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키나의 그림자 속에서 제1장 하나님 아래 있는 한 국가 (민수기 1~4장)
 조직화된 종교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에 앞서 시내 광야에 거의 일 년 동안 머무르게 하셨다(출 19:1; 민 10:11,12 참조). 시내산 주변 광야는 이방 민족들의 군사적 위협이나 유혹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사명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그분과 그리고 그들 서로 간에 협력할 수 있도록 인상적인 예배 시스템을 갖춘 기능적 국가로서 그분의 백성들을 조직화하셨다(출 29장-민 10장 참조). (20.1)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종의 “조직화된 종교”를 주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종교를 거절해왔다. (20.2)
 ∙“만약 종교가 없다면 이 세상은 최고의 세상이 될 것이다”(존 애덤스, 미국 2대 대통령). (20.3)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칼 마르크스). (20.4)
 ∙“종교? 그것은 흑암 가운데 울려펴지는 천둥 소리를 설명하기 위해 무식한 야만인들이 쓴 책 속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모순되는 점들을 놓고 벌이는 끊임없는 갑론을박이다”(작자 미상). (20.5)
 ∙“종교 없는 사회는 장전된 45 구경 권총을 소지하지 않은 발광하는 사이코패스와도 같다”(작자 미상). (20.6)
 ∙“기성 종교는 전부 가짜이며, 모두 힘을 필요로 하는 심약한 사람들이 기대는 목발이다. 그것은 나가서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라고 말한다.”(제시 벤추라, 미네소타 주지사, 1999). (20.7)
 ∙“시간 자원의 분배 측면에서만 따져 보더라도, 종교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일요일 아침에 교회에 가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다”(빌 게이츠). (20.8)
 불행히도, 이와 같은 진술을 하는 사람들은 수 천 년에 걸친 종교 역사에서 실제로 그들의 말을 뒷받침하는 많은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볼 때,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고자 원한다 할지라도, 조직은 참된 영성과 그분께 대한 순수한 헌신을 파괴한다. 그 증거로써 그들은 경건과 봉사보다는 권세와 독선주의에 더 초점을 맞추는 수많은 종교 단체들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뻑뻑하고 피상적이며 지루한 예배에 참석하거나 유독한 패거리들로부터 왕따 당하거나 비평 받는 것을 견디기 보다는, 차라리 가정에서나 하나님이 만드신 천연계에서, 그들 자신들이나 가족들, 혹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예배 드릴 때 더 큰 축복을 얻는다고 말한다. (21.1)
 나는 이렇듯 기성 종교를 거절하는 사람들의 우려에 공감한다. 나는 아내 코니와 함께 3대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본산지인 예루살렘에서 2년간 공부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 3대 종교 단체에 속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신조와 관례들 가운데서 많은 긍정적 측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사랑하긴 하지만, 우리는 이 세 종교 집단 가운데서 엄청난 종교적 적대감, 오만, 그리고 이기심을 목격했다. 종교적 전통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 대신,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감염시키는 뿌리 깊은 편견들을 길러주고 있다. 그들은 모유를 먹으면서, 적대적인 의미로서의 “우리” 대(對) “그들”이라는 개념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21.2)
 예루살렘에서 우리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성묘(聖廟) 교회에서 부활절 주말에 거행된 “거룩한 불의 예식”이었다. 일만 오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장사지내고, 부활하셨다고 하는 역사적인 현장 위에 세워진 교회에 모여들었다. (21.3)
 그 날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일요일 사이에 낀 안식일이었다. 한 그리스도교 “대제사장”이 성령께서 직접 그의 초에 불을 붙이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무덤에 들어갈 것이었고, 그러고 나서 그는 수 천 명의 예배자들의 초에 그 불을 나누어줄 예정이었다. (21.4)
 코니와 나, 그리고 몇몇 친구들은 그 교회에 일찌감치 들어가서 입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발코니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곳에 6시간 동안 갇혀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교회의 바깥 출입구가 열린 처음 1~2시간 동안 사람들이 교회로 입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각기 다른 두 “그리스도교” 교단 신자들이었는데, 서로 상대방이 그곳에 있는 것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상, 성묘 교회를 공유하는 여러 동방 그리스도교 교단들 사이에 엄청난 증오심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작 그 사당 열쇠를 관리하는 측은 아랍 무슬림이라고 사람들이 내게 말해주었다. 이런 관습은 폭력으로 그 열쇠를 서로 다른 측으로부터 탈취하려고 하는 시도를 막아준다. (22.1)
 이스라엘 경찰이 두 교단의 예배자들을 분리하기 위하여 교회 입구 중앙으로 좌우를 가르는 차단막을 설치하였다. 각자의 그룹에서는 자신들의 영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입구의 벽을 따라 건장한 청년들을 줄지어 배치시켰다. 거의 매 15분마다 두 집단의 청년들 사이에 실랑이가 발생했고, 매 30분마다 큰 소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라니 말도 안 된다! (22.2)
 체구가 작은 한 할머니가 길을 잘못 들었다. 그 쪽 지역에 대한 한 관할권을 가진 고압적인 수석 사제가 몇 번이고 그녀를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어떠한 이유에선지 다른 편으로 가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그 사제는 할머니를 붙잡고는 거칠게 밀쳐버렸다. 그녀는 나동그라져 돌로 포장된 길 위에 큰 대자로 누워 비명을 질러댔다. (22.3)
 잠시 살펴보라. 나는 정말로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소위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내가 겪었던 것이 내가 아는 종교의 전부라면, 나는 아마도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될 것이다. 많은 기성 “그리스도교”가 거룩한 사랑의 원리에 등을 돌리고 악마적 이기심과 증오의 원리로 돌아섰다. 다른 형태의 종교들은 매우 이교적이며 다신교적인, 혹은 미화된 비술(秘術)로 전락해 가고 있다. (22.4)
 이러한 사실들이, 조직은 그냥 놔두어도 필연적으로 종교를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해체된 종교 혹은 무조직 종교가 더 나은 대안일까? 우리는 혼돈 상태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참으로 종교적 조직의 부패가 문제인가? (23.1)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룹 안에 소속되어 도와주고 친교를 나누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여행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과 동떨어진 은둔자들이 아닌, 한 무리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서로서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관계를 맺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보다 함께 할 때 영적으로나 실생활에서 더 강해진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23.2)
 비조직적 방식보다는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무언가를 한다면, 그룹원으로서 사라들은 더욱 행복하고 효율적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격려하기 위하여 함께 모일 때, 모든 사람이 동시에 말하기 보다는 한번에 한 사람씩 말한다면 더 많은 유익을 얻는다(고전 14:26-32).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하나님은, 그분의 하늘 본부(계 4,5장)와 행성 지구에서 그분의 창조 가운데 엿보이는 질서에서 나타난 것처럼, 조화와 질서를 가치있게 보신다.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