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28. 온전한 번제 (나의 모든 존재는 그리스도의 것임)
 제사장은 씻고 소금을 친 부분들을 가져다가 제단 석쇠 위에(레 1:7; 비교 왕상 18:33)자신이 “벌여 놓은”(창 22:9) 불타는 무화과나무 장작 위에 하나씩 던졌다. 제사장은 그 다음에 고기살을 집어드는 갈고리를 들어 이 어질러진 조각들을 “벌여” 놓았다(레 1:8, 12; 6:12). 다시 말하자면 동물의 원모양과 비슷하게 모아 놓았다는 말이다. 노래하라! 이 행위화된 비유는 평화와 희망의 샘이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자신을 “산 제사”로 맨 처음 던질 때에 삶이 종종 혼란 가운데 빠지고 어지럽혀진 것 같다. 하지만 잠시만 기다리라! 우리의 제사장께서는 항상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분이 행하실 이 이상의 봉사가 있다. 그분께서는 제 때에 뒤죽박죽된 경험 속에서 “질서”를 잡으실 것이다(비교 고전 14:40; 시 37:23; 잠 4:26, 난외주).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사 양손으로 이 소망을 굳게 잡도록 하여 주옵소서! (367.6)
 제단에서 사용된 불
 제단 위의 불은 거룩하였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막 예배를 정하셨던 시내 산에서 그 불을 켜셨기 때문이다(레 9:24; 비교 대상 21:26; 대하 7:1). 이 불은 “단의 불”이라고 칭하여졌다(레 6:9). 어떤 다른 곳에서 가져온 불은 “다른 불”이라고 불렀고, 성소에서는 사용될 수 없었다(레 10:1, 2; 민 3:4; 26:61). 그러고 나서 여호와께서는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불길이 결코 꺼지지 않도록 하라는 책임을 맡겨 주셨다. 제사장들은 광야에서 행진해 나가는 도중에도 불남비에 넣어 이동하던 숯에 향을 넣어 이 일을 행하였다(부조와 선지자, 348). 성막이 다시 세워졌을 때에 이들은 이 깜부기불을 사용하여 제단 장작에 불을 붙이었고, 이 불로 성소 봉사를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거룩한 불들을 붙이었다. 즉 진설병을 구울 때, 등잔불을 켤 때, 향을 태울 때, 불이 필요한 다른 모든 예식을 수행할 때 사용하였다. 전하여 주는 기별은 분명하다. 방황하는 인생길에 그리스도의 공로와 대언을 나타내는 향은 우리의 기도를 계속 타오르도록 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향로에 켜진 하나님의 사랑의 불길만이 이 일을 할 것이다. (368.1)
 랍비들은 제단 위의 희생을 불태우는 데 사용되는 장작은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만 제외하고는 어느 나무 장작도 사용될 수 있었지만, “그들의 관습은 무화과나무나 호두나무, 혹은 야생 올리브(oleaster)나무만 사용하였다”고 기억하였다(Tamid 2:3). 제단에 올릴 장작으로 가장 먼저 선택하는 나무는 무화과나무였다. 하지만 성경에서 과실이 없는 무화과나무는 위선을 설명하여 주는 데 사용되었다(시대의 소망, 581; 5T, 146). 네 복음서는 종종 바리새인들 자신들의 의(義)만큼이나 하나님의 어린양을 맹렬하게 “태운”것이 없다는 것을 가리켜 준다! (368.2)
 오직 재가 남을 때까지 희생 제물의 각 부분들을 불사르는 제단에서 타오르는 장작을 보라. 불은 정결케 하고(사 6:4~7), 소멸하는(신 4:24; 히 12:29) 신성의 한 면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에워싸는 불길은 아벨의 제물을 비준하였고, 예배를 인준하고, 그의 인격을 받아들인다. 불은 엘리야의 제물을 기화시킴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믿음을 옹호하였고, 그의 선지자로서의 봉사를 인준하였다(왕상 18:24). 하지만 이 불길은 소돔과 고모라가 빠져 버리고, 마귀와 마귀를 따르고자 선택한 이들이 끝을 마칠 죽음의 연못에 관하여서도 경고하여 준다. 우리는 양자 택일의 기로에 서 있다. 하늘의 불이 참회자의 고백한 죄를 짊어진 제단 위의 대속물을 불태우게 하던지, 아니면 죄인으로서 불의 연못에서 죄로 인하여 멸망하는 것이다. (368.3)
 희생의 연기
 번제로부터 올라가는 연기는 온전한 번제가 드려지고 있다는 증거이었고, 잿더미는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정의의 불은 제물을 받아들였고, 그분의 사랑은 만족되었다. 이 재들은 하늘의 희생이 구속의 대가를 “남김이 없이 다 갚”아(비교 마 5:25, 26) 치를 “때가 찰” 때(갈 4:4)를 가리키었다. (368.4)
 상처나고 피흘리는, 인간의 죄책을 짊어지고, 그 죄에 으깨지고, 그 증오로 잘리우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는 부르짖음으로 자신을 아버지의 팔 안으로 내던지는 그 순간까지 앙심으로 인하여 잔인한 나무에 달려 있는 하늘의 번제물인 희생을 상기하여 보라. (368.5)
 번제가 함축하는 광범한 내용을 이해하면 형벌의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고, 믿는 신자들에게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받아들여진 바 되었음을 확신시켜 준다. (369.1)
 구세주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자신의 희생이 열납되어질 수 있다는 말씀을 들으시려고 하늘에 올라가신 다음에, 다시 내려와서 40일간 제자들을 위로 하셨다. 성령이 예수의 올라감을 묘사할 때 사용한 동사들(아나바이노<anabaino>, “올라가다” 요 20:17; 엡 4:8, 10; 아나페로<anaphero>, “올리우다” 눅 24:51; 히 7:27)은 희랍어 구약성경에서 희생을 불태운 결과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단어들이다. 참회자는 연기 구름이 “불티가 위로 날으”면서(욥 5:7)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무죄한 대속물의 희생과 하나가 되려고 선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가납되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369.2)
 여호와께서는 이 예식을 “향기로운 냄새”로 삼으셨다(레 1:9, 13, 17). “향기로운 냄새란 온전히 하나님께 가납될 수 있다는 <뜻이다>”(6BC, 1059).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어는 “안식(rest)”(창 8:21, 난외주)을 뜻하고, 창조자께서 완전하게 임무를 이루신 것에 대하여 만족하신 것을 상기시켜 준다(창 2:1~3). 쉼은 사랑으로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하나되는 것을 뜻하고(룻 1:9, 3:1),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친교를 나누는 구속받은 자들의 환희를 예견하고 있다(마 11:28~30). 아우구스티누스는 매우 오래 전에 “우리의 영혼이 당신에게서 쉼을 찾을 때까지 쉼이 없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갈바리에서 드려진 번제물의 향기가 하늘에 다달을 때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번제로 산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셨다. 이 향기는 세상에 퍼져 나가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으로 하나님께 드렸느니라”(엡 5:2)고 선포하시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혼의 수고한” 결과로서 구원받은 영혼들을 보시면서 자신도 스스로 “만족히 여길” 것이다(사 53:11). 그러고 나면 세계는 하나님과 온전히 조화를 이룬 관계를 확실하게 가질 것이다. 우리가 갈바리에서 죽으시는 번제물의 의미를 이해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과 영원히 함께 살도록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도록 허락하시었다! 고 모든 이들에게 선포할 수 있다. (369.3)
 이스라엘의 예식에서 자발적인 번제물은 또 참회하는 자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굴복하여 자기 자신의 삶을 “산 제사”로 선물로서 드리는 것을 나타내었다. 제자들은 헌신과 봉사를 뜻하는 이 행위를 함으로써 신적 모본을 따르고, “주님,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내 모든 존재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 선언한다. (369.4)
 이삭을 제물로 드림
 구약성경의 역사에 나오는 가장 극적인 번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포에 질리게 하는 명령, 즉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명령에 따라 희생 제사를 드린 이야기이다. (369.5)
 “하나님의 친구”로서(대하 20:7; 약 2:21~23) 아브라함이 그 때 명성을 내세울 만한 것은 사라가 낳은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행한 일 중에 역사가 기억할 만한 일이 자식 낳은 일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라고 자문하였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책을 쓰지도 않았고, 성을 쌓지도 않았고, 사회에 도움을 주는 발명을 하지도 않았다. 만일 아브라함이 언젠가 미래에 메시야의 선조가 될 아들을 성인으로 자라나게 하는데 실패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 중에 성취하여 놓은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아들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자기 자신이 살아온 과거 인생과 앞으로의 남은 여생 그 자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브라함은 아마도 모리아산에서 내가 휘두른 그 칼은 내 인생의 끝장을 내고 말것이다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다. (370.1)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는 바로 그 순간, 이삭은 사실상 죽은 것이었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그 마음과 목적에서 자기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었다. 그는 아들의 뜻을 비정하게 대하였고, 그의 몸을 잡고, 칼을 아래로 내리쳤을 때에 그것이 못내려오도록 막을 힘이 없었다. 이 드라마에서 바로 그 때에서만 여호와의 천사가 그의 팔을 잡았다. 아브라함의 헌신은 구약성경의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더 분명하게 번제의 의미를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면서 그리스도께서 케노시스<kenosis>하심과 같이(빌 2:5~12)자신의 삶을 비웠다. (370.2)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가시에 걸린 수양을 보았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이삭이 자기를 대신하는 대리 동물이 죽었기 때문에 생명을 건지는 것을 놀라면서 그리고 스릴을 느끼면서 지켜본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겪은 것을 이해하였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생각하시어, 아브라함의 기념적인 행위의 의미를 “나의 때”(요 8:56)에 초점을 맞추실 수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그의 독생자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여 갈바리—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그 곳과 너무나도 가까운 곳—에서 성취하신 것의 극적인 장면이었고, 현재도 그렇다. (370.3)
 이번 장을 요약하여 보자. 흠없고, 이스라엘의 경배자들을 대신하여 죽고, 제사장이 속죄를 할 수 있도록 그 피를 뿜어낸 수컷 동물의 번제를 통하여, 우리는 갈바리에서 죽으시고, 자신이 흘린 피를 이 세상에 속죄를 가져오시기 위하여 적용하시는 그 자신이 희생이고 그 자신이 제사장인 예수를 바라본다. 우리는 번제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리우신 예수의 승천을 상기한다. 참회자가 자기 손으로 희생 제물을 누름으로 인하여 희생 제물과 하나가 되니, 이 행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내어 지고, 부활하여, 아버지에게로 “향기로운 냄새”로서, 우리가 승천하신 우리의 희생과 하나되어야 하고, 그분의 희생의 능력으로 무장하고,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공로를 내밀 준비를 갖춰야됨을 강조하여 준다. (370.4)
 바울은 지난 20여 세기 동안 우리들 각자에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권면하였었다. (370.5)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우리에게 은총을 내려 주시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산 애정의 희생—의의 일들을 행하는 것—을” 매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RH, 1884. 12. 16.). (3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