀로서 중요했다. 그러나 이따금 나타나는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그들의 언급은 전통적 교리에서 벗어난 것으로 읽힌다. 예컨대, 멘노 시몬스는삼위를 양태들이나 관계들로 보지 않고, “신성과 의지와 능력과 사업에 있어서 하나인 참된 신적인 세 분”으로 일컫는다(Confession of the Triune God). 이런 실제적인 배경에 비추어 보면, 그들이 고전적 신학에서보다 성령을 더 강조한다고 놀랄일이 아니다. 이런 실제적인 관심 때문에 그들은 내재적 삼위일체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연구로 더 기운다. (180.1)
 4.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1560—1609년)
 아르미니우스는 명시적인 철학적 틀 안에서 프로테스탄트 신학에 접근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 아퀴나스적인 지성주의에 입각하여 하나님을 무시간적이고 단일적이고 무감정하고 불변적인 분으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동의했다(Arminius 1:436-442; 2:34, 35).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의 우발적이고 자유로운 미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 존재들의 미래에 대한 의지와 행동에 의해서 유발된다고 주장했다(3:66, 67;3:482, 483). 구체적으로 말하면, “창조된 [의지의] 선택이나 의향의 자유에 의존된 일들에 [일종의] 중간적인 또는 중개적인 지식이 개입해야 한다.”(2:39). 그러나 아르미니우스는 절대적 예정이라는 개념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불변적이고 무시간적인 작정이 “의나 죄, 순종이나 불순종에 상관없이” 멸망과 구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1:212;참조 1:211-247). 따라서 아르미니우스는 구원이 “하나님이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은총 안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의 결과라고 생각했다(247).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은 성경적 기반보다는 철학적 기반 안에서 움직인다. (180.2)
 E. 현대
 계몽주의가 그리스도교 신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현대의 반(反)형이상학적 경향이 일어났다. 새로운 철학적 추세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통을 점차 비평했고, 그에 따라 하나님과 신학에 대한 고전적인 이해가 밀려났다 칸트, 헤겔, 화이트 헤드의 사상에 기초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주의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새로운 신학적 해석들이 생겨났다. 북미에서 화이트헤드의 과정 신학은 몇몇 보수 신학자들뿐 아니라 점증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180.3)
 1. 프리드리히 쉴라이어마허(1768—1834년)
 쉴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교 신학이 그 교리들을 쌓아올리는 새로운 토대를 고안했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쉴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신학은 인식할 수 있는 계시나 이성 또는 윤리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규명된 내적인 종교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무시간적이고 불변하고 단일적이므로(Christian Faith no. 52, 56), 그분 안에는 구분을 위한 자리가 없다. 따라서 쉴라이어마허는 삼위일체 교리를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부차적인 표현으로 내버렸다. 그에 따르면, 삼위일체 교리는상상할수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단일성에 위배된다. 그것은 철학의 사변적 상상으로 생겨난 이론적인구조물이다(no. 170-172). (180.4)
 2.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년)
 바르트에 따르면, 하나님은 단일적이고 무시간적인 본질인데 그 내용은 주권이다. 그분의 개체는 하나이며 그분의 본질과 동일하다. 그러나 어쨌든 바르트는 삼위일체 하나님도 믿는다. 따라서 그는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채용하고 발전시킬 뿐 아니라 자신의〈교의학(Dofmatik)〉의 전체 구조로 삼음으로써 고전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배격한 쉴라이어마허를 뒤엎는다. 바르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따라, “위격들”이란 우리가 묵묵부답인 채로 남아 있지 않기 위해 사용할수밖에 없는 관습적인 표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세 위격은 계시의 사실이 요구하는 대로 한 본질에 속한 존재의 양태들이다. 삼신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인격이라는 현대적 개념을 위격들에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요컨대,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트의 이해는 아퀴나스의 이해에 매우 근접한 것이다. 바르트와 아퀴나스의 주된 차이점은 바르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그분의 주권과 동등하게 보고 삼위일체에 관한 아퀴나스의 지성 주의적인 개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의 논리에 대한 분석으로대치한데 있다. (181.1)
 3. 앨프레드 화이트헤드(Alfred Whitehead, 1861-1947년)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플라톤적인 철학을 기반으로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1632-1704년)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년)의 영향을 받아 그의 체계를 구축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하나님은 다른 존재들처럼 세계의 해석에 타당한 형이상학적 원리들과 동일한 원리들에 순응해야 하는 실재이다. 화이트헤드는 세계의 실재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하나님에게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이 양극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원초적인 극은 무시간적이고 무제한적이고 관념적이고 자유롭고 완전하고 잠재적이고 사실상 불충분하며 무의식적이다(Whitehead 521, 524). “그 결과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본질은 그가 현상[세계 과정]의 다중적인 자유를 그의 자기실현의 조화속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경험[지식]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곧 참으로 실재적이고 그의 단순한 관념적인 실재[원초적인 극]가 지닌 불충분성을 메우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다.”(530). 이런 체계에 의하면, 하나님의 무시간적인 원초적인 극은 “설득”이나 “유인”(誘引)을 통해서만 작동한다.(522). 그 결과로 일어나는 시간 안에서의 하나님의 본질은 세계를 알고 경험함으로써 그 자신을 완성하여 온전한 실재(실현)에 도달한다. (181.2)
 화이트헤드의 체계에 따르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지 않고 구원한다(526). 하나님은 “세계가 그분 자신 생명의 직접성의 일부가 될 때 세계를 구원한다.”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525). (181.3)
 “세계에서 이뤄진 것이 하늘에서 실재로 변화하며, 하늘에서의 실재가 세계로 되돌아온다. 이런 상호 관계라는 이유로 인해 세계에서의 사랑은 하늘에서의 사랑의 일부가 되고 다시 세계로 흘러 돌아온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위대한 동반자 곧 [세계를] 이해하며 함께 고통 받는 자가 된다.”(532). (18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계는 상호 의존적이다. 고전적인 사상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평을 좋게 평가한다 해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그의 양극적인 관점은 성경적인 사상보다는 고전적인 사상과 더 공통점이 많다. (181.5)
 4.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년-2014년)
 판넨베르크는 20세기말에 저술가로 활약한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신학자이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무한하고 무시간적이고 전지전능하다(Pannenberg 1:397-422). 하나님의 세 위격은 하나님의 존재의 세 형태 또는 양태들로 묘사되기도 한다. 보편적인 영역에 대한 마이클 페러데이의 개념과 유비하여 추가적으로 묘사된 대로,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성령은 지성(누스)이라기보다는 비인격적인 생명력으로 이해된다. 신성의 삼위에 대한 지식(그들의 이름과 구별성)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다루는 성경의 증언에서 나온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 충족성에 영향을 끼치는 목표들의 성취와 관련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이해와 연관 지어 이해된다(384-396). 하나님의 행동은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외부를 향하는”(ad extra) 즉 세계에 관여하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관련된다. 판넨베르크는 외부를 향한 하나님의 활동을, 시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이 자기를 실현하는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시간 안에서 복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와 달리, 영원한 반복 개념을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위격들을 복제하는 것에 적용하지 않고 시공간안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복제(아들과 성령)에 적용한다. (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