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좌에 이르는 길 제 5 편 지성소 제25장 법궤와 그 내용물
 “그 판은 양면에 기록되”(출 32:15, 킹제임스역)었다. 우리는 가끔 이 돌비를 한쪽 면에만 쓴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이 올바른가 아니면, 출애굽기 32장 15절에서 읽은 대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가 성경을 읽은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십계명이 돌비의 양쪽에 이중으로 쓰였음을 알게 된다. 신명기 4장 13절에는 이 내용이 또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 돌판에 그것들(십계명)을 친히 쓰셨느니라.” 다시 말하면 십계명 전체가 각 판에 쓰였다는 것이다.4) 따라서 돌비를 “책과 같이 접으”(초기문집, 32)면, 처음 네 계명은 왼쪽에 그 다음 여섯 계명은 오른쪽에 있었다(마 22:37-40). 돌비가 어떻게 접혀졌든지 간에 각 돌판은 완전한 십계명을 포함하고 있었다. (234.2)
 출애굽기 32장 15절에 대한 모팻의 번역을 보면, “두 면에 곧 이쪽 면과 저쪽 면에 쓰인 돌비”라고 말한다. 오하이오의 히브리 대학의 다른 권위자의 해석을 보면, “랍비 아브라함(1092~1167)은 이 말의 문자적인 번역을 시도했다. 바꿔 말하면 그 기록은 양쪽 면에 이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 성경절은 이렇게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 신명기 4장 13절“각 돌비가 십계명 전부를 포함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랍비들의 해석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돌비의 양면에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이중이었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 (234.3)
 법을 이중으로 쓴 의미
 하나님의 법이 돌비의 양쪽 면에 이중으로 쓰인 사실이 분명하다면,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왜 율법을 두 번 기록하셨을까?” 이는 분명 바로 왕으로 하여금 꿈을 두 번 꾸게 하신 것과 동일한 이유일 것이다. (234.4)
 “하나님께서 그 일을 정하신 것”(창 41:32, 킹제임스역)이기 때문이다. 고대 사람들은 중요한 문서일 경우 두루마리 안팎으로 쓰고 봉인했다. 봉인이 파손되었을때, 안에 쓴 것이 바깥에 쓴 것과 일치한다면, 그것의 정확성과 유효성은 증명될 수 있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분의 율법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유효하게, “하나님께서 정하”셔서 만드셨다. (235.1)
 이 관습의 예가 에스겔 2장 9, 10절요한계시록 5장 1절에 나타나 있다. 먼저 전자에 관하여, 성경 주해(J. F. B. Com.)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과 밖’ 즉 앞면과 뒷면으로 쓰여 있다고 말한다. 보통 양피지는 그것을 감을 경우를 감안해 안쪽면에만 쓴다. 그러나 에스겔 2장 9, 10절에 있는 하나님의 급박한 저주의 기별은 그토록 완전하기 때문에, 그 기별을 뒷면에도 기록하였다.” 요한계시록 5장 1절의 두루마리에 대해 모팻은, “밖과 안에 기록된 두루마리”라고 말하고, “밖의 기록은 어떠한 다른 것도 첨가될 수 없도록, 충만함과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다.”고 해석하고 있다. 버그에 의하면 “두루마리, 즉 책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속된 ‘인간의 상속 권리증서’라는 배경에서 나타났다. 그 두루마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권리를 강탈자로부터 회복하는 연속적인 단계와 함께, 그분 자신과 그분의 선택된 성도들을 위하여 이미 획득하신 실제적인 왕국의 소유권을 얻으시는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라고 한다. (235.2)
 그와 같이 돌비의 앞쪽과 뒤쪽, 양면에 쓰인 하나님의 법은, 그 법의 비상한 중요성뿐 아니라 “충만함과 완전함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어서, 어떠한 것도 첨가가 시도될 수 없음”을 알려 준다. 그 법은 “사람의 모든 의무”(전 12:13, 킹제임스역)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5) (235.3)
 하나님의 율법의 특성을 그처럼 신성하고, 유용하며, 불변적이며, 영속적이며, 또한 율법과 우리의 구원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처럼 명확하고도 자연스럽게 그리고 힘있게 표현하는 곳은 사실상 성소의 지성소 외에는 없는 것이다.6) 하나님의 율법을 시기함으로 하늘에서 쫓겨난 사탄은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은 속박의 멍에라고 믿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영의 감동하심을 입은 야고보는, 그것을 “자유롭게 하는 완전한 법”(약 1:25, 신킹제임스역)이라고 불렀다. 바울은 우리에게 “죄는 불법”(요일 3:4)이며, 죄는 우리를 노예, 즉 “썩어짐의 종노릇”(롬 8:21)하도록 전락시키지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그것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은 이렇게 선언한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요일 5:3). (235.4)
 사실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준수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드러내는 것이다(요일 5:3; 2:3, 4).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요일 2:7; 신 5:6~22)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명” (요일 2:7, 8)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 “새 계명”“옛 계명”에서 인간이 만든 모든 굴레, 즉 속박의 멍에인 인간의 규례를 벗겨 낸 것이었다(마 5~7장 참고). (236.1)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
 법궤는 언약의 돌비 외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히 9:4)를 담고 있었다. 이것들은 언제 추가되었는가?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고, 몇 사람이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간 때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속에 만나 한 오멜(2.2리터)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아론이 ∙∙∙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출 16:33, 34)라고 지시하셨다. 다른 때라면 하룻밤 사이에 썩을 이 음식의 표본을 여러 해 동안 보존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백성에 대한 그분의 계속적인 돌봄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종류의 음식과 물도 (바위로부터는 예외) 얻을 수 없는(민 20:5) 광야에서 어떻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십 년 동안 먹이셨는지에 대하여, 나중 세대가 근거 없는 추측을 하지 않도록 아예 의심의 싹을 잘라 버리시고자 하셨다. (236.2)
 아론의 지팡이는 고라와 다단 그리고 아비람이 하나님의 택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에 대해서 반역을 꾀했을 때(민 16:3), “증거궤 앞에”(민 17:4) 놓여졌다. 레위인으로 중요한 지위를 맡도록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제사장의 직분”(민 16:10)을 맡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자만의 정신은 루시퍼가 가졌던 것과 똑같은 정신이었으며, 하나님을 매우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밤 동안 아론의 지팡이에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민 17:8)리게 함으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셨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민 17:10)고 명령하셨다. (236.3)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지팡이는 이스라엘의 사십 년 광야 생활 동안 법궤 안에 간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약 오백 년 후 성전 봉헌식 때, 법궤가 솔로몬 성전 안에 들여 놓일 때,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 8:9)고 전해진다. (236.4)
 지금 법궤는 어디에 있는가?
 솔로몬 시대부터 BC 605년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포위될 때까지, 거룩한 보물이 담긴 법궤는 무사했었다. 그때 의인들은 예레미야의 충성스러운 증언 아래, “십계명이 기록된 돌비가 들어 있는 법궤를 무자비한 자들의 손이 닿지 못하는 곳에 갖다 두기로 결심하고 ∙∙∙ 슬프고 비통한 마음으로 법궤를 굴속에 감추었다.7)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것은 그들에게서 숨겨졌으며, 다시 그들이 찾을 수 없었다”(선지자와 왕, 453). 바벨론 포로로부터 유대로의 귀환 후, 성전은 재건축되었다. 그러나 봉헌식 때에 “새로 건축된 성소를 가득 채울 영광의 구름도 없었다 ∙∙∙ . 지성소의 그룹들 사이에 있던 하나님의 영광의 빛(셰키나)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그곳에서 법궤와 속죄소와 증거의 두 돌판도 볼 수 없었다. 제사장들에게 여호와의 뜻을 알리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들려오지도 않았다”(각 시대의 대쟁투, 24). “여러 노인들이 첫 성전을 보았던 고로 ∙∙∙ 대성통곡”(스 3:12)했다는 말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237.1)
 돌비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친히 쓰신 그분의 율법은 모든 사람이 선악 간에 심판을 받게 될 기준이다(약 2:12). 그러므로 1844년에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집”의 심판이 시작되었을 때, 법궤와 함께 동굴에 숨겨져 있던 두 돌비는 분명 이후 언젠가 구조되어 하늘 지성소로 신성하게 옮겨졌을 것이다. 그곳에서 돌비는 하나님의 율법책으로 존재하며, 그것에 따라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멸망으로 결정지어지게 될 것이다. “돌비는 그분이 기록한 바와 같이, 큰 심판의 날에 내보이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서 숨겨졌다”(R&H, 3. 26. 1908. 8.).8) “하나님이 계신 하늘 궁전의 ∙∙∙ 지성소에는”, “위대한 의의 원칙 곧 전 인류의 심판의 표준이 되는”(각 시대의 대쟁투, 415) 그분의 법, “두 돌비”(초기문집, 33)가 있다. 돌비는 천 년 동안 악인에 대한 심판이 진행될 때 판결 기준으로 그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237.2)
 천년기의 마지막 때, 즉 새 예루살렘이 새 땅에 놓이기 위하여 내려올 때, 사탄의 무리는 그것을 점령할 계획으로 그 도성을 둘러 에워쌀 것이다. 그들은 “높이 들린”(사 6:1) 보좌 위에 하나님의 아들이 앉아 계심을 보게 될 것이다.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의 놀라움 속에 “책과 같이 접어진 두 돌비를 잡고 있는 손이 하늘에 나타난다” (초기문집, 32; 각 시대의 대쟁투, 668). “그 손이 돌비를 펴자, 불과 같은 글자로 기록된 십계명이 나타난다”(각 시대의 대쟁투, 639). (237.3)
 사악한 자들은 “그들이 멸시하고 범한 (법), 하나님의 율법의 돌비”(각 시대의 대쟁투, 668)를 본다. 두 돌비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율법의 창시자 그리스도의 손에 있다. 그분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마 5:17)기 위해 오셨다. 그분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롬 7:12)한 하나님의 율법이 그 창시자와 같이 영속적으로,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임을 증명하셨다. “이와 같은 율법은 하나님의 뜻과 품성의 표현이므로 그 창시자와 같이 영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7). 이것이 돌비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다. 두 돌비는 그리스도의 손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좌, “여호와의 바로 곁”(초기문집, 255)의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동안 그분의 친수로 새기셔서 보물 상자에 안치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율법, 곧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보좌의 영원한 기초이다. 두 돌비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정부의 근본 율법이라는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율법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그분의 보좌를 손상시키는 것이며 그분의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과 같다. (238.1)
 지성소에 들어가는 자의 특별 사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