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4 부 안식일과 일요일 제 8장 기독교에서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준수로 교체된 경위1
 로마제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제1차 반란(66-70) 때부터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하여 군사, 정치, 종교, 경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탄압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군사적인 탄압으로는 두 차례의 유대전쟁(70, 135)을 통해서 로마 군대가 팔레스타인에서만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을 살육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17 그리고 유대민족을 정치-종교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산헤드린제도와 대제사장직을 폐지시켰고 하드리아누스는 135년경부터 유대교의 관습 전체를 불법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안식일 준수를 가장 심하게 단속하였다.18 또 유대민족을 경제적으로 탄압하기 위하여 로마제국은 유대인들에게만 가해지는 차별적인 과세(the Fiscus judaicus)를 부과하였는데 이 세금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도입되어 도미아누스 황제(81-96)와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19 유대인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적인 조치가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그 수도인 로마 시에서 가장 가혹했다는 사실은 세네카(d. 65), 페르시우스(34-62), 페트로니우스(약 66년경), 퀸틸리아누스(35-100), 마르티알(40-104), 풀르타르크(46-119), 유베날(125년경), 타키투스(55-120)같은 그 시대의 저술가들이 남겨놓은 반(反) 유대적인 글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직업적인 활동의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낸 사람들인데 자신들의 글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인종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모욕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안식일의 준수와 할례를 가장 비열한 미신 행위의 본보기로 조롱하였다.20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 티투스(Titus)도 유대인들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적개심 때문에 자신이 결혼하고자 했던 유대인 여자 베레니케(Berenice: 소(小) 헤롯의 누이)에게까지도 마지못해(invitus) 로마를 떠나도록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21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유대인 문제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유대교에 대하여 더욱더 급진적인 탄압정책을 펴나감으로써 더욱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대체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기독교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차별과 대립 의식이 증대하여 갔으며 기독교 측의 이같은 차별 의식은 기독교 내에서 탈(脫) 유대주의와 유대인 경멸의 신학22을 표방하는 문필 활동을 부추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의 실제적인 결과로서 유대인의 특징적인 절기인 유월절과 안식일이 기독교 안에서 철폐되고 그 대신에 부활절 일요일과 일요일 주일 제도가 도입되었다. (419.1)
 로마교회와 안식일
 앞에서 부분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유월절이 부활절 일요일로 교체되고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 주일로 교체되는 일련의 과정이 시작된 진원지는 로마교회였다.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 대한 존경심을 철회하고 오직 일요일 예배만을 존중하도록 하기 위하여 신학적, 사회적, 예전적인 조치를 취했다. 신학적으로는 안식일의 보편적인 중요성을 박탈하고 대신에 안식일 계명을 일시적인 의의만을 가지고 있는 모세법의 하나로 격하시켰다 유스티노스(Justin Martyr)는 안식일을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고까지 비난하였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저지른 “배신 행위에 상응하는 처벌을 주시기 위하여 그들을 분기시키는 표를 주신 것”이 바로 안식일이라 하였다.23 (421.1)
 사회적으로는 그 때까지 유대 그리스도인 사회에서 축제와 희락의 날로 지켜져온 안식일을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는 침울한 날로 바꾸고자 하였다. 로마교회가 안식일을 금식일로 삼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은 칼리스투스(Callistus, 217-222),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6), 실베스터(Sylvestsr, 314-315), 인노센트 1세(401-410) 같은 로마교회의 역대 감독들과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요한 키시아누스(John Cassian 360-435) 같은 교부들의 역사적인 언급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24 토요일 금식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서만 권장되었던 것이 아니다. 로마 교회의 감독 실베스터가 확인하고 있듯이 “유대인에 대한 경멸, (exsecratione Judaeorum)과 그들의 안식일” 축제에 대한 경멸(destructiones ciborum)의 표시로서 권장되었던 것이다.25 금식으로 말미암는 비애와 배고픔의 고통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안식일을 지키러 나아가는” 일을 피하게 되었고 그 대신에 더 열심히, 더 기쁘게 일요일을 준수하게 되었다.26 예전적으로는 초대교회가 안식일을 종교적인 의의가 적은 날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로마교회는 안식일에 금식만을 장려하고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게 함으로써 교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에는 성찬에 참여하는 종교적 경험을 치를 수 없게 하였다.27 (421.2)
 매주일마다 안식일에 금식하는 제도는 본래 일 년에 한 번 맞이하는 부활절의 성(聖) 토요일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금식하던 관습이 매주일 단위로 확대 적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28 사실상 부활절 성 토요일에 금식하는 동기는 매주일의 토요일에 금식하는 동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의도 외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인들을 경멸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29 더욱이 교부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맞이하는 부활절 성 토요일의 금식과 일 주일에 한 번씩 맞이하는 토요일의 금식이 그 의미와 기능에 있어서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자주 기술하였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볼 때 부활절의 토요일에 금식하는 관습이나 매주 토요일에 금식하는 관습은 부활절 일요일 제도를 도입하는 시기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부활절 일요일을 기념하는 순서의 하나로 출발된 것 같다. 따라서 일요일 주일 제도의 기원을 알기 위해서는 부활절 일요일 제도의 발생 시기와 장소와 그 원인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422.1)
 로마교회와 부활절 일요일
 관련된 역사적 사료가 매우 빈곤할 뿐만 아니라 그 빈곤한 사료들이 제공하는 정보들의 해석마저도 서로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부활절 일요일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기독교회에 도입되었는지를 단언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260-340)는 AD 2세기에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기념하는 소아시아의 14일 교도(Quartodeciman)들과 부활절 일요일을 주장하는 로마 교회의 사이에 발생했던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30 니케아 총회(325)에서 공식화된 부활절 일요일 제도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유세비우스는 부활절 논쟁의 시말을 보고하는 글에서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이 “사도적 전통으로서 시작되어 현재까지 전수되었다”고 확인하고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들로부터” 내려온 제도라는 주장의 근거로 198년경에 로마 감독 빅토르의 요구로 소집되었던 팔레스틴 총회를 제시했다.31 유세비우스의 이같은 단언적 주장에 근거하여 아직도 일부 학자들이 일요일 예배가 사도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423.1)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설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진술의 모순성과 부정확성을 어렵지 않게 지적할 수가 있다. 예컨데 유세비우스는 서슴없이 부활절 일요일을 사도적 전통이라고 고집하면서도 니산월 14일의 유월절을 “옛 전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비록 그 날짜는 다르지만 14일 교도들까지도 기념하고 있는 유월절을 분명히 “부활의 신비”라고 정의하고 있다.32 그는 당시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지켜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시대 착오적인 진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비우스의 이러한 진술은 그가 로마의 감독 빅토르의 요구로 198년에 소집되었던 팔레스틴 총회에서 결의된 “교회법”을 요약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교회법에는 “주님의 부활의 신비”가 다른 날 말고 오직 주일인 일요일에만 기념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추측에 기초하여 “부활의 신비”가 이전에는 일요일이 아닌 다른 날에 기념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으니 대단히 잘못된 추측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았듯이 부활절 일요일과 14일 교도의 전통에 대한 최초의 언급들은 하나같이 유월절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로 기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데 테르툴리아누스(160-225)는 “주님의 유월절”“주님의 수난”이라고 표현하고 있다.33 이것이 당시의 지배적인 관점이었다는 것은 오리게네스(Origenes)가 초대교회가 유월절의 뜻을 “고난”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는 현상을 논박하기 위해서 “건너다”란 뜻의 히브리어 단어 페사(pesha)의 어원학적 의미에 호소한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34 (423.2)
 유세비우스의 편견은 14일 교도의 유월절 기원을 다룰 때 더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는 폴리크라테스와 이레나이우스의 중요한 두 서한을 소개하면서 매번 14일 교도의 전통을 “사도적 전통”이 아니라 “오래된 관습”“고대의 관습”으로 소개하였다.35 그는 “사도적 전통”이라는 표현을 부활절 일요일을 지칭할 때만 차별적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유세비우스가 두 번씩이나 인용했던 앞의 문서들 자체가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반면 오히려 14일 교도의 유월절 제도가 사도들에 의해 기원한 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36 (424.1)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을 옹호하고 있는 유세비우스는 부활절 일요일의 사도적 기원에 보탬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는 문서라면 무엇이든지 인용하였다. 그런데 유세비우스가 부활절 일요일을 주장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는 이레나이우스의 서한은 부활절 일요일이 사도시대에 기원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일요일 예배가 2세기 초반에 기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서한에서 이레나이우스는 로마 감독 빅토르를 향하여 로마의 감독들 중에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면서도 니산 14일을 유월절로 지키는 소아시아의 교회들과 화목하게 지냈던 “아니케투스”(Anicetus), 피우스(Pius), 히기누스(Hyginus), 텔레포루스(Telephorus), 식스투스(Sixtus) 같은 전임자들을 본받으라고 호소하였다. 이레나이우스는 식스투스(116-126)를 니산 14일 유월절을 지키지 않은 최초의 로마 감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언급을 토대로 하여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에서 기념되기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37 (425.1)
 식스투스 시대에 즈음해서 부활절 일요일이 로마교회에서 기원했다는 추측은 부활절 논쟁이 예루살렘으로부터 “할례받은 감독들이 추방당한 때 이후에 일어났다”고 한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의 주장에서도 확인되고 있다.38 이같은 추방령은 AD 135년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제2차 유대 반란을 분쇄한 다음에 내린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황제는 유대의 관습과 종교의식에 대해 가혹한 탄압 정책을 채택했다. 로마의 감독 식스투스는 이같은 탄압 조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매주의 안식일과 매년의 유월절과 같은 특징적인 유대교 절기를 매주의 일요일과 매년의 부활절 일요일로 교체시키는 절차를 밟았을 것이다. 몇 년후 유대계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예루살렘교회를 지도하게 된 희랍계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활절 일요일을 예루살렘교회에 도입하려 했을 때 이러한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던 예루살렘 교인들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다. (425.2)
 부활절 일요일의 엄밀한 기원 연대는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부활절 일요일의 발생지가 로마교회라는 사실은 학자들로부터 널리 수용되고 있다. 그리하여 “로마의 부활절”이라는 이름까지 발생하였다.39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의 진원지라는 사실은 모든 감독들에게 보낸 니케아 총회의 공한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인 서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문서들에서 로마교회는 부활절 일요일을 정착시키고 신장시키는 첫 번째의 본보기로 제시되고 있다. 로마교회의 역사적 위상 못지 않게 로마교회가 부활절 일요일 준수를 위해 노력해온 그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426.1)
 부활절 일요일의 파급
 무엇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니산월 14일의 유월절을 버리고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하게 하였는가? 안식일을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그들의 종교적 관습으로부터 분리하여 나오기 위해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피한 조처였는가?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14일 유월절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채택한 중요한 요인으로서 유대인과 유대교로부터 갈라서려는 그들의 의도를 꼽는다. 그리스도인들의 “반 유대적인 감정”은 170 년경에 멜리토가 남긴 유월절 설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설교는 다음과 같이 “유대인들에 의한 그리스도의 살해”란 관점에서 유월절을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 “너희는 이 사람을 큰 절기의 때에 죽였다. 하나님이 살해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에 죽임을 당했다. 오 무서운 살인이여 유례 없는 불의여”.40 이와 비슷한 반(反) 유대적 적대감은 3세기 초반에 나온 12사도의 교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2사도의 교훈“우리 형제들(즉 유대인들)이 불순종하여 ∙∙∙ 그 백성들이 그 날에 우리의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살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절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41 (426.2)
 이 문서들과 그 밖의 다른 문서들은 14일 유월절과 부활절 일요일의 신학에 다같이 반(反)유대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처음부터 14일 유월절 전통과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 사이에는 별다른 신학적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두 전통 모두에서 유월절의 준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금식과 축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의 유월절 논쟁은 유월절의 신학적인 의미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금식 기간의 길이와 축제의 날짜에 관한 것이었다. 이 두 전통은 다같이 반(反) 유대적 적대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는 각기 다른 두 전통의 지지자들 사이에 원만한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 유월절의 다음 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킨 그리스도인들이 니산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유대인들과의 단절과 차별화를 이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요인이 부활절 일요일 신앙의 확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427.1)
 2세기 후반에 이르러 부활절 일요일의 전통이 확산되자 14일 유월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과 부활절 일요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었던 우호적인 관계도 끝나게 되었다. 14일 교도들은 유대인의 날짜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는 방식에 있어서도 유대적인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이하였다.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아폴리나리스(Appllinaris)는 160년경에 남긴 증언에서 일부 14일 교도들이 자신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이 14일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양을 먹었고 그 큰 무교절의 날(니산15일)에 수난을 당했다는 주장으로 교회 안에 분란을 일으켰다”고 하였다.42 이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날짜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방법으로 즉 니산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먹음으로써 구약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14일 교도들은 주장하기를 그리스도인은 14일 유월절에 마땅히 유대인의 유월절 연회를 기념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해야 한다고 하였다.43 (428.1)
 이 논쟁은 시간과 함께 아시아의 경계 넘어 로마 제국의 다른 지역들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3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로마의 히폴리투스는 자신들의 교구에서까지 14일 교도들의 지지자들이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에 대하여 비판하는 글을 썼다.44 180년경에는 로마교회의 장로 블라스투스(Blastus)가 한 분파 집단의 지도자가 되어 14일 교도들의 주장을 옹호하였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주장에 따르면 블라스투스는 부활절을 지키고자 할 때 모세의 율법에 분부된 제14일 이외의 다른 날에 지켜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45 로마의 감독 빅토르(189-198)는 이처럼 로마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14일 교도들을 성공적으로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아시아 교회들 안에 강력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14일 유월절 전통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429.1)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빅토르는 아시아의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감독들에게까지 교회 총회를 소집하여 그들의 교구에 부활절 일요일의 신앙을 일반화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빅토르의 이와같은 호소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여러 곳에서 교회 총회가 소집되었고 그 대부분이 로마의 부활절을 지지하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이처럼 이 때에 아시아 지역에서 로마의 부활절을 광법위하게 수용하게 한 배경에는 로마의 감독인 빅토르의 위세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그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의 요인들이 작용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429.2)
 첫째로 지적할 수 있는 요인은 당시 아시아에 유대인식의 날짜 계산으로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할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방식으로 유월절 양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급진적인 14일 교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 무리들은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교회나 로마교회에서까지도 크게 분란을 야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여러 감독들은 유월절의 기념일을 유대인의 절기인 니산월 14일로부터 그 다음 날인 일요일로 옮긴다면 그리스도인 신앙이 유대화하는 경향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둘째 요인으로는 그리스도의 부활 신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부활절 일요일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절 일요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로 그 사건이 발생한 그 날들에 기념하는 것이 좋다는 인식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요인은 그 당시에 대량으로 나타난 반(反) 유대적 문헌들에 의하여 입증되고 있듯이 그리스도 교회와 유대 회당 사이의 넓어져 가는 간격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과 그들의 특징적인 절기인 안식일과 유월절로부터 등을 돌리도록 부추겼다는 사실이다. (430.1)
 로마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저버리고 대신에 일요일을 지키도록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던 사실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로마교회는 유대인의 유월절을 포기하고 부활절 일요일을 수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월일(The day of full moon)이 항상 춘분 이후에 떨어지도록 하고 부활절 일요일이 유대인들의 유월절과 겹쳐지지 않도록 고안된 새로운 역산법(曆算法)을 도입하였다. 새 역산법이 내포하고 있는 반(反) 유대적 동기는 키프리아누스가 243년에 쓴 유월절의 계산에 대하여란 논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 논문은 히폴리투스가 222년경에 편찬한 로마의 부활절 일람표에 들어있는 착오들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키프리아누스는 늘 새 계산법을 소개할 때마다 논문의 서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의 유월절 계산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우리는 신령한 학문을 사랑하며 그 학문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할 사항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한 때라도 마치 어떤 날이 유월절인지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유대인들을 쫓아 맹목과 어리석음 가운데서 행하거나 진리로부터 떠나 방황해야 할 필요가 없다”.46 (4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