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도래하셨을 때 모든 사람이 그분의 오심을 목격했는데, 그 이유는 신자들에게 부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 외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행 2:2-11). 그 사건의 신학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에 반응하여 매우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설명이 주어졌다.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13절).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의 부어짐이라는 기적적인 현상으로 그 기이한 사건을 변증하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역사적 성취에 필요한 단계로 설명했다(23, 24절). 베드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32-33절). 또한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보좌 우편에 좌정하신 사건(참조 VII. B. 4), 곧 십자가로 승리한 후 그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한 사건을 언급했다(마 28:18; 벧전 3:22). (165.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수행되는 간구 사역에 직접 관여해야 했기 때문에(히 8:1; 참조 성소 II, III), 하나님께서 지상에 인격적으로 계속 임재하기 위해서는 신성의 제3위인 성령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주어져야 했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나타난 새로운 국면은 성령께서 구약에서처럼 계속하여 수행하시는 특정한 구속 사역과 관련지어 보아서는 안 되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에서의 그분의 간구 사역 및 주되심과 관련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자신의 대표자일 뿐 아니라(요 16:23, 14), 그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냈다는 점에서(참조 VII. B. 4) 아버지의 대표자(요 14:16, 17)였음을 지적함으로써 삼위 하나님께서 구원과 관련된 활동을 수행하실 때 나타나는 특징인 조화와 연합을 강조하셨다.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롬 6:11, 23; 8:1, 39; 9:1; 고전 1:4; 3:1; 고후 2:17) 및 “성령 안에서”(롬 9:1; 14:17; 참조 골 1:8)라는 전문적인 용어들은 사실상 동의어라고 말할수 있다. (166.1)
 d.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옴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왔다는 것(요 15:26; 14:16, 26; 행 2:33)은 존재론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와 희생과 봉사의 대표자로 성령을 오순절에 보낸 것과 결부된 신성의 내적인 활동을 가리키는 역사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나왔다는 것은 전통적인 신학이 믿은 것처럼 삼위일체적인 존재를 구성하기 위한 내적인 과정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성령이 아버지에게서 나왔는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왔는지 아니면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나왔는지에 대한 물음은, 성경에 나타나는 “아버지에게서 난”이나 “나옴” 같은 표현을 삼위 하나님의 본질을 구성하는 내적인 과정을 일컫는 말로 오해하면서 그 타당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말하면, 구원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역사적 활동으로 수행된다는 점에서 성령의 나옴은 삼위 하나님의 구성이 아니라 그 삶(활동)에 속한 것이다. (166.2)
 아버지와 아들이 교회에 베푸신 선물인 오순절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와 인간의 마음에 임한 성령의 인격적 임재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도행전은 특정한 시간 곧 오순절 날에 성령이 역사 가운데 임했다는 것을 각별하게 강조한다. 그날 및 성령이 교회의 특별한 지역들에 오신 다른 날들에 성령의 부어주심에는 표적과 기사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성령이 교회에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임할 필요는 없다. 오순절은 특별했다. 교회에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때 이래로 신성의 제3위인 성령은 그리스도교회에 그리스도 안에 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 임재해 있다(행 2:38). 그러므로 교회는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처럼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를 위해서(행 1:13, 14)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에 마음을 열고 굴복하도록 기도함으로 그분의 약속된 임재와 능력(참조 VII. C. 6)이 교회의 삶과 선교에 나타나게 해야한다. (166.3)
 3. 성령의 신성
 성령의 신성은 다양한 본문에서 입증된다. 성령은 신성을 지닌 분으로 묘사된다. 그는 “거룩한” 분(마 1:20), “우리 하나님의 성령”(고전 6:11), “예수의 영”(행 16:7)이라고 일컬어진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대면했을 때 성령의 신성과 신격에 대해 언급했다. 아나니아는 성령께 거짓말을 했고 동시에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행 5: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요 14:16)로 소개하셨다. 헬라어 알로스(“다른”)가 같은 “종류 가운데서 또 다른 것”을 의미하므로 성령은 한 분의 위격이신 그리스도와 같은 종류의 신성에 속한다는 말이다. (166.4)
 하나님 가운데 제3위이신 성령의 신성은 그분이 전지성(고전 2:10, 11), 진리(요일 5:7), 생명(롬 8:2), 지혜(고전 2:11), 능력(눅 1:35; 롬 15:19), 영원성(히 9:14) 같은 신적인 특성을 지닌 분으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추가적으로 확증된다 신약은 성령을, 선지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고(행 28:25) 성경의 영감(벧후 1:21; 참조 VII. C. 5. A), 조명(요 15:26; 참조 VII. C. 5. B), 중생(요 3:7, 8; 롬 8:11; 딛 3:5), 거룩함(살후 2:13; 벧전 1:2)을 주시는 신적인 행동을 수행하는 분으로 언급함으로써 성령의 신성을 강조한다. 게다가 성령의 신성은 예수가 그런 것처럼 성령도 구약의 야훼와 동일시되면서 강하게 확증된다. 사도행전 28:25-27히브리서 3:7-9은 구약에서 야훼의 말인 것으로 명시된 진술들(사 6:8-10; 시 95:7-11;참조 출 16:1-8; 신 1:34-36)을 성령의 직접적인 활동에 적용한다. 신약에서 바울은 동일한 적용을 한다 “주[야훼]는 영[성령]이시니”(고후 3:17). 신약의 기자들이 성령을 하나님으로 이해한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166.5)
 4. 성령의 위격
 그리스도교 신학은 성령의 본질과 그의 구원 활동을 언급하는 성경의 정보를 연구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곤 했다. 이런 정황에서 성령은 고유하게 아버지의 위격에 속하는 거룩한 에너지나 능력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성령은 그 개체성과 위격이 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해석은 몇몇 성경 본문에서 뒷받침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들은 위격적인 실재를 가리키지만, 성령은 전적으로 그런 것 같진 않아 보인다. 혤라어 프뉴마(성령, 바람, 영)의 성이 중성이고, 따라서 그 점이 비위격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성경이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눅 3:22)를 띤 것으로 말하고 성령을 바람(요 3:8)이나 물(요 7:37-39)이나 불(행 2:3)에 비유한다는 사실 또한 성령이 아버지나 아들처럼 위격을 지니지 않는 존재라는 피상적이고 오도된 개념을 낳는데 일조한다. 마지막으로, 남녀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시는 은사로서의 성령(행 2:38; 10:45)을 말하는 성경의 진술(고전 12:4-11; 엡 4:11; 참조 VII. C. 5. 6)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 역시 성령을 한 분의 위격보다는“하나님의 에너지”로 잘못 생각하게 한 원인이 된다. 그런 성경 본문들은 성령이 비위격적인 존재임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령을 비위격적인 거룩한 에너지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성령이 위격적인 존재인지 아니면 비위격적인 존재인지를 결정하려면 명시적인 증거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 (167.1)
 신약은 성령의 위격적인 본질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신약의 기자들이 “성령,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프뉴마의 성을 바꾸진 않지만, 구문적인 파격이 생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령의 중성 형태를 대신하여 남성 대명사(He)를 사용하기도 한다(요 14:26; 15:26; 16:3). 게다가 신약은 성령의 위격적인 본질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는 다양한 특성을 성령께 부여한다. 이런 특성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언급할 수 있다. 지성과 지식(요 14:26; 고전 12:11), 감정(엡 4:30), 판단(행 15:28). 또한 성령께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행 5:3, 4) 그분을 거역할 수도 있고(7:51), 그분께 대항하여 죄를 지을 수도 있다(마 12:31; 막 3:29). 더 나아가 신약은 위격을 지니신 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성령을 묘사한다. 그분은 말씀하고(행 8:29) 가르치고(눅 12:12) 계시하고(눅 2:26) 증언하고(행 20:33) 마음을 살피고(고전 2:10, 11) 보내고(행 13:2) 인도하고(8:29; 11:12) 장래 일을 알리고(요 16:13)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신다(롬 8:15, 16). 더욱이 예수께서 성령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또 다른 보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표현(요 14:16)은 성령이 신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위격을 지니신 존재임을 나타낸다. 같은 맥락에서, 성령이 신자들의 구원을 위해 행하는 간구의 역할(롬 8:26)도 위격을 지닌 존재만이 맡으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령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일(요 16:14)도 에너지나 능력이 아니라 위격을 가진 존재에 의해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약의 기자들이 성령을 위격을 지닌 신적인 존재로 이해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67.2)
 성령을 위격을 지닌 분으로 이해하는 성경적 관점을 분명하게 파악할 때에만, 한 하나님의 복수성을 말하는 구약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밝힌 신약의 개념이 충분히 드러난다. 위에서 제시한 성경적 증거를 근거로 보면,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피할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 될 부분이 된다. 그러나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인 접근을 하기 전에 신성의 제 3위의 사역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168.1)
 5. 성령의 구원 사역
 신약은 영원한 하나님의 제3위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그리스도 및 십자가와 하늘 성소에서의 그분의 사역을 대표하는 자로 성령을 이해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에 대한 사변적인 통찰로서가 아니라 그분의 구원 사역의 관점에서 제시되고 통합된다. (168.2)
 a. 계시—영감
 성경이 “성령의 검”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에 성경이 발생한과정과성령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계시, 곧 성경에서 발견되는 진리나 개념이나 정보 등이 기원된 과정에 성령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겔 8:3; 11:1, 24; 37:1; 43:5; 막 12:36; 고전 2:11; 계 21:10). 또한 성령은 영감, 곧 선지자들이 이런 소통을 공유하도록 하는 과정에도 참여했다(삼하 23:2; 대하 24:20; 겔 11:5; 슥 7:12; 마 22:43; 벧후 1:21). 오순절 이후 성령의 계시—영감 사역은 후에 신약으로 기록된 내용,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위격과 사업에 계시된 진리를 적절하게 이해하도록 제자들을 이끄는 데 집중되었다(요 16:12-15). 성령을 신자들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참조 VII. C. 5. C)은 성경 전체에 계시된 진리들과 위배되게 또는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계시—영감 III, IV). (168.3)
 b. 조명
 예수님에 따르면, 성령은 성경을 계시하고 그것에 영감을 주는 데 참여할 뿐 아니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 데(요 16:8)도 관여하신다. 진리가 구두로나 기록된 말씀 곧 이론적으로 표현된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남녀들의 마음에 기록되어야 한다(렘 31:33; 히 8:10). 인간의 마음에 진리를 기록하는 일은 계시—영감(참조 VII. C. 5. A), 조명, 내주(VII. C. 5.a)와 관련된 성령의 사역이다(고후 3:3). 하나님은 죄인의 구원과 세상의 구속에 필요한 거룩한 빛(지식)이 인류에게 전달되도록(시 119:105) 성령을 통해 성경을 고안하셨다. 그러나 성경이 단지 죽은 문자가 아니라 빛이 되도록 남녀들은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130절). 그러나 빛을 이해하는 것은 빛을 소유하는 것을 전제한다.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시 36:9). 하나님을 말씀의 저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베일(고후 3:13, 14; 참조 사 6:9, 10; 행 28:26, 27)이 마음을 가려 하님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눅 11:34, 35). 타락한 이후로 남녀들은 그들 자신 속에 빛이 없다(행 26:18; 고후 4:3, 4; 참조 요 1:5). 성령이 마음에서 어두움의 베일을 제거함으로(고후 3:17, 18) 빛이 비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메시아에게 특별하게 주어진 명철과 지식의 영(사 11:2)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을 지도하며(엡 1:17-23),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선물 가운데 하나이다(고전 2:12).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은 조명과 관련되지만 더 나아가 신자들의 마음에 성령이 내주하는 것을 요구한다. (168.4)
 c. 내주(內住)
 죄인이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믿음과 고백과 회개로써 하나님께 마음을 열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시작된다(계 3:20). 하나님을 마음에 받들임으로 신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최초의 행위는 너무도 극적이어서 예수께서는 그것을 성령으로 거듭난 것(새로운 탄생)으로 일컫는다(요 3:3-8) . 거듭남의 경험을 통해 세워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의 내주, 충만(눅 1:67; 행 2:4; 4:31; 9:17; 13:52) 즉 성령 침례(마 3:11; 막 1:8; 눅 3:16; 행1:5; 11:16)로 알려진다.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이런 친밀한 관계를 마음의 할례(롬 2:29)로써만이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너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롬 8:29;참조 엡 2:22)으로도 묘사한다. 따라서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 인간 존재 안의 하나님의 내주에 관한 성경의 관점은 다음의 맥락 안에서 그것을 볼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의 성령(참조 VII. C. 2. c; VII, C. 5. D)의 역사적(참조 VI. D;VII. C. 2) 및 위격적(참조 VII. C. 4) 본질

   (2) 인간에 대한 성경의 이해는 인간 존재 안에 무시간적인 영원한(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참조 인간론 I. E).

 따라서 성령을 “거룩한(하나님의) 에너지” 즉 영혼이라는 영원한 실체 속에 스며들어 인간의 본질을 신성하게 만드는 어떤 것으로 볼 수 없다. 그보다 성령의 내주는 인격적 및 역적 관계라는 양태 안에서 이해돼야 한다(요일 4:13). 이런 관계적 양태 안에서 성령이 인간 존재 “안에” 거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성령의 내주로 말미암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롬 8:29). 거룩한 위격으로서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이므로 그의 내주는 신자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불러온다. 따라서 신자 안의 성령의 내주는 곧 그리스도의 내주이다. (16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