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말세의 징조들의 목록을 소개하겠다고 몇 차례 약속한 바 있다. 이제 그 목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그 앞서 예수님께서 감람산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너무 많은 징조들을 열거하려 하지 않으셨던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191.1)
 그때 제자들은, 언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지를 알 수 있는 징조를 바랐었다(마 24: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이 같은 요청에 답하시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종말이 동시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열거하시기 보다는 각기 자신의 종교심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성품 개발을 통해 재림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누누히 강조하셨다. (19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몇 가지 징조들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는 “멸망의 가증한 것”(마 24:15) 즉 로마 군대(눅 21:20)가 예루살렘 성전을 에워싸는 것이 징조가 된다고 하셨다. 재림에 관련해서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징조로 삼으라 하셨다. 그리고 특별히 “인자의 징조”, “인자가 구름을 타고”, “번개의 번쩍임” 처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오는 것” 이야말로 최대의 징조가 된다고 하셨다(마 24:27, 30). (19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의 설교에서 1,260년/일 간의 “대 환난”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 24:29)고 하셨다. (191.4)
 여기에 나타난 현상적인 징조들의 목록은 요한계시록 6장 12~14절에 나타난 징조들의 목록과 대단히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요한의 목록이 더 길고 더 자세하다는 것 뿐이다. 요한은 말하기를 “내가 보니(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계 6:12~14)리라 하였다. (191.5)
 여러 성서 학자들은 이 두 목록을 비교한 끝에 그리스도께서 감람산 설교에서 말씀하신 징조들은 이미 뚜렷하게 성취되었으며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요한에게 알려 주신 징조들은 이미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하늘은 아직 종이 축처럼 말리지 않았으며 최종적인 지진도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밖의 예언들은 1755년 11월 ∙∙∙ 1일의 리스본 대지진과 1780년 5월 19일의 암흑일과 그 날에 달이 핏빛으로 변한 현상. 그리고 1833년 11월 13일 이른 아침에 일어난 사자 자리 유성군(流星群)의 엄청난 낙하 현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191.6)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1.7)
 리스본 대지진
 1755년 11월에 발생한 리스본의 대지진은 찬장의 그릇들이나 쏟아지는 그런 지진이 아니었다. 리스본 지진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지진의 하나로 연감과 백과 사전에 기록되어 있다. (191.8)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은 타구스 강가에 위치한 상업 도시이다. 1750년에는 부와 종교적인 번영을 자랑했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대사원이라 부를만한 큰 교회들이 40 개 이상이나 되었다. 종교 재판의 본부도 리스본에 있었다. (191.9)
 1755년 11월 1일은 만성절(萬聖節) 토요일이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날이 맑았다. 그런데 오전 9시 30분에 땅이 진동하면서 공공 건축물들이 무섭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191.10)
 잠시 후에는 가정집들과 교회들과 정부의 공공 건물들과 궁전들이 2분 동안 마치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석조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으며 대리석 대들보와 기둥들이 천 조각처럼 흩어지고 지붕들과 벽들이 주저 앉았다. 잠시 조용했다가 다시 세찬 강진이 뒤따랐다. 그 다음에는 사방을 빽빽히 에워싼 먼지 구름이 내리깔려 숨을 막히게 했다. 아침 나절 이었지만 석제 건축물들이 무너져 내려 솟구친 먼지 구름은 대낮을 칠흙처럼 어둡게 하였다. (192.1)
 어두움이 걷히었을 때는 도처에 피투성이가 되어, 팔이나 혹은 다리를 잃은 채 폐허 더미를 헤쳐 기어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 사방을 울부짖으며 헤맸다.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느라고 아우성이었다. 다친 개들과 말들이 서로 싸웠다. 사제들은 부지런히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상(苦像)을 들어 올렸다. 사제들 가운데도 심하게 다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2.2)
 폐허 더미로부터도 비명 소리가 들렸다. 여러 날에 걸쳐 이 같은 비명 소리는 계속되었다. 불길이 나풀거렸다. 일 주일에 걸친 대살륙이 시작되었다. 조수가 밀려와 타구스 강물을 범람시켜, 거리보다는 강가의 공지가 더 안전하다고 생각해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을 삼켰다. (192.3)
 일부 오래된 정보들—그 중에는 유명한 지리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경도 포함 되는데—의 보고에 의하면 처음 불길은 신비스럽게도 갈라진 땅 틈에서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이 보고는 놀랍게도 최근의 연구에 의해 과학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8 (192.4)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을까? 초기의 보고에는 1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했다. 근대의 연감이나 백과 사전에는 6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 와서는 그 수자가 15,000~1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192.5)
 이보다 더 많은 사상자들을 낸 지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리스본 지진은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리스본 대지진이라고 일컬을 만한 것이었다. 리스본 지진으로 리스본에서 4,000 마일의 거리에 있던 북아프리카 도시 페스(Fes)와 그 자매 도시인 메크네스(Meknes)가 무너져 내려 막대한 인명의 피해를 냈다. 다른 북아프리카 도시들과 멀리 스트라스부르크 같은 유럽의 도시들에서도 땅이 크게 흔들렸다. 1,500~2,000 마일이나 떨어진 스칸디 나비아의 강들과 호수까지 요동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약 4,000 마일의 거리에 있던 카리브 해(海)의 바르바도스 섬이 오후 6시에 해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 (192.6)
 이에 비해 1906년 북아메리카의 지층에서 발생한 지진은 샌프란시스코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400 마일 떨어진 거리에 있던 로스앤젤레스까지 파괴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 여진으로 시애틀과 솔트 레이크 시(市)와 덴버와 알브케르크가 흔들렸고 미국의 5대 호수와 허드솔 강이 요동하였다. (192.7)
 여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은 1955년에 대영제국 박물관의 관장인 토마스 켄드릭(Thomas Kendrick) 경이 리스본 대지진 200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탁월한 연구서인 “리스본 지진”에 근거한 것이다.9 켄드릭은 말하기를 “1755년 11월 1일의(리스본) 지진은” 비록 최대의 재난을 가한 지진은 아니었으나 “그렇듯 먼 곳에까지 영향을 끼쳐 전반적인 경각심과 경악, 그리고 대단한 과학적 추측을 낳게 한 거대한 지진이었다”고 하였다.10 (192.8)
 켄드릭에 의하면 이 지진으로 말미암아 신학적, 철학적인 추측도 많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 대부분은 그 재앙과 하나님과의 관계 즉 악의 존재와 하나님에 관한 해묵은, 이른바 “신정설”(神正說)에 핵심을 둔 것들이었다. 켄드릭은 “공격받은 낙관주의” 라는 장(章)에서 칸트(Kant), 루소(Rousseau), 볼테르(Voltaire) 등 저명한 철학자들의 반향을 소개하였다. (1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