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분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분의 내재적 거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가운데 거한 아들의 역사적 임재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이 한 위격으로서의 아들 하나님과 구분되는 위격임을 나타내 주는 계시가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 신약 전반에 걸쳐 이런 진리가 다른 방식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 중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절로 자주 나타나는 이위일체적인 공식(tormula)이다. (162.2)
 이위일체적인 공식의 전형적인 표현이 고린도전서 8:6에 나온다.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얼핏 보면, 이 공식은 하나님이라 일컬어진 아버지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외견상 아들은 종속적인 지위에 두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신약의 가르침(VII. A. 1)을 신약의 “주”(Lord)라는 칭호가 구약의 “야훼”에 해당한다는 사실과 연관 지어 보면, 사실상 이 공식이 동등한 두 위격을 나란히 놓고 있음을 알수 있다. 아들 하나님의 위격을 일컫기 위해 “주”라는 칭호를 선택한 것은 구원의 계획을 직접적으로, 역사적으로 성취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위를 위임한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분명하다(참조 VII. B. 4). 고린도전서 8:6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와 관계된 방식을 평행대구적으로 표현한다. 아버지는 기원과 궁극으로 제시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우리의 존재를 이룬 분으로 제시된다 이런 평행대구적인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활동을 드러내면서 이들의 동등한 신적인 위치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공식은 이위일체적인 양태로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을 제시하는데, 여기에는 개체적인 복수성 및 동등한 두 위격 간의 구체적인 관계가 포함된다. (162.3)
 이 공식은 사소한 변형은 있지만 신약의 편지들의 서언에 사용된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3; 갈 1:3; 엡 1:2, 3; 빌 1:2; 살전 1:1, 3; 살후 1:2; 딤전 1:2; 딤후1:2; 몬 3; 벧전 1:3). 이 공식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경우,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생긴 하나님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 및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 자신의 증언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때때로 이 공식은 그것의 신학적 문맥 속으로 통합된다. 예컨대, 에베소서를 마무리 짓는 바울의 말은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신자들에게 사랑과 믿음을 베푸신다고 말함으로(엡 6:23; 참조 살전 3:11; 살후 2:16) 행동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함으로 두 위격이 구속 사업을 실행하는 행동의 공통성을 부각시킨다(참조 요일 1:3; 2:24;요이 9). 다른 경우에는 이 공식이 구속을 이루기 위한 아버지와 아들의 다른 역할을 표현하고 통합하는 데 사용된다(빌 2:11; 골 3:17; 살전 1:3; 3:13; 벧전 1:3). (162.4)
 신약의 기자들이 삼위 하나님 가운데 세 번째 위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왜 삼위일체적인 공식 대신 이위일체적인 공식을 사용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우선, 이위일체적인 공식과 삼위 일체적인 공식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보다는 양적인 차이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달리 말해, 신성 안에 복수성과단독성이 공존한다고 말할때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개념의 새로운 국면이 나타나는 것이다. 일단 이러한 공존을 발견하면, 이위일체적인 개념과 삼위일체적인 개념의 차이는 한 하나님의 개체적 복수성을 구성하는 분으로 신성의 제3위를 포함할 것인가 아니면 배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우리의 논의를 좁혀준다. 이뿐 아니라, 이위일체적인 공식은 신성의 제3위의 존재나 활동을 부정하기보다는 성육신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틀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약은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관한 이해를 다룬다. (163.1)
 이위일체적인 공식은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전제이다. 신약의 기자들이 수행하는 주된 과업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육신 및 그것이 신학 전체에 주는 함의를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위일체적인 공식이 전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다른 한편, 삼위일체적인 공식과 개념은 그리스도의 대표자인 성령을 통한그리스도의 부활 후 활동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필요한 전제로 나타난 것이다. 신약 기자들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면, 왜 삼위일체적인 공식이 덜 사용되었는지 설명할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온전하고 충분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라는 위격을 소개하신 후에야 드러나게 되었다. (163.2)
 C. 성령 하나님
 성경에 나타나는 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질은 성령 하나님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신성의 제3위인 성령에 관한 계시가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계시가 주어진 이후에 나오는데, 그것은 성령이 덜 중요하다거나 그분에 관한 계시가 주어진 이후에야 그가 구속 사업에 관여했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한 하나님과 그 개체적 복수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주의 깊이 고찰해야 한다. (163.3)
 1. 그리스도의 선포
 성령 하나님이 창세기(1:2; 6:3)에서 시작하여 성경에 계속 나오지만, 하나님의 복수성에 아버지와 아들의 위격뿐 아니라 세 번째 위격인 성령도 포함된다는 명시적인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된다. 신성의 제3위의 존재 및 그분이 구속 사업에서 맡은 역할에 관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떠나시는 것에 대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자 하실 때 그분에 의해 주어졌다(요 7:3; 14:1-3). 요한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장막절, 곧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설명하시면서 신자들의 맘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을 약속하실 때 성령의 위격과 역사적 도래를 내비치셨다(요 7:38, 3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 몇 시간 전에 성령의 도래를 분명하게 알리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17;참조 16:4-7, 13). (163.4)
 예수께서는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의 주의를 성령께로 돌리셨다(눅 24:49; 행 1:4, 5, 8). 성령이 위격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때 계시되었다. 왜냐하면 승천 후에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지상과 하늘 성소에서(히 8:1, 2) 동시에 계속될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성령이 위격으로 계시되어야 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본질에 관한 계시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변적으로 계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속적 활동을 이해하도록 하려고 드러난 것이다. (163.5)
 2. 오순절 성령 강림
 아들이 세상에 역사적으로 도래한 것처럼 성령은 교회에 역사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적인 임재의 양태는 아들이 세상에 임한 양태와 다르다. 성령의 도래는 예수의 성육신처럼 인성을 취한 것과 관련되지 않는다. 아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성육하신 양태는 그분의 신적인 임재를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한 것이었지만, 성령 하나님이 세상에 임재한 양태는 모든 이에게 열려있는 것이었다. 이런 현저한 차이가 바로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오실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요 16:7)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164.1)
 성령이 교회에 역사적으로 도래한 일은 부활 후 오순절에 발생했다. 성령이 교회에 도래한 일이 오순절날에 발생했다는 점은 신학적으로 별 의의가 없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 구체적인 시점에 관해 특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164.2)
 a. 표상학적인 배경
 구약에서 유월절과 오순절은 밀접하게 연관된 절기였다. 두 절기 모두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중요한 국면들을 기념하고 예표했다. 유월절(레 23:5; 민 28:16; 신 16:1-8)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일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자유의 원천으로 기념하는 절기였다(신 16:1, 3, 6). 오순절 또는 칠칠절(출 23:16; 34:22; 레 23:15-222; 민 28:26-31; 신 16:9-12)은 하나님을 모든 좋은 선물의 원천으로 기념하는 절기였다. 칠칠절 또는 오순절이라는 명칭은 유월절로부터 50일의 간격이 있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가리킨다(레 23:15, 16; 참조 6BC 133, 134). 유월절과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이 예수의 사명(마 2:15; 참조 호 11:1)과 십자가의 죽음(고전 5:7)을 가리키는 표상이었던 것처럼, 오순절과 시내 언약은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를 가리키는 표상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풀어진 그분의 좋은 선물로 이해된 시내 언약의 원형이 될 것이다. 시내 언약의 뚜렷한 기능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속(救噴)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성령의 도래는 그런 목적을 구체성과 친밀성이라는 새롭고도 놀라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역사적인 도래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강조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나타내신 구속 사역과 성령의 계시 및 그분의 역사적인 도래 사이에는 단절보다는 오히려 분명한 표상학적인 연계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는 뜻은 아니고, 과거의 계시에서 드러나지 않는 새로운 국면의 계시라는 의미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행위에 관한 지식과 경험의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간다. (164.3)
 b.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
 성령이 구약에서는 한분의 위격으로 명시되지 않았다는 사실(창 1:2)이 그분이 오순절에 역사적으로 소개되기 전에는 한분의 위격으로 존재하거나 활동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구약은 성령을 아들과 다른 위격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이지만 “하나님의 영”이라는 일반적인 명칭을 언급하는 구약의 몇몇 본문들이 고유하게 성령께 속한 활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분명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영적 선물을 주는 것은 구약에서 흔히 하나님의 영과 결부된 활동이다(출 31:3; 35:31; 민 11:25, 29; 24:2; 27:18; 삿 3:10; 6:34; 11:29; 1 3:25; 14:6, 19; 15:14; 삼상 10:6, 10; 1 6:13; 19:20, 23; 대하 15:1; 20:14; 24:20).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의 마음에 내주한다는 개념이 구약에 있지만 그다지 빈번하게 나타나진 않는다. 시내 언약에 따르면, 종교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깊은 경험이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훼를 섬기고”(신 10:12). 그래서 바울은 외적인 의식을 고수함으로써가 아니라신명기 10:16에 따라 마음에 진정한 할례를 행한 자로 “이면적 유대인[참 유대인]”을 묘사한 것이다(롬 2:28, 29. 다윗도 마음의 내적인 변화란 하나님 자신만이 이루실 수 있는 새로운 창조임을 인식하였다(시 51:10). 사울은 하나님의 영께 선물을 받았을 뿐 아니라 야훼의 영이 그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삼상 10:6, 9). 포로 중에 있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그분의 영을 두심으로 영적인 부흥이 올 것을 기대하였다(겔 36:26, 27; 37:1-14). (164.4)
 그러므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내적존재에 임한 하나님의 내주와 결부되기도 한다(사 57:15; 겔 11:19; 18:31). 이런 근거로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적/인격적 도래 이전에도 그들이 이미 성령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신 것이다(요 14:17). 성령께서 이미 활동하고 은사들을 주시고 신자들의 맘속에 내주하고 계셨다면, 신약에서 성령의 봉사의 새로운 국면이 무엇인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165.1)
 c.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의 새로운 국면
 성령에 관한 신약의 계시가 보여 주는 한 가지 분명한 새로운 측면은 그가 아버지 및 아들과 구별되는 한분의 위격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참조 VII. C. 4). 그러나 이런 변화가 그분의 구원 활동은 아니고, 그분의 개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만 영향을 준다.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은 구약의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영이 관여하는 세 가지 영역과 동일한 영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에 나타난 성령의 새로운 국면은 그리스도의 대표자로서의 그분의 새로운 역할에서 찾아야 한다. 성령을 가리키는 예수의 표상학적인 언급에 대한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요 7:37-39), 성령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적 도래 및 그분의 구속적인 임무는 본질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및 승천과 연관된다. 요한은 예수께서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9)라고 말함으로써 예수의 표상을 해석한다. 따라서 요한에 의하면, 아들의 죽음과 영광 받으심은 역사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16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