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2 부 안식일과 거룩 제 13 장  안식일, 하나님이 내게 오는 고통과 치료의 날
 하나님이 진흙을 이겨 나를 새로 빚고 내가 실로암에 가서 씻고 보는 날(요 9:2-3, 6-7, 14-15)
 질병과 고난은 불의하고 죄 많은 사람에게 오는가. 그렇다면 저 질병과 고난의 밖에 있는 나는 저보다 의롭고 저보다 유용한 사람인가. 어진 이웃의 재난과 질병을 만날 때면 나는 미안해 질 수밖에 없고 사람의 삶이 한없이 불가사의해진다. 나는 제자들처럼 간단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자기이오니까 그 부모이오니까”(요 9:2)라고 물을 수가 없다. 오히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9:3)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미루어 이웃의 불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이 안식일 아침에는 이웃들의 재난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안식일에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가사의한 고통과 하나님의 일과 안식일은 어떻게 하나의 문맥을 형성하는 지를 살펴본다면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또 하나의 지평과 깊이가 열릴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안식일의 뜻에 비추어 사람들의 재난과 질병을 생각해보고 하나님의 일에 비추어 사람들의 재난과 고통을 생각해보고 사람들의 고통과 하나님의 일에 미루어 안식일의 뜻을 생각해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273.1)
 요한복음 9장 2절에 나오는 제자들의 질문 표현을 바꾸어 보자. “랍비여 이 사람이 병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 이것을 조금 더 바꾸어 보면 “이 사람이 아픈 것이 무슨 병으로 인함이오니까?” “못된 암에라도 걸렸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74.1)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 3절“대답하시되 이 사람이 아픈 것이 누구의 잘못 때문도 아니고 특별한 질병 때문만도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에게 당신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경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그 가족들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께서 가라사대 “내니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마 14:27; 막 6:50)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내 말을 믿으라” 하시는 것이다. (274.2)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다.” 우리의 이 질병, 이 고통, 이 재난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나타내심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나에게 나타내심인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로 오심이 이 고통, 이 아픔, 이 재난인 것이다. 나는 지금 신병(神病)을 앓고 있는 것이다. 무병(巫病)을 앓고 있는 것이다. 신내림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이 재난과 이 고통은 신 내리는 고통이요 신 내리는 재난이다. 하나님이 내게 오는 재난, 하나님이 내게 내리는 고통, 하나님이 내게 임하는 질병이다. 안식일은 이런 날의 상징이다. 안식일은 이러한 날들의 대표이다. 안식일이 대표하고 상징하는 날은 신내리는 날이다.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날이다. 내가 하나님을 영접하여 모시는 날이다. 때문에 안식일에 우리는 때때로 신내림의 고통을 앓기도 한다. 하나님이 내게 오시는 고통을 앓기도 한다. 안식일에 사람이 신병을 앓고 무병을 앓기도 하는 것이다. 신내림의 큰 병과, 큰 고통을 치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큰 병과 큰 고통이 치료되기도 하는 것이다. (274.3)
 그렇다면 신병은 언제 어떻게 낫는가. 하나님이 내게 오심으로 말미암는 이 고통과 재난은 어떻게 낫는가. 내가 신을 받아들여야 낫는다. 내게 신내림이 “이루어져야” 낫는다.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다 이루어지듯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일이 ‘다 이루어지듯’ 하나님의 오심이 내게 다 이루어져야” 낫는다. 그때에 비로소 우리도 “쉬어 평안하게”(출 31:17) 된다. (275.1)
 내가 앓고 있는 이 신병은 신이 내려와 내 안에 좌정해야 낫는다. 내가 온전히 하나님을 모셔들여야 낫는다. 이 고통, 이 재난은 내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다. 초야를 치르는 신부의 고통이다. 신부가 신랑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다. 저 신부의 고통이 누구의 죄 때문이오니까?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본인의 죄 때문도 아니다. 신부에게 신랑이 옴으로써 생기는 고통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나오는 고통이다. 신랑이 신부에게 자기를 나타내고자 함으로 생긴 고통이다.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고통이다. 신부가 신랑을 받아들이는 고통이다. (275.2)
 아기를 낳는 저 산모의 고통이 뉘 죄 때문이오니까? 그 부모의 죄를 인함이 아니다. 본인의 죄로 인함도 아니다. 아기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산모에게서 그의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산모에게서 출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275.3)
 고통과 재난이 내게 오고있는가? 신랑이 내게 오고 있다. 아들이 내게 오고 있다. 하나님이 내게 오고 있다. 구원이 내게 오고 있다. 천국이 내게 오고 있다. 질병이 오는 소리, 고통이 오는 소리는 하나님이 내게 오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오는 소리이다. 아들이 오는 소리이다. 구원이 내게 오는 소리이다. 내가 신부로 태어나는 소리이다. 내게서 아들이 서는 소리, 내게서 아들이 나오는 소리이다. 내가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소리이다. 내가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는 소리이다. 내게로 하늘이 내리는 소리, 내게서 하늘나라가 서는 소리, 내게서 하늘 나라가 열리는 소리이다. (275.4)
 그러므로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네 아내 엘리사벨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주려 하는 것이다”(눅 1:13). 그러므로 “마리아야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승은(承恩)을 입는 것이다”(눅 1:30). 그러므로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고 계신다”(요 12:15).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고 계시니라”(슥 9:9). “보라 신랑이로다. 나와 맞이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276.1)
 그대 신부여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신랑이 두드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대 산모여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 문을 두드리는 아기의 저 우렁찬 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재난과 질병으로 몸부림치는 너여, 신병을 앓고 신의 재난을 치르는 너여, 어찌할 것인가. 바울이 무엇이라 했는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주께서 무엇이라 하셨는가.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 고통하는 너여, 네 아내가 네게 아들을 낳아주려 한다. 고통으로 구로하는 신부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승은을 입은 것이다.” (276.2)
 너 고통하는 자여, 그대의 자리는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리가 아니다. 참기 어렵고 고통스럽다면 이는 정녕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하심의 치열함일 것이다. 하나님이 그대에게 치열하게 돌진해 오심이요, 그대를 치열하게 포옹함일 것이다. 그대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간절하심이 그토록 강하고 큼일 것이다. (276.3)
 그대 어찌할 것인가. 성경 아가서가 벌써 그대의 마음과 그대의 할 일을 노래했다. 아가서가 쏟아지던 상황이야말로 그대가 현재에 겪고 있는 그 상황이었다. 그대가 서 있고 그대가 구로하고 있는 삶의 자리야말로 아가서가 쏟아진 상황이다. 그대가 겪고 있는 삶의 양면은 고통과 기쁨이다. 그대의 부르짖음은 탄식의 노래이면서 기쁨의 노래이다. (277.1)
 초야의 고통을 치르고 해산의 고통을 치르는 저 외침을 들어보라. 저 외침은 사랑하는 자의 사랑의 소리침이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오 내 머리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아 5:2-5). 이 노래가 고통 속에서 네가 부를 노래이다. 바울이 힘들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의도한 것이 바로 이 노래이다. 이 노래가 신병을 앓는 자의 노래, 신내림 하는 자의 부를 노래이다. (277.2)
 고통하는 너여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고통하고 구로하는 너여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그렇다. 너의 고통은 하나님의 아들을 네게서 낳는 고통이다.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 신랑을 맞이하라. 하나님을 맞이하라.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 지이다”(눅 1:38)하라. 안식일은 이런 날이다. (277.3)
 안식일의 지금은 “때가 아직 낮이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한다”(요 9:4). 신랑이 그대에게서 신랑의 일을 해야한다. 신랑은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을 나에게서 해야 한다. 안식일은 이런 날이다. 그리고 그가 안식일에 나의 신랑이 되는 일이 그의 일이다. 내가 안식일에 그의 신부가 되는 일이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다. 내 안에 그 아들이 서고 내게서 그 아들이 출산되는 일이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다. 내가 아기를 잉태하고 내가 아기의 어미가 되는 일이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다. (278.1)
 내가 다시 태어나는 일, 내가 신부로, 어미로 다시 태어나는 일, 내가 신부로 눈뜨고 내가 어미로서 눈뜨는 것이 그를 보내신 이의 일이다. 안식일은 이런 날이다. 내 왕이 내게 임하는 날이다. 신내림의 날, 성령 내림의 날이다. 하나님이 내게로 와서 문을 두드리는 날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덮는” 날이다. 하늘이 내게 열리는 날. 내가 하늘을 향해 눈뜨고 열리는 날이다. (278.2)
 그리고 안식일은 내 신랑 내 주님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나를 다시 빚는 날이다. 내가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창조의 날에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창 2:7)셨듯이 나를 새로 빚는 날이 안식일이다. 나를 그의 신부로, 나를 주님의 어머니로 새로 빚는 날이다. 내가 재창조되는 날이다. 신병을 앓고, 신부의 초야를 치르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능력의 덮임을 치르고 내가 재창조되는 날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 내가 재창조되는 날이다. (278.3)
 그리고 안식일은 내가 실로암에 가서 이 지치고 병든 몸을 씻고 늙고 죄 많은 이 몸을 씻어 내가 다시 눈을 뜨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실로암에서 씻어 주님의 여자로, 하나님의 아들의 어머니로 다시 눈을 뜨고 다시 태어나는 날이다. 실로암이 무엇이냐.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다”(요 9:7). 보냄을 받은 자가 누구냐. 신랑이다.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이다. 십자가의 예수이다. 그 예수의 샘이 오랑캐꽃보다 더 붉은 실로암 못이다. 그리스도의 두 팔 사이에 고인 피 못이다. 안식일은 바로 이 못 실로암을 상징한다. 그곳에서 씻어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날이다. (279.1)
 그리고 그리스도의 두 팔 사이에 고인 피 못을 상징하는 안식일은 “지존자의 은밀한”(시 9:1) 품이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가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는 자”이다. 안식일에 거하는 자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이며 실로암에서 씻는 자이다. 안식일은 시간의 깊은 곳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은밀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골방에서 만나는 분이시다. 내 병은 내가 골방에서 뵙는 한 분뿐이신 분의 내게 내림이다. 만장하신 님의 내림이 아니다. 안식일의 내 병은 내가 골방에서 앓는 병이다. 나만의 골방에서 주님과 함께 앓는 병이다. 안식일은 은밀한 날의 날이다. 내가 주님의 은밀한 곳으로 영접되는 날이며 주님이 나의 은밀한 곳으로 오시는 날이다. 주께서 나의 은밀한 수치로 오시는 날이다. 늙고 병들어 죽음이 깃든 이 수치의 몸에 주께서 오시는 날이다. 내 깊은 수치로 오시고 나의 치명적인 질병에 오시고 나의 치욕적인 죄와 불의로 오시는 날이다. 오시어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거기 바르시는 날이다. 그리고 당신의 붉은 핏물로 씻으시는 날이다. 두 팔 사이의 그 붉은 피로 나를 씻으시는 날이다. 내 수치를 덮으시는 날, 내 수치를 씻어내시는 날, 거기를 성령의 기름 곧 사랑의 기름으로 바르시는 날이다. (2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