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증 서문 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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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재림교인과 같은 진지한 태도를 가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재림교인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그들은 진정 하나님의 말씀에서 신앙의 이유를 찾았으며, 그것에 신앙의 토대를 두었다. 그래서 ‘재림교인’ 하면 ‘성경 많이 아는 사람’으로 통할 정도로 그들은 말씀의 백성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언제부터인가 그들의 그러한 특성이 오히려 문제의 원인이 되기 시작했다. ‘아는 것이 분명 힘’이건만, ‘아는 것이 병’이 돼 버린 것이다. (8.1)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한 베뢰아 사람들처럼(행 17:11), 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은 ‘아는 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신앙은 단순한 교리들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그것은 가슴에 와 닿아야 하며 삶에서 체험되어야 한다. 따뜻한 가슴이 사라지고 차가운 머리만 남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아무런 능력도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재림신자들은 누구보다도 누적된 지식을 많이 소장 —마치 골동품처럼—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많은 재림신자들은 몸의 다른 부분에 비해 머리만 거대하게 자란 일종의 가분수형 신앙인들이 돼 버렸다. (8.2)
 본서는 그런 증상—일명 ‘거두증’(머리만 자라는 병)—을 앓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신앙은 마귀가 하나님을 아는 것(약 2:19) 같은 단순한 지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히브리어 야다(알다)’란 단어는 이 사실에 대한 좋은 예증일 것이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한 것을 히브리어 성경은 야다라고 표현하지 않았던가! 성경상 ‘안다는 것’은 부부가 서로를 알 듯 개인적이고 경험적이며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성경의 참 지식은 단순한 지식적 앎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경험적, 감정적, 관계적 앎의 영역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본서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저자의 명쾌한 설명은 그런 포괄적인 앎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9.1)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과연 얼마나 많은 재림교인들이 ‘예’라고 확실히 대답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겉으로 자신감 있는 태도로 대답하겠지만 속으론 여전히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일 것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서는 구원의 확증을 제시하고 있다. 구원의 확실성은 ‘나’‘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알파오메가이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히 12:2)를 바라보는 것만이 구원의 확증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다. 스스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져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5)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한스 K. 라론델 박사가 평생 가르치고 설교한 성경 전반에서 발견되는 구원의 확증은 내가 아닌 예수에게서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9.2)
 역자는 개인적으로 앤드루스 대학교(Andrews University)에서 “구원론”이란 과목을 저자로부터 직접 수강하는 특권을 누렸다. 매 시간 진리의 정곡을 찌르는 그의 강의에 매료되었고, 깨달음과 감동의 물결 속에 빠져들었던 경험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약한 사람이 역작을 졸작으로 만들진 않았나 하는 염려가 있긴 하지만, 본서를 우리말로 옮길 수 있었던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삼육대학교 총장이시자 신학연구소 소장이신 남대극 박사님께 감사를 드리며, 아울러 한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일이 해 주신 충고와 조언은 혹독한 훈련이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음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10.1)
 이 책을 읽는 분들이 성경 전반에 걸쳐 분명히 제시된 구원의 확증에 대한 기별을 저자의 명쾌한 필치를 통해 다시 한번 가슴 깊이 되새기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모쪼록 모든 독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바로 여기서 지금(here and now) 회복하고 누리게 되길 바라는 바이다. (10.2)
 “ ∙∙∙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10.3)
 삼육동에서

 역자 제해종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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