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부 록 J. 제칠일 안식일은 사람을 “살려 주는 영”의 날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른 날인가
 제칠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다른 여섯 날들과 어떻게 다른 날인가? 우리들의 제칠일 안식일의 삶은 우리들 여섯 날의 삶과 어떻게 다른가? 제칠일 안식일에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제칠일까지의 여섯 날들은 우리가 “가시덤불과 엉겅퀴”(창 3:18)같은 세상살이에서 “힘써 우리의 일을 해야 하는” 날이다(출 20:9). 빵을 위하여 “얼굴에 땀을 흘리며”(창 3:19) 일을 해야하는 날들이다. 빵을 위하여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창 3:19)날이다. 우리가 흙 사람(창 2:7)으로 사는 날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고 흙 사람이 되어 우리가 “우리의 체질을 알고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는”(시 103:14) 날들이다: 우리가 “목말라 죽게 되었나이다”(삿 15:18)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나이다”(시 119:25)하고 주께 부르짖는 날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그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여 부르짖는”(출 2:23) 날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손이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하는”(출 2:23)날들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의 고통을 정녕이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역을 알게 되는”(출 3:7) 날들이다. (370.1)
 따라서 제7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를 보신”(출 3:9)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 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생명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출 3:8) 날이다. 하나님이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시 103:13) 날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를 향하여 내 백성을 “놓으라”(출 4:23)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수고의 여섯 날들을 향하여 “내 백성을” “놓으라” 하시는 날이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복음의” 날이며(눅 4:18) 죄와에 붙잡힌 백성들을 “놓이게 하여” 그들로 “숨돌리게 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네 소나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돌리게 하라” (출 23:12) 하시는 날이다. (370.2)
 제7일: 네가 쉬어 숨을 돌리고 새 생명을 얻는 날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하신 날이다. “너는 아무일도 하지 말라” 하시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규제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너는 쉬라”(출 23:12)하여 우리를 놓아주는 말씀이다. “너는 쉬라” 하시는 말씀은 “숨 넘어가게 된 네가 숨을 돌리라”는 말씀이다. 수고로 “숨 넘어가고” 배고프고 “목말라 죽게 되고” 죄와 사망의 공포로 그 “영혼이 진토에 붙게 된” 사람들 곧 여섯 날의 “가시덤불과 엉겅퀴” 같은 삶으로 말미암아 숨이 넘어가고 “흙으로 돌아간” 흙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숨을 돌려주는”날이다. 하나님이 새 숨을 불어넣어 주시는 날이다. 지쳐 죽은 자 같이 된 사람 즉 “흙 사람의 코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그를 “산 사람”으로 일으키는 날이다(창 2:7). 하나님이 사람을 재창조하시는 날이요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날이다. (371.1)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출 20:11) 창조의 기념일이다. 천지가 존재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만물이 자신의 생존을 찬미하는 날이다. 태초에 가라사대 “있으라”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날이요, 하나님이 만물을 향하여 가라사대 “있으라” 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371.2)
 안식일에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출 20:10) “쉬라,” “쉬어 숨돌리라”(출 23:12)하신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태초에 가라사대 “있으라”하신 하나님이시다(창 1:3).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였고 “하늘에 광명이 있으라”하였으며(창 1:14)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창 1:11)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 하시는 말씀의 뜻은 곧 “나는 가라사대 ‘있으라’ 하신 자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있음”이신 분이요 “있게”하시는 분이다. 하나님만이 참으로 “있음”이요 “있게 하심”이다. 애굽의 임금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놓아라”고 명령하시는 출애굽의하나님은 “혼돈하고 공허하고 캄캄한” 천지를 향하여 “빛을 내놓아라,” “광명을 내놓아라,”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놓아라” 하셨던 그 하나님이시다 “빛이 있으라,” “광명이있으라” 하신 하나님이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하리이까”(출 3:13)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하신 것은 자신이 다름 아닌 창조의 하나님, 천지를 “있게 하신” 하나님 곧 만물에게 “있으라” 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셨다. 스스로 “있는” 하나님이 만물을 “있으라” 하는 하나님이다. “빛이 있으라” 하여 그 빛을 우리에게 “보내셨던” 하나님이 이제 모세를 “너희에게 보내시는” 것이다. 어둠에서 빛을 “나오라” 하신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나오라”하시는 것이었다. 무덤에서 나사로를 “나오라”하셨던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우리를 “나오라”하시는 것이다. 오직 그 자신이 “있음”이신 자만이 “있으라” 할 수 있다. 즉 “스스로 있는 자”만이 “있으라” 할 수 있다. 즉 “스스로 있는 자”만이 “있게 할 수가 있다.” 안식일은 스스로 “있음”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있게 하시는” 날인 것이다. (371.3)
 진실로 안식일은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계심”을 다짐하는 날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있으라”하시는 하나님의 가라사대를 우리가 다시 듣는 날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있으라”는 가라사대에 의하여 우리가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372.1)
 따라서 안식일의 신앙에서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시 14:1)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안식일의 신앙은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시고”(출 3:14) “하나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사 45:5, 21) 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안식일의 신앙에서는 세상은 “허무하다”(전 1:2)고 탄식하고 자신의 삶이 허무하다고 탄식하는 것이야말로 악한 일이다. 안식일 신앙에 있어서 우주는 하나님의 계심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로 충만한 공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항상 있다. 안식일의 신앙은 이제도 계시고 어제도 계시고 앞으로도 언제나 “계시”는 하나님(계 1:8)에 대한 신앙이요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가라사대의 신앙이다. (372.2)
 안식일의 하나님은 “있음”의 하나님이지 “없음”의 하나님이 아니다. 안식일의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마 22:32). 안식일의 하나님은 “죽는자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돌이켜 살기를 바라시는”(겔 18:32) 하나님이시다. 안식일의 하나님이 “사람의 아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죽음으로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서”(시 24:16) 살라는 것이다. 비록 생명의 대적인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벧전 5:8) 하나님에게 사람의 아들을 고소하는 자들이 저를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요 19:15)하고 외치는 소리가 수많은 파도의 부르짖음과 같을지라도 안식일의 하나님의 벽력같은 가라사대는 “너 있으라”는 것이다. “너 살라”는 것이다.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는 것이다(겔 16:6). 진실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시는”(마 12:20) 하나님이 안식일의 하나님이시다. (372.3)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창 1:4) 것은 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인이 죽는 것이 아니다. “죽는 자의 죽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죄인이 죽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네가 “있는” 것이 하나님께 “좋은” 것이다. “죽을 자가 돌이켜 사는 것”이 하나님께 “좋은”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 신앙의 고백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3, 34)라는 것이다. (372.4)
 안식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코에 하나님의 새 숨을 불어 넣으시는(딤후 3:16)날
 안식일은 삶의 질고와 죽음의 공포로 흙이 되고 “없음”이 된 우리가 하나님의 “너 있으라.” “너 살라,” “너 좋고 의롭다” 하시는 가라사대로 “다시 있음”이 되고 “다시 살아남”이 되고 “다시 좋음이 되고 다시 의로움이 되는” 날이다. (372.5)
 그러나 사람이 참으로 “다시 있음”이 되고 “다시 살아남”이 되려면 넘어간 숨이 다시 돌아와야 하고 끊어진 숨이 다시 이어져야 한다. 따라서 “너 있으라” “너 살라” 하시는 하나님의 가라사대는 하나님이 숨 넘어간 우리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어 주심이어야 한다. 흙사람 곧 시체가 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코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이어야 한다. 그리해야 참으로 우리가 “생령”이 되는 것이다. “제칠일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출 23:12)는 안식일 계명의 삶은 바로 시체같이 된 우리가 안식일에 하나님의 생기로 다시 살아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6일 간의 지친 삶 속에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생케 하소서”(시 119:25)하고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생기로 다시 살아나고자 하는 부르짖음이다. (372.6)
 그런데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호흡이다. 하나님의 호흡은 생명의 숨이며 “살려주는 영”(고전 15:45)이다. 하나님이 생기로 우리의 시체같이 굳은 몸이 살아나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생기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이 솟아난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생기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같은 것이다. 생명의 생기요 성령의 말씀이다. 또 진실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이요(딤후 3:16, King James Version) “하나님의 숨 불어넣으심이다”(딤후 3:16, New International Version).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처음으로 나타나셨을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말씀하신 후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셨다(요 20:22). 예수님의 숨이 “살려주는 영”(고전 15:45) 곧 성령이며 성령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령의 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372.7)
 진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숨을 받는 것은 우리를 향하여 “너 있으라”는 말씀 곧 “살려 주는 말씀”을 받는 것이요 성령 곧 “살려 주는 영”을 받는 것이요 새 생명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죽을 목숨이 죽지 않을 목숨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요 육체의 생명이 성령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요 3:1-7;갈 4장). 우리에게 기대되는 안식일 신앙의 경험이 이러한 것이다. 우리의 죽은 목숨이 하나님의 호흡으로 다시 살아나는 경험이며 우리의 육체의 생명이 하나님의 성령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 2절에서 흙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었듯이 하나님은 제칠일 안식일에 삶에 지쳐 숨넘어간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의 코에 생명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것이다. 선지자 엘리사가 수넴 여자의 숨 넘어간 어린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왕하 4:34) 아이의 넘어간 숨을 되돌렸듯이 하나님은 “일곱째 날이 이를 때”(창 2:2) 삶에 지쳐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거의 숨이 넘어간 우리들에게 와서 우리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우리의 입에, 자기 눈을 우리의 눈에, 자기 손을 우리의 손에 대고”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를 살려내시는 것이다. (372.8)
 하나님은 당신의 생기를 우리의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우리의 육신만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영을 불어넣으시어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일으키시는 것이다. 우리를 성령의 새 사람으로 일으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어 넣으신 새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이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고후 5:17).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것이다”(골 3:10).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은 것이다”(엡 4:22-24). (373.1)
 안식일의 사람: 하나님의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성령의 사람
 사람이 참으로 “있고” 사람이 참으로 “사는” 것은 몸만 있고 몸만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숨을 쉬는 사람이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고 마음과 정신이 있어야 참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호흡과 사람의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셔야 비로소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생명의 호흡과 성령의 호흡을 사람의 코에 불어넣어 주셔야 사람이 산 사람이 되고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기가 떠난 사람은 육체이며 시체이며 마른 뼈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373.2)
 에스겔 선지자를 성령으로 감동하시어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신 하나님(겔 37:1)은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하셨다(겔 37:11). 그리고 이 마른 뼈들은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고 부르짖었다(겔 37:11). 오늘날 인류는 이스라엘 온 족속처럼 골짜기에 쓰러진 마른 뼈들이 되어 “우리들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가 다 멸절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에스겔이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며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다”(겔 37:2).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이르시기를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셨다. 능히 살 가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에 선지자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인류의 처지가 이와 같을 것이다. 그들의 뼈는 아주 말랐고 그들의 호흡은 “약하고 여리다”(왕상 19:12). 누구도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이들의 “다시 있음”과 다시 삶을 장담할 수 없다. 인류와 세계의 절망적 현실을 생각할 때 인간과 세계에 대한 비관적인 대답만이 참으로 정직한 대답이라 할 것이다.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정직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전망할 수 없을 것이다. (3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