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6 부 예수님과 함께 같바리에서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28. 온전한 번제 (나의 모든 존재는 그리스도의 것임)
 희생의 일부분을 씻음
 제사장은 놋대야에서 국자로 떠낸 물에 “내장”“다리들”을 물에 씻고(비교 겔 40:38),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희생의 이 두 부분은 내적인 생각과 외적인 행동거지를 상징할 수 있었고, 물로 깨끗이 씻는 것은 죄없는 구세주와 구세주께서 제자들에게 정하여 주신 목적을 가리킨다. “씻음”이라고 번역된 복음의 “놋대야”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이다(루트론<loutron>으로서, 칠십인 역에서 놋대야를 뜻하는 루테라<loutera>와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한 단어이다. 엡 5:26; 딛 3:5). 믿는 이들이 스스로를 제단 위의 “산 제사”로 놓기로 결심할 때에 성령께서는 말씀의 “물”을 사용하시어 그 사람의 내적 비밀과 외적 “행동거지”를 깨끗게 하신다. 제사의 이 부분은 분명하게 그리스도인 독자의 마음을 구주께서 다락방에서 깨끗이 씻어 주신 행동의 목적에로 돌린다(요 13:1 이하). (365.2)
 “오그라든 건(健)”은 잘라 내어 잠시 제단 동쪽에 모아 둔 잿더미 위에 던졌다(Hullin 7:1). 양 뒷 다리에서 잘라낸 것은 율법에 따라 먹거나 바쳐서는 안 되었다. 이 힘줄(鍵)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겪은 패배와 승리를 상기시켜 주었고(창 32:25, 32), 하나님께서는 흠이 난 어떤 것도 자신의 제단 위에 놓아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365.3)
 제사장은 이 모든 의식 과정에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도와주었다. 제사장은 죽어가는 제물의 경정맥(頸靜脈)에서 뿜어 나오는 피를 은 그릇으로 받았다(A. Edersheim, The Temple, 115 쪽을 보시오). 제사장은 은 그릇에 받는 피가 쏟아지지 않도록 들고 있었고, 참회자가 자신의 의무를 마치고 나서 대속물이 자기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할지를 생각할 여유가 있을 때까지 계속 저어 응고되지 않도록 하였다. (365.4)
 뿌려야만 하는 피
 경배자는 봉사자가 피를 단의 경사로를 통해 제단을 두른 고대(高臺)로 가져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Middoth 3:1, 3). 봉사자는 제단의 북동쪽 구석쪽으로 가면서 단 한 번에 제단의 동쪽과 북쪽 면에 약간의 피를 뿌렸다. 제단의 선반(돌출부)을 돌아 제단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제단의 이 두 쪽면에도 피를 뿌렸다(레 1:5; “흩다” 겔 10:2). 제사장은 나머지 피를 제단의 아랫 부분에 부어 제단이 피의 상징적 토대임을 보여 주었다. (365.5)
 오직 제사장만이 희생의 피를 뿌릴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피가 거룩하였기 때문이다. (365.6)
 주님께서는 설명하신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생명(네페쉬<nephesh>)으로 인하여 피는 속죄할 수 있다. 속죄로 역된 히브리어 단어(카파르<kafar>)는 문자적으로 덮는 것을 뜻한다. 위클리프가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이 단어를 영어표현으로 ‘하나 되는 것’(atone-ment)으로 번역한 것은 이 예식의 결과를 표현한 것이지 그 의미를 말한 것은 아니다. (366.1)
 상상 속에서 계시자 요한이 희생 제물이고 동시에 제사장인 예수께서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리고 나서 승리하셔서 자신의 아버지에게로 승천하시는 광경을 보는 데에 동참하여 보자. 요한이 밧모섬의 험한 바위 사이에서 명상하는 동안에, 하늘 성소의 휘장은 올리워졌고, 예언자 요한의 시선은 지성소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로 옮기어졌다. 예언자는 거기서 인간의 구속의 대가로 자신의 피를 지불하고 계시는 피 흘리는 어린양을 보았다(계 5:6). 하나님의 양무리는 목자의 죽음으로 속량함을 받았다! 기뻐하라! 그분의 피가 우리의 생명을 샀고, 모든 축복이 이 피로 물들인 샘—머리(Fountain—head)에서 흘러나온다.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시어 이 표징을 똑바로 읽도록 하소서. (366.2)
 소금이 모든 제물에 첨가되야 함
 제사장은 절단되고 씻겨진 제물의 부분들을 제단에 올려 놓고 태우기 전에 소금을 친다. “의문(儀文)의 제사에서는 제물마다에 소금을 쳤다 ∙∙∙ . 이것은 그리스도의 의만이 그 제사를 하나님의 가납하시는 바가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수께서는 이 관습을 언급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49, 50)고 하셨다.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고자(롬 12:1)하는 자들은 다 구원하시는 소금인 우리 구주의 의를 받아야 한다”(시대의 소망, 439). (366.3)
 소금이 부패를 방지하기에 “성령은 ∙∙∙ 그 보전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소금에 비교된다”(4T, 319). “소금의 맛은 하나님의 은혜이”고(3T, 559),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삶의 모든 면의 맛을 내는 성령의 특별한 봉사를 상징하고,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 사이에 “소금 언약”을 맺는다(레 2:13; 민 18:19; 대하 13:5). 성경 시대 당시에 소금이 들어간 음식을 먹기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초대한 자에 대하여 가졌던 모든 원한을 버려 버렸고, 이 상호 행위로써 양측은 상호간의 충성을 다짐하였다. 이 소금을 친 부분, 즉 제단의 “음식”(레 3:11, 16; 21:17, 난외주)은 “소멸하는 불”에 의하여 “먹혀 버렸”거나 삼키어져 버렸다. 이것은 참석자들에게 하늘과의 친교 관계가 공고해졌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다. (366.4)
 하나님께 바쳐야 하였던 제물의 모든 부분
 “머리”(로쉬<rosh>), “기름”(켈렌<cheleb>)이나 파데르<pader>), “다리”(카라<kar’a>), 그리고 “내장”(케렙<qereb>)은 불로 살리워졌다(레 1:8, 19). (366.5)
 “머리”는 인간의 의자와 사상, 지성력(비교 창 3:15), 계획력과 계획한 것을 행하는 능력, 하나님의 왕권과 “지배”나 탁월성을 나타낸다. (366.6)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엡 4:15; 5:22~33). 또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머리”이시다(고전 11:3). (367.1)
 “다리”는 인간의 매일 행동거지, 삶의 방향,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이동하는 능력을 뜻한다. “다리”는 또 힘을 뜻하기도 한다(시 147:10; 비교 신 28:35). (367.2)
 “내장”에는 창자 이외에도 신장과 간(창 41:21, 난외주; 출 29:13, 22), 또 심장이 포함되는데, 이것은 내적인 생각과 애정을 뜻한다(시 5:9; 64:6). “내장”은 은밀한 바램과 야망을 뜻하고(욥 36:26), 생명력이 있는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왕상 17:21, 난외주). (367.3)
 “기름”은 내부 기관을 덮는 지방이다. 기름은 성경 시대에는 건강과 힘의 표징이었다. “땅의 지방” 혹은 “땅의 기름”(창 27:28, 39), “밀의 기름”(시 147:14; 81:16; 신 32:14; 개역 성경에는 ‘아름다운 밀’로 번역되었음) 같은 표현들은 최상의 질을 뜻한다. 다윗이 “용사의 기름”이라는 문구(삼하 1:22)를 사용할 때 사울과 요나단에게 있는 왕권의 힘과 위엄을 뜻하였다. 기름이나 희생에서 “제일 좋은” 부분은 히브리어 ‘기름’을 번역한 것이다(민 18:12, 29, 난외주). “기름”은 복지(야카르<yaqar>, 비교 사 43:24)나 부유함이라는 함축적인 의미를 더한다. “어린양의 기름”“귀중함”을 뜻한다(시 37:20, 난외주).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는 것” 혹은 그 “아름다운 것”을 먹는 것(창 45:18)은 주어진 제일 좋은 것을 즐긴다는 의미이었다. “기름”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장들에게까지 주신 온전한 영적 축복(렘 31:14)과 성소로부터 확장되어 나온 풍부한 계시(시 36:8; 비교 시 63:5; 롬 11:17)를 뜻한다. (367.4)
 제물의 이 네 귀한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성별된 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그분의 모본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지체를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시키라고 명하고 있다. 구세주의 가르침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헌신에 요약되어 있다. 번제의 대 원형(Antitypical)이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께 드렸고(엡 5:2),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요일 4:17). (3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