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4 부 안식일과 일요일 제 8장 기독교에서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준수로 교체된 경위1
 14일 유월절을 배척하려는 반(反)유대적 동기는 그 때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총회의 서한에서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 서한에서 황제는 촉구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밉쌀스러운 유대인들과 공유하는 것이 하나도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두가 하나같이 단결하여 유대인들의 위증적 범죄 행동에 참가하는 일을 전적으로 피하기 위하여” 로마 교회가 옹호하고 있는 부활절 일요일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47 (431.1)
 로마교회의특별한위상이일요일주일제도의수립에끼친영향.AD 2세기의 로마교회는 일요일 주일이나 부활절 일요일 같은 새로운 절기를 세계 교회에 도입하고 정착시킬 만한 충분한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는가. 역사적인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의 로마교회는 추호의 의심도 없이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을 전체 세계교회에 행사하고 있었다. 아래에 그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겠다. (431.2)
 이그나티우스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서두에서 로마 교회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를 장황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가 다른 교회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용한 경의의 표현들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의 표현에 비하면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48 그는 기록하기를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수부에 위치하며 하나님께 귀중한 교회이고 명예와 축하와 찬양과 성공과 성화의 가치를 가진 교회이며 사랑으로 다스리며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키며 아버지의 이름을 지닌 교회”라 하였다.49 (431.3)
 “사랑으로 다스린다”는 문구는 상당히 학구적으로 토론이 되어 왔던 중요한 주제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랑 즉 “아가페”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였는데 그는 아가페의 사랑을 구현하고 있는 기독교 공동체를 지칭하여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50 트랄 교인들(Trallians)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서머나 사람들과 예베소 사람들의 사랑이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하였다(13:1). 따라서 이그나티우스가 로마교회에게 사랑의 지위(율법의 지위가 아니고)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로마교회가 다른 교회들의 안녕과 복지에 대해 주도적인 관심을 가진 교회라는 뜻이었다, 다른 교회들의 복지에 대한 로마교회의 관심에 대해서는 고린도교회의 감독 디오니시우스가 로마의 감독 소테르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51 기독교 역사가 불행하게 된 것은 로마교회의 시작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로마교회의 불행은 그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는 사랑의 직책으로 봉사했었던 로마교회가 그 이후의 역사에서 점점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정신을 상실하고 대신에 법률적인 주장에 기초를 둔 법률의 머리로 전체 세계교회에게 행세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중세교회의 가짜이시돌법령집들(pseudo-Isidorian Decretals)은 로마교회가 교황권의 수장권(popal supremacy)을 옹호하기 위하여 사용한 법률적인 문서들이다. (432.1)
 이그나티우스가 로마교회의 사랑의 직책을 인정한 사실은 그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안디옥 교회의 고아와 같은 처지를 벗어나기 위하여 로마교회의 도움을 간청한 부분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호소하기를 “여러분들의 기도에서 시리아교회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 교회는 이 사람 대신에 하나님을 그들의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여러분들의 사랑과 합하여 그 교회를 감찰하실 것입니다”(9:1)라고 하였다. 이그타니우스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그의 안디옥 교회를 위해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그 대신에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그나티우스 자신이 개인적으로 친분 관계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던 로마교회의 사람들에게 호소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에게 전체 세계교회를 위해 목자 같은 지도자의 역할을 기대했던 것이다. (433.1)
 리용의 감독 이레나이우스(lrenaeus)도 그의 이단 반박론에서 이단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저 영광스러운 두 사도 곧 베드로와 바울에 의하여 설립되고 조직된, 그리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래되었으며 전체 세계에 알려진” 로마교회에 의하여 특별한 방법으로 보존되어 내려온 사도적 전통에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각처에 있는 교회들에 의해서도 사도적 전통이 계속적으로 보존되어 왔으나 “로마교회는 월등한 우월성(potentior principalitas)을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교회들은 로마교회의 전통에 일치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52 이 진술 속에는 분명히 몇 가지 부정확한 사실들이 주장되었다. 로마교회는 예루살렘교회보다 늦게 설립되었으므로 분명히 “가장 오래된”(antiguissima) 교회가 아니었다. 또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창립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로마교회의 “월등한 우월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런 전설적인 주장들이 로마교회에 의해 발전되었던 것이다. (433.2)
 로마교회의 권위에 대한 현저한 본보기의 하나는 로마의 감독 빅토르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강요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로마의 감독 빅토르는 다른 지방에도 부활절 일요일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해당지역 교회들에게 지방 총회를 소집토록 요구하였다(196년경). 이 때에 이전에 로마의 부활절을 반대했던 아시아 교회의 감독들까지도 빅토르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로마의 감독 빅토르를 예우했기 때문이었을까? 폴리크라테스(Polycrates)의 “나는 겁주는 말로 겁먹지 않는다”고 한 항의야말로 그 당시 빅토르가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로마의 부활절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53 이것은 아시아 교회의 감독들이 부활절 일요일의 채택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빅토르가 취한 단호한 조치에 의해서 잘 입증되고 있다. 빅토르는 아시아의 감독들에게 “편지들을 보내어 그 곳의 형제들에게 전면적인 파문을 선포했던 것이다”.54 이것은 로마교회의 교리와 조직을 전체 기독교의 전통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역사적 과정의 시초였다.55 당시 로마교회가 자신의 관습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하기 위하여 취한 징계 조치들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그 동안 거의 인식되지 못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감독 빅토르의 조치들은 “신학적인 토론이나 철학적 사색”에 기여했다기 보다는 로마교회의 권력을 강화하고 증가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56 로마교회의 영향력이 중세 역사에서 나타나는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 빅토르의 감독 재임 기간이었다.57 (434.1)
 위에서 언급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은 로마교회가 이미 2세기에 기독교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 부활절 일요일과 매 주간의 일요일 예배 같은 새로운 관습을 보급시킬 정도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58 기독교 세계가 이같은 새로운 절기들을 채택한 배경에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 때까지 지속되왔던바 유대인들과의 친화적인 관계를 단절토록 압박한 로마제국의 반(反) 유대적인 군사, 정치, 문화상의 정책들이 작용하였고 다른 한쪽으로는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처음서부터 내재해 있던 적대 관계가 작용하였다. 로마교회는 유대인들과 갈라서는 경험을 동방교회의 교인들보다 먼저 치렀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또 비록 일부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으나 기독교 세계에 폭넓게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요일과 부활절 일요일을 확산시키는 일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다. 그리고 일요일 예배의 제도는 2세기 초반에 기독교 세계에 처음으로 도입된 것 같다. 이 때 그리스도인들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반 유대적인 탄압통치(135년)로 말미암아 가장 특징적인 유대절기라 할 수 있는 유월절과 안식일을 포기하고 자신들을 유대인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었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학적인 노력과 실천적인 방법을 모두 사용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불충을 나타내기 위한 표징으로 유대인들에게 부과된 모세의 율법이라고 악평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은 유대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안식일에는 금식하는 일 이외의 어떤 종교행사도 치르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던 것이다. (435.1)
 5. 태양 숭배와 일요일의 기원.
 앞에서 간략하게 조사한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인 조건들은 왜 기독교가 안식일을 철폐하고 그 대신에 다른 날들 중에서 예배의 날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그 많은 날들 중에서 어찌하여 하필이면 일요일을 기독교의 새로운 예배일로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일요일에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과 관련된 설명이 있었지만 부활 사건 외에 일요일 자체의 위상과 관련된 설명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요일이 기독교의 예배일로 채택된 것은 로마세계 내에 태양신(神)의 숭배가 신속히 보급되어 일요일이 7일 주간의 첫 번째 서열로 격상된 사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유력한 주장이 제시되어 왔다. 아래에서는 이 주장의 역사적 타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 (436.1)
 태양숭배의 파급
 최근까지 이루어진 여러 연구들의 결과로 제2세기부터 무적의 태양신 숭배가 로마 시를 위시하여 제국 전체에 급속히 만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9 주후 1세기 말경까지 로마인들은 대체로 자신들의 고전적인 전통에 자주 등장하는 그들의 “고향 땅의 태양 곧 솔 인디게스(Sol Indiges)를 숭배하였다”.60 그러나 제2세기 부터는 동방종교인 “무적의 태양신”(Sol Invictus)이 두 가지의 다른 양상으로 로마 사회에 침투해 들어왔다. 즉 동방의 태양신은 비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미트라(Sol Invictus Mithra)이란 명칭으로 로마사회에 들어왔고 공식적으로는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Sol Invictus Elagabal)이란 명칭으로 로마에 들어왔다.61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의 생존기(150-230)에 로마의 대 경기장(circus maximus)은 “주로 태양신에게 바쳐진 것이었고 그 신전은 그 도시의 복판에 세워졌으며 그 신상은 신전의 지붕 꼭대기에 빛을 발하며 서 있었다. 창공에 위치하는 태양을 지붕 아래에 설치하는 것은 그 신상의 거룩한 영예를 정당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62 하드리아누스(117-138)는 자신의 주화에서 자신을 태양과 동일시하였으며 태양에게 콜로수스 네로니스(Collosus Neronis)를 바쳤는데 이것은 네로 황제가 자신을 머리 둘레에 일곱 가닥의 긴 빛줄기를 두른 태양신으로 표상하여 건립한 것이었다.63 하드리아누스는 이 큰 사상에서 네로의 형체만 뜯어내어 그 대신에 자신의 형체를 주조했던 것이다. (437.1)
 태양신 숭배가 대중의 사랑을 받아 로마제국 내에 급속히 파급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했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요인은 로마 사회가 황제와 태양신을 일치시켜 황제를 태양신으로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왕은 곧 태양이다”라는 부활절(Easter) 신학과 정치적인 배려들에 의하여 더욱 고취되었다.64 이스터(Easter) 솔 인빅투스 엘라가발 및 미트라와 관련을 갖고 있던 로마의 군단(軍團)들도 태양 종교를 서방세계에 확산시키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서 그 당시의 종교 혼합적인 세태를 들 수 있다. 종교적인 혼합 추세에서 여러 중요한 신들이 태양신에 동화되거나 통합되었다.65 (438.1)
 종교의 이러한 동화와 통합 과정의 뚜렷한 본보기가 칼라칼라 황제의(211~217)의 공공 목욕탕(mithraeum of the thermae)의 원주에 새겨져 있는 두 명문이다. 첫 번째 명문에는 “유일하다. 제우스, 세라피스, 헬리오스(즉 태양신), 우주의 무적의 주재이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66 우주의 무적의 신 태양신에게 제우스, 세라피스 신들이 동화되고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신들을 열렬히 신봉했던 칼라칼라 황제가 사망한 후에는 세라피스의 이름이 뜯겨나가고 그 대신에 미트라의 이름이 새겨졌다.67 두 번째 명문에는 “제우스, 헬리오스, 위대한 세라피스, 재산을 주시며 은혜롭게 들으시는 구세주, 무적의 미트라”에게 바치는 봉헌문이 포함되어 있다.68 미트라가 세라피스, 헬리오스, 제우스 등과 함께 나란히 열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분명히 이 모든 신들의 구현을 뜻하기 위하여 미트라의 이름이 제일 끝에 대표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되는 현상이다. 마르셀 사이몬에 의하면 태양신 헬리오스는 “각각 다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여러 신들을 하나로 흡수하고 통합하는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였다.69 (438.2)
 태양신의 인기와 태양신 숭배의 획기적인 파급은 주간의 요일 순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7일주간의 제도는 로마에서 주후 1세기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당시에도 주간의 7일들은 혹성의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본래 토성의 날(즉 토요일)은 주간의 첫째 날이었고 태양의 날(일요일)은 둘째 날이었다.70 그런데 로마세계에 태양신 숭배가 크게 신장되면서 2세기에는 태양의 날이 주간의 둘째 자리에서 첫째 자리로 올라섰다. 그 결과로 모든 날들의 위치가 한 자리씩 앞당겨졌고 그 대신 토요일은 제일 끝인 일곱째의 자리로 밀려났다. 그러나 언제 토성의 날이 칠 일 중 첫째되는 자리를 일요일에게 내어주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연대를 밝히기 어렵다. 주후 2세기 중엽에 이 같은 변화가 이미 발생했거나 발생 중이었다는 증거는 유명한 천문학자 베티우스 발렌스(Vettius Valens)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다. 주후 154년과 174년 사이에 편집된 그의 문집에서 그는 요일들과 관련된 혹성의 배열순서를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으로 기록하였다.71 이와 똑같은 형태의 요일 순서는 1633년 바덴(Baden)에서 가까운 웨팅겐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때로부터 콘스탄티누스 2세(340)의 시대까지의 여러 다른 연대들이 밝혀져 있는 주화들과 함께 발견된 술잔에도 나타나 있다.72 요일의 순서에서 태양의 날이 우세한 위치를 점유한 사실에 대한 부가적 확인은 순교자 유스티노스, 테르툴리아누스, 미트라교의 여러 신자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두 법령(321년 3월 3일, 7월 3일) 등의 진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73 (439.1)
 태양의 날이 토성의 날 곧 토요일을 첫째 날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사건이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 곧 토요일을 밀어내고 대신에 일요일 준수를 채택한 2세기 초에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는 태양의 날의 위상이 첫째 날로 높여진 사건이 유대인의 안식일을 폐하고 대신에 태양의 날을 매주의 예배일로 삼고자 하는 동기를 그리스도인들에게 부여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위의 가능성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실로서 다음의 역사적 사례들을 거론할 수 있다. 첫째로 태양신 숭배는 교부들이 빈번히 정죄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미신이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예술과 문학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태양의 상징을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2세기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던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태양이 떠오르는 동방을 향하여 기도하는 습관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이 파급되었다. 그리고 이교의 축제인 무적의 신 곧 태양신의 탄신일이 그리스도교의 크리스마스로 채택되었다.74 (440.1)
 그러나 우리는 좀더 직접적인 역사적 사실로서 2세기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일요일 준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태양의 날의 상징을 빈번히 사용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순교자 유스티노스(100~165)는 “하나님께서 흑암과 최초의 물질을 변형시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날이 첫째 날이기 때문에 ∙∙∙ 태양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유스티노스가 첫째 날에 빛이 창조된 사실과 태양의 날을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순전한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후에도 꼭같은 관련성을 주장하는 교부들이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세비우스(260~340)는 수차례에 걸쳐 일요일 예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빛의 모티브와 태양의 날의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시편주해에서 주장하기를 “여섯 날이 지나고 이 빛의 날, 첫째 날이며 태양의 참된 날인, 이 날에 우리가 다시 모일 때 우리는 거룩하고 영적인 안식일을 기념하는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하신 날은 세상 창조의 바로 이 날이었다. 의의 태양이 우리들의 영혼들 위에 높이 솟아오른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고 하였다.75 (441.1)
 이것들과 이 밖의 이와 유사한 증인들의 지적에 따르면 태양의 날이 선택된 것은 구속역사의 중요한 두 사건 곧 창조와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날이 제공하고 있는 적절한 시간과 효과적인 상징 때문이라고 한다. 히에로니무스(Jerome)는 이 이중적인 이유를 설명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 날을 이교도들이 태양의 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그것이 그렇다고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빛이 나타난 때도 그 날이며 의의 태양이 솟아 오른 날도 그 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76 (441.2)
 결론
 결론적으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안식일대신에 일요일 예배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외부적인 환경의 요청에 의하여 2세기 초엽 로마교회에서 일요일 예배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게 한 것과 동일한 정치, 사회적 요인들, 그리고 이교적인 요인들과 기독교적인 요인들이 상호 작용하여 일요일 예배의 관습이 그리스도교 안에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4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