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과 십자가 (안식일의 신앙의 의미) 제 1 부 안식일과 쉼 제 1 장  안식일, 그 숨돌림으로의 초청
 신명기 5장 14절에서는 수고하는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최하위 신분 계층으로서 “여종”이 언급되었다. 여종의 삶이 가장 수고로운 것이다. 여종의 삶은 고생스러움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가장 변두리에 위치하였다. 사회적 동정의 햇볕이 가장 인색하게 비쳐지는 응달에 여종의 수고가 자리했다. 그러나 출애굽기 23장 12절에서는 “여종”의 그늘에서 한 깊이 더 내려간 “계집 종의 자식”의 수고가 언급되고 있다. 종년의 자식의 수고가 안식일 쉼의 배경이다. 그리고 종년의 자식의 수고는 한 마디로 “숨 넘어가는” 수고이다. 종년의 자식이 진 무거운 짐의 무게는 “숨 넘어가는” 무게이다. 따라서 안식일 쉼은 숨 넘어가는 네 계집 종의 자식이 숨돌리는 것에 다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22.3)
 사람이 무엇인가? 성경은 호흡하는 존재, 곧 “네페쉬”라 했다(창 2:7). 호흡이야말로 사람을 대표하는 말이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곧 그 사람의 숨결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 혐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욥은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고. . . 내 동포들도 혐의한다”(욥 19:17)고 탄식했다. 6일의 심각성은 그 날들이 숨죽이며 살아가는 숨차고, 숨막히고, 숨넘어가는 날들이라는데 있을 것이다. 꼴깍 넘어가면 그 자리가 황천이다. 그런데 천지간에 불쌍하고 무지몽매한 것이 생물이다. 겁에 쫓기고 정욕에 쫓기어 숨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 사망의 오르막을 숨막히게 오르고 있다. 한 발 앞이 천 길, 만 길의 황천일 줄도 모르면서. 그러나 안다고 한들 어찌하리. 한 발 앞에 있는 죽음의 나락을 보면서도 죽음으로 내몰리는 삶을 저지할 힘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 인생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숨죽여 오고 숨막혀 오는 거친 삶의 밀어냄에 밀려 황천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 인생이다. (23.1)
 쉰다는 것
 그렇다. 쉼은 숨쉼이다. 숨찬 숨, 숨막히는 숨, 숨죽이는 숨, 그 숨이 쉬는 것이 숨쉼이요, 쉼이다. 넘어가던 숨이 돌아오는 것이 쉼이다. 막힌 숨, 마려운 숨을 마려운 오줌 누듯 “쉬이” 하는 것, “숨 쉬이” 하는 것이 숨쉼이다. 따라서 쉼은 숨이 쉬는 것이며 “쉬이”하는 것이다. 지친 숨이 잠깐 짐을 내려놓는 것이 쉼이며, 막힌 기운이 “쉬이”하고 제 길로 뿜어 나가는 것이 쉼이며, 그리하여 생명과 생활의 기능이 쉬어 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쉼이다. (23.2)
 예수님의 복음운동도 이같은 쉼의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예수께서. . .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 .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 .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케 하려 하심이라”(눅 3:16-21). (24.1)
 예수님이 파악한 인간은 가난하고 사로잡혀 있고 눈멀고 압제받고 있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그분의 이같은 인식이 그로 하여금 30여 년에 걸친 나사렛의 일상을 떨치고 일어나, 아니 저 천국의 갖가지 책임과 기쁨을 뒤로하고, 이 땅에 내려와 거칠고 험한 공적 삶에 몸을 던지게 한 것이다. 그분이 이같은 자신의 인간관과 봉사의 지침을 밝히기 위하여 찾아 읽으신 성경절은 이사야 61장 1, 2절58장 6절의 희년 메시지였다. 안식년 메시지였다. 안식일 메시지였다. 예수님의 인간관과 봉사관은 곧, 안식일의 인간관과 봉사관이었다. 반면 수많은 계율적, 압제적 종교의 가장 혐오스러운 특성은 두 말할 것 없이 인간의 수고스러운 삶에 대한 몰이해와 몰인정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것들의 고통에 대한 귀먹음과 눈멀음과 무감각이야말로 모든 정신적인 존재가 타락하는 첫걸음인 것이다. (24.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는 인식이 “다 내게로 오라”는 초청의 앞말인 것이다. (24.3)
 요한계시록 14장 9-11절의 셋째 천사가 외친다. “불 유황의 지옥이 다른 것이 아니다.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삶의 시공간이 지옥이다. 짐승의 삶이 그것이다. 생지옥이 따로 없다. 숨죽이며 살아가는 숨막히고, 숨차고, 숨넘어가는 세상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달리 없다. 산 높고 물 좋아서만 천국이 아니다. 숨 제대로 쉬고 사는 세상, 호흡이 억압되지 않고 자유로운 세상, 호흡이 충만하고 생기가 가득한(창 1:21) 세상, 생명이 충만한 세상, 하나님의 선한 천지를 마음껏 마시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이다.” (24.4)
 하나님이 소리치신다. 안식일에 서서 소리치신다. 두 손을 불끈 쥐고, 두 발로 지축을 울리며, 천지를 진동하는 우레 같은 목소리로 소리치신다. (25.1)
 “수고의 날들아, 제칠일을 내놓아라.

 바벨론아, 내 백성을 내놓아라.

 내 백성으로 숨돌리게 하라.

 내 백성, 계집 종의 자식으로 숨돌리게 하라!”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