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는 진토인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인간은 다시 진토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이 조각된 진토는 하나님의 분신(分身)이지 더 이상 진토가 아니기 때문이다.

 — 시편 90편(229.1)
 연명(延命)과 수명(壽命)
 70세 나이를 고희(古稀)라고 한다.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에 쓰인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람의 나이 일흔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70세 생일을 고희연(古稀宴)이라 하여 크게 차려 축하한다. 생활수준 향상과 의료 혜택으로 선진국의 평균 수명이 70에 이르고 있는 요즈음이라 실감이 덜 나기는 하지만 사고와 질병이 여전하고 전화(戰禍)까지 겹치는 세상에서 70년을 넘게 사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70년 이상씩 오래 사는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길든 짧든 인생의 실상(實相)을 깨닫는데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로 전해지는 시편 90편은 바로 이러한 인생의 전말(顯末)을 깨우쳐 인생의 의미가 길이에 있지 않고 깊이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뜻 없이 오래 사는 것은 연명(延命)이지 진정한 수명(壽命)이 아니기 때문이다. (229.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便點)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듣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90편 1~6절). (230.1)
 나그네의 작별 인사
 모세에게로 돌려지는 유일한 시편인 90편은 설사 모세가 직접 쓰지는 않았다 해도 신명기 32장33장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에게 가르친 그의 마지막 노래와 그가 드린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그것이 90편의 표제와 신명기 33장의 시작에 함께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연관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참으로 고달픈 여정(旅程)인 광야 생활 40년이 거의 끝나 약속의 땅 경계까지 왔으나 백성의 범죄와 자신의 실수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한 채 무상(無常)한 일생을 마치게 되는 모세의 만장(萬丈) 회포(懷拘)가 가장 숭고(崇高)하면서도 깊은 연민(協機)을 자아내게 하는 탄원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230.2)
 피곤한 여로의 몇 날을 편히 머물다 가게 해준 너그러운 집주인에게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나그네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여정과 함께 자신의 인생 여정도 마치고 황망히 떠나려 하는 인생 나그네 모세는 가나안의 유목 생활, 애굽의 노예 생활, 광야의 유랑 생활을 통하여 “다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작별 인사를 드리고 있다. (231.1)
하나님께서는 지금 범죄로 인하여 “티끌로 돌아”가게 된 덧없는 인간에게서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복구하시기 위해 ∙∙∙ ”
(231.2)
 히브리어로 “마온”(maòn)인 “거처”는 단순한 휴식처만 아니라 피난처와 요새도 뜻하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입은 온갖 은혜를 실감나게 한다. (231.3)
 너무나 힘에 겨워 고달프고 지루하던 광야길 인생을 되돌아 볼때 모든 것이 꿈만 같이 흘러갔다. 기대로 설레는 가슴을 안고, 아이들을 둘러업고 봇짐을 이고지고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떠났던 애굽 땅이었다. 들어선 광야에서 살려고 아우성치며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며 살아온 날들이 모두 순간처럼 지났다. 지금은 거의 모든 외진 광야 어디에 한줌의 흙으로 되돌아간 동행 길의 인생을 생각하며 이제는 자신의 차례를 묵묵히 기다리는 순간이다. 한밤에 잠시 꾼 꿈같은 일생(一生)이요 잠시 돋아나 꽃을 피운 뒤 시들어 버리는 풀 같은 인생(人生)이다. 반짝하다가 증발해 버리는 초로(草露)며 조로(朝露)와 같은 생명, 그들은 명령하신 대로 “티끌로 돌아가”야 한다. 사연이 있어서이다. 영원한 과거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존재하시는 억겁(意幼)의 하나님께는 천년이라도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홍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 영원의 바다로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찰나(刹那)를 사는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도서 3장 11절)을 주신 하나님의 밀어(密語)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인생은 몰려왔다 밀려가는 덧없는 시간의 “홍수”에 쓸려 영겁불귀(泳封不歸)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이다. (231.4)
 분내심에 놀라는 인생
 “우리는 주의 노(怒)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90편 7~12절). (232.1)
 첫 단락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인생의 무상(無常)을 뼈저리게 느끼며 고백한 시인은 이제 두 번째 단락에서 인생이 그렇게 허무하고 덧없어야 하는 까닭을 서정(抒情)의 시어(詩語)로 고고(孤高)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그토록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찰나의 진토에 불과한 인간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다는 뜻밖의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범죄로 인하여 “티끌로 돌아”가게 된 덧없는 인간에게서(창세기 3장 19절)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창세기 1장 27절)을 복구하기 위해 진토 인간에게 새겨 넣으신 당신의 도덕적 형상을 어이없이 이지러뜨린 인간의 죄를 가차없이 발본색원(城本寒源)하고 계신 것이다. (234.1)
 두 번째 단락에서 우리는 사람 안에 조각된 당신의 형상을 망가뜨리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공분(公憤)을 발하시는 “주의 분 내심”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주의 분내심에 소멸되고 주의 분내심에 놀라”며,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는 칠, 팔십 평생을 “수고와 슬픔”으로 “신속히” 보내고 있는 탄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인간의 범죄 → 하나님의 공분 → 인간의 무상(無常)이 구약성경 민수기를 채운 백성들의 허망(虛妄)한 여정(旅程)임을 깨닫고 시인은 머리를 조아린다. 그것이 사람의 물결 속에서 밀고 밀치며 자신의 민수기(民需記)를 쓰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인생 여정인 것이다. (234.2)
 먹는 나이 세는 법
 황량한 광야였지만 먹으리만치 먹이시고 마실 만큼의 물을 기적으로 공급하신 하나님을 불신하며 불평만을 털어놓은 백성의 기록인 민수기는 한 마디로 “불신불평기”(不信不平記)였다. (234.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우리를 회개시켜 주소서. 오셔서 덧없이 보낸 인생을 보상해 주시고 ∙∙∙
(235.1)
 그뿐인가? 구름기둥 불기둥이 주야로 앞장서 갈 길을 인도했건만, 그들은 인생의 방향 감각을 상실한 채 자신의 무덤자리를 찾기까지 광야를 돌고 돌았다. 부질없는 불신과 고질이 된 불평으로 공허해진 민수기를 반복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 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 아닌가? (235.2)
 고희(古稀) 70년을 산다 해도 날수로 계산하면 25,550일에 불과하다. 30세인 사람도 그 나이까지 14,600일이 남았을 뿐이고, 40세인 사람은 10,950일, 50세인 사람은 겨우 7300일, 그제야 사물의 이치를 순리대로 깨닫는다는 이순(耳順)의 나이가 60세가 됐을 때는 3,650일이 남았을 뿐이다. 광속도불변(光速度不變)이라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다지만 살아보는 시간은 그렇지가 않다. 어릴 때 시간은 기어가고(creep). 젊은 때 시간은 걸어가고(walk), 어른 때는 달려가고(run), 늙은 때의 시간은 날아간다(fly). 놀라서 황망히 돌아본 일생은 이미 가버린(gone) 시간인 것이다. 그나마 70평생 25,550일도 옹근 시간이 못된다. 일생의 1/3에 가까운 22년을 잠자는데 보내고, 19년은 일하는 데, 10년쯤은 배우고 익히는데, 5년가량을 먹는 데 쓰고, 2년 4개월쯤은 옷을 차려 입고서 6년은 오가는 일, 여행하는 일로 보내고 병치레로 한 몫을 빼고 나면 정말 사는 날이 몇 날인가? 시인은 움켜쥔 모래알처럼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촌음(寸陰)을 조바심하며 부르짖는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수고와 슬픔 뿐”인 덧없는 인생마저, 극구광음(陳航光陰), 광음여시(光陰如是)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235.3)
 상실한 인생의 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