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2세기에서 4세기 사이에 신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오도하는 몇몇 개념들이 형성되었지만 융성하지 못했다. 역동적 단일신론(Dynamic Monarchianism), 양태론적 단일신(Modalistic Monarchianism), 아리우스주의는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의 전통 안에서 신플라톤주의가 제공하는 지적인 배경에 비추어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176.1)
 역동적 단일신론은 테오도투스(190년경)에 의해 개진되어, 사모사타의 바울(3세기 후반)에 의해 좀 더 체계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주장은 기독론의 이단인 양자론(養子論)에 기초되었다. 그것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침례 시에 성령이 그 위에 내려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름을 부음으로써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 안에는 위격의 복수성이 없다.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개념이 내주하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라는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이 단일신론은 하나님이 복수적인 위격이 아니라 최상의 권세를 지닌 영원한 한 분의 존재라고 주장한다. “역동적”이라는말은 한 분 하나님이 비인격적인 영적 능력 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간과 연결되었음을 의미한다. (176.2)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은 2세기 말에 서머나의 노에투스(200년경에 의해 개진 되었다. 역동적 단일신론과 마찬가지로 양태론적 단일신론도 오직 한 분 하나님 곧 아버지밖에 계시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가 아버지와 동일한 분이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다른 두 위격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활동에 관여한 동일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이다. 성령은 아버지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일 뿐, 그 밖에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양태론적 단일신론[군주론]에서, 단일신론(Monarchy)은 하나님이 한 분 곧 아버지임을 강조하고, 양태론(Modalism)은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계시의 특별한 양태를 채용할 수 있음을 말한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이 삼위일체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인 이유는 그것이 내재적(삼위의 내적인 관계) 및 경륜적 차원(역사적 구원 활동을 통해 나타난 삼위)의 삼위일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76.3)
 사벨리우스(215년경)의 양태론은 하나님을 단일체(monad) 보는데, 그 하나님은 세 가지 연속되는 역사적 활동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표현되었다. 사벨리우스주의는 성령을 포함시키고 아버지를 다른 위격들과 동일한 수준에 올려놓음으로써 노에투스의 양태론을 개선했다. 그러나 위격을 지닌 삼위는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양태로 인식되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 (176.4)
 아리우스주의는 아리우스(250년경-336년)에 의해 창안되었다. 그는 플라톤 주의나 신플라톤주의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가까운 신 개념의 틀 안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이해하려고 했다. 아리우스주의는 불변하고 무시간적이고 단일적인 하나님이라는 오리게네스의 개념을 공유했지만 아들의 영원한 발생이라는 그의 개념 안에 내포된 발출(emanation)라는 개념은 거부했다. 아리우스는 아버지 하나님의 단일성과 불변성 때문에 그분의 본질이 발출이나 발생을 통해 전달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무시간적인 초월성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을 공간과 시간에서 실행할 수 있는 중개자가 필요했다. 이렇게 하여 아리우스는 영원한 발생이라는 오리게네스의 개념을 무로부터의 창조, 즉 시간 “이전”과 시간 “밖”으로 묘사된 창조 개념으로, 그러나 “그[아들]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O’Carroll 26). 그러므로 아들은 나머지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높여진 피조물이며 세계의 창조주이다. 성령은 아들에 의해 창조되었고, 따라서 아들에게 종속된다. 따라서 아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을 가장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단일신론과 종속론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하였다. (177.1)
 5. 니케아종교회의(325년)
 아리우스주의에 의해 제기된 신학적인 위협을 다루기 위해 첫 번째 세계 공의회가 니케아에서 열렸고, 거기서 그것을 결정적으로 단죄했다. 공의회는 아들의 신성을 지지하고, 아들의 영원한 발생 교리(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났다 즉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왔다”)를 반박하고 해묵은 논쟁거리인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을 옹호했다.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또한 [우리는] 성령을 [믿는다]”라고 공표함으로써 성령을 추가적으로 지지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모인 제2차 세계 공의회는 성령의 신성을 명시적으로 지지함으로써 니케아 회의의 성명을 확대한 소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선포했다 (177.2)
 6.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교부들이 시도한 신플라톤주의와 성경의 융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영향력 있게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하나님은 무시간적이고 단일적이고 불변하고 자기 충족적이고 무감정하고 전지전능하다(Confession 7. 11;12. 15; 11. 11; 11. 13;13. 16 [NPNF-1 1:110, 167, 180, 196]; On the Holy Trinity 1.1. 3; 5. 2.3 [NPNF-1 3:18, 88]; The City of God 11. 10; 22. 1 [NPNF-1 2:210, 479]).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토대로 그의 책 〈거룩한 삼위일체에 관하여(On the Holy Trinity)〉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신학을 고전적으로 표현하였다. 카파도키아 교부들과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이라는 개념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삼위로 옮겨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위격들의 동일 본질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단일적이고 무시간적인 본질은 하나님의 존재론적 단일성을 위한 궁극적인 토대일 뿐 아니라 아버지를 삼위의 근원으로 대체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가 위격들과 그들의 통일성이 파생되는 원천이 된다. (177.3)
 아우구스티누스는 “위격들”(persons)이라는 단어에 불편함을 느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분리된 개체들이라는 개념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용어가 사용된 것은 “그것으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묵묵부답인 채로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On the Holy Trinity 5. 9 [NPNF-1 3:92]). 위격들은 불변하고 고유하며 실재하는 관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이다. 그는 영원한 발생과 발출의 개념을 취하여 그 관계들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위격들은 낳고 태어나고 발출하는 관계로 전락된다. 이런 개념적 틀 안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 것(필리오케[Filioquel])을 옹호하면서 위격으로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상호간의 사랑, 곧 이들을 연합시키는 동일 본질의 유대(細帶)라는 개념을 개진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과연 서로 독립된 세 개체에 관한 성경적 계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시할 이유들이 있다. 하나님의 단일성이 하나님의 삼위성을 점거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삼위일체가 단일신론으로 대체된다. (177.4)
 하나님의 단일적인 본질의 무시간성은 하나님의 복수성과 시간적인 창조와 역사로서의 하나님의 예지/예정/섭리에 관한 해석적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참조 The City of God 22. 2 [NPNF-1 2:480]). 플라톤이 말하는 시간 안에 나타난 영원의 복제는 세계 형성자(Demiurge,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뿐 아니라 그것이 시간 안에 복제된 것도 창조한 분으로 여겨지는 하나님에 의해 산출된다고 주장한다(위의 책). (178.1)
 7. 아타나시우스 신조(430년경-500년)
 퀴쿤케(Quicunque)로도 알려진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톨릭 신앙의 결정적인 표현으로 여겨진다. 미상의 작가에 의해 작성된 이 신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내비친다. 이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단일성과 복수성을 명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도 하나님이고 아들도 하나님이고 성령도 하나님이다. 그렇지만 삼신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존재한다”(Dezinfer 15). 이것은 삼위 각각을 하나님이자 주님으로 명시할 뿐 아니라 각각이 창조되지 않음, 광대함, 영원성, 전능성이라는 신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결정함으로써 위격들의 신성을 천명하였다 이 신조는(사벨리우스주의를 반박하여) 혼동할 수 없이 다른세 위격을 구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발생과 발출 개념에 호소하여 세 위격의 다름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단일신론(군주론)과 존재론적인 종속론의 미묘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필리오케) 나고 발출하지만 아버지 만은 발생하지 않았다. 삼위일체의 하나 됨은 하나님의 본질에 기초하여 설명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적 본질은 하나이다.”(Dezinger 39). (178.2)
 C. 중세
 중세의 신학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통합적 신학의 논리적 결과를 체계화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와 달리, 스콜라 신학의 가장 탁월한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토대 위에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178.3)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형성 하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초하여 이전의 해석자들이 이르지 못한 전문적인 구체성이나 논리적 통일성을 가진 수준으로 고전적인 신론을 끌어올렸다. 그의 사상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아퀴나스는 먼저 무시간적이고 단일적이고 불변하고 완전하며 선하신 하나님에 관한 교리를 다뤘다(숨마 테올로기카[Summa Theologica] 1a. 20. 4; 1a. 11. 3; 1a. 3.6, 7; 1a 9.1; 1a 4.1; 1a 6. 1). 일단 신론을 마무리 지은 다음, 삼위일체론에 관한 퍽 긴 논의를 개진한다(위의 책, 1a. 27-43). 하나님의 단일 본질은 인간 지성의 작용과특성에 유비하여 이해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해석과 유사하게 이해된다. 따라서 세 위격들은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지식과 활동의 독립된 중심들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삼신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위격들은 단일적이고 절대적인 신적 본질안에 존재하는 구분들이다. 본질 안에 존재하는 위격들을 결정하는 구분점은 본질 안에 있는 관계들이며, 그 관계들은 아들의 발생과 성령의 발출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토마스는 그 자체를 표현하면서 자체적으로 아들(말씀)을 발생시키는 하나님(아버지)의 지성의 “결과들”로 성령의 영원한 발생과 발출을 말하면서 이에 관한 고전적인 가르침을 통합한다. 더욱이 하나님은 아실 뿐 아니라 동시에 사랑하신다. 사랑은 하나로 결합시키는 운동 곧 일종의 회귀(回歸)로 묘사된 행동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두 위격에서 발생한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생된 그 운동은 그들자체 안에서 일어난분출곧그들처럼 실재가 된 성령을 촉발시킨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생하여 그들을 결합시키는 사랑을 완성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상호 대립되는 삼중 구분(부권, 아들됨, 발출)은 하나님의 단일 본질 안에서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세워진다. 하나님의 단일 본질 안에서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이런 실재하는 관계들은 본질들 또는 위격들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단일 본질과 동일하다. 이렇게 하여 단일 본질의 내적 구조 안에서 모종의 관계성이 드러난다. (178.4)
 토마스는 예지와 예정과 섭리가 하나님 자신의 무시간적인 존재 안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고(위의 책, 1a. 14.13; 1a. 19. 3,4; la. 22),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이어갔다. 하나님에 관한 아퀴나스의 견해들은 매력적이며 그가 따르기로 한 철학적 체계 안에서 논리적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아퀴나스의 접근방식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견해의 내적인 통일성을 제시할수 없다 (179.1)
 D. 종교개혁 시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신학적 관심은 구원론적 및 교회론적 이슈들에 집중된다. 이런 강조가 신론에 대한 수정이 왜 고려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보면 프로테스탄트주의는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인 접근방식을 재확인했지만, 동시에 어떤 강조점들은 강화하거나 수정하였다. 또한 신학을 위한 철학적 토대가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루터나 칼뱅의 신학은 성경의 자료와 표현을 폭넓게 사용하여, 오직 성경에만 기초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들의 저술을 보면 신플라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오캄주의의 영향이 명시적이진 않지만 암시적으로 작용한다. (179.2)
 1. 마르틴 루터(1483—154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