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제5부 재림교회의 토대와 성서적인 그리스도론 제16장 성서에 근거한 그리스도론 자료
 우리가 방금 죄의 본질에 관해 생각해 본바 대로, 예수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모든 더러움으로부터 떠나 생각이나 행위에 있어서 죄 없이 사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 이해되어야 한다. “모양”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깨우치려고 많은 토의를 해 왔다. 확실히 그것은 유사성이나 모방이나 동등함을 강조하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다. 3페이지나 그 표현이 사용되는데 그것은 사람으로나(빌 2:7), 혹은 시험(히 2:17)으로, 항상 육신의 닮음으로 취급해야만 하는 본질의 유사성을 가리킨다(롬 8:3).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17). (372.3)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육욕적인 사람을 ‘닮았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분의 육신은 죄의 생애로 더러워지고 그래서 악한 성향에 빠져 노예가 된 죄 있는 사람의 육신을 ‘닮지’ 않았다. 사도는 ‘닮음(tresemblance)’이란 것을 ‘죄의 법’에 거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육신에 제한하였다. (372.4)
 약 1:15에 의하면 욕심은 단지 죄의 아비이며 그 자체가 죄는 아닌 것이, 죄가 사망의 아비이지만 그 자체가 사망이 아님과 같다. 이 욕심이 인간이 직면하는 시험거리이고 예수 자신도 직면해야만 하였고 그래서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히 4:15) 것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지 않게, 그리스도는 유전과 선천적인 죄성과 악으로 향하는 경향들이 죄가 되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분은 출생시 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언제나 “그릇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택 할 줄” 아셨다. (373.1)
 엘렌 G. 화잇과 전통적 그리스도론 지지자들은 ‘유전적’인 것과 ‘배양된 악의 성벽’을 식별한다.11 만일 예수께서 악한 경향들을 물려받았다면 그는 그것들을 결코 ‘배양’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왜 그리스도께서 ‘인간 정욕의 강한 세력(the strength of passion of humanity)’12은 물론 우리를 시험하는 세력을 경험으로 말미암아13 아셨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유인하는 힘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고 기록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가 된다. (373.2)
 유전된 경향과 배양된 경향 사이의 차이점을 엘렌 G. 화잇이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견된다. 이 설명은 무엇보다도 이 편지가 그리스도께서 타락 전 아담의 죄 없는 본성을 취했다고 단언하기 위하여 신 그리스도론자들이 신뢰하는 근원이 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한 것이다. 진실로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타락 전 아담의 인성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373.3)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성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 그 분은 둘째 아담이시다. 첫째 아담은 죄의 오점이 없는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다. 그는 타락할 수 있었고, 그리고 범죄함으로 타락하였다. 죄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선천적으로 불순종의 성향을 타고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이셨다. 그는 인성을 친히 입으셨고,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과 같은 시험을 한결같이 받으셨다. 그분도 죄를 범하실 수 있었고, 타락할 수도 있었지만 그분 속에는 단 한 순간도 악한 성향이 없었다.”14 (373.4)
 예수께서 갖고 계시지 않았던 ‘악한 성향(evil propensity)’과 아담의 모든 자손에 의해 선천적으로 받은 ‘불순종의 선천적 경향(inherent propensities)’을 동등한 것으로 다룸으로 신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대안적 그리스도론 신학자들같이 엘렌 G, 화잇이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를 그녀 자신의 다른 저술에 반대하여 잘못 해석하여 왔다. (374.1)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급할 때에 그대는 불요불굴의 경계심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주장을 삼갈 필요가 있다. 이는 그대의 말들이 본래 가진 의미 이상의 뜻으로 전달되지 않도록 해서 신성과 연합된 그분의 인성에 관한 분명한 인식을 잃거나 흐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15라고 베이커에게 서신을 보냈다. 엘렌 G. 화잇은 부가해서 말한다. “나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을 깊이 생각케 하는 주제들을 접근할 때에 위험이 있음을 깨닫는다”고 하였다.16 (374.2)
 이런 경고가 있는 고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하여 매우 조심하라. 그분을 사람들 앞에 죄의 성향을 가진 한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17 “어떤 방법으로든 사람들의 마음에다 그리스도께서 타락의 오점이나 성향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그분이 죄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손톱만큼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전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라. 왜냐하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18고 말한다. (374.3)
 아무튼 만일 엘렌 G. 화잇이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 없으셨음을 주장한다면 그녀는 또한 그분의 죄 없는 본성이 “가장 힘든 환경하에서”19“그분이 인간 내면에 깔려 있는 모든 시험의 힘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20 그러나 “어느 한 경우도 사단이 펼치는 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리스도는 사단에게 어떤 빌미를 주는 사단의 시도에 응하지 않았다. 사단은 자기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지 못하였다.” (374.4)
 “기록되었으되가 그분의 무기였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사용해야 할 성령의 검인 것이다.”21 (375.1)
 확실히,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실 수 있었는지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 그러해 왔고, 또한 영원까지 신비”22라고 언급한다. 바울도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하나님)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딤전 3:16)고 말했다. (375.2)
 신 그리스도론 주장들이 어떤 엘렌 G. 화잇의 진술—특히 베이커에게 보내는 서신 가운데서 그들의 근거를 갖고 있는데—그것은 이 서신이 초기 선구자들의 가르침과 완전히 일치되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조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375.3)
 성육신한 이유
 의심 없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언제나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신비를 지닐 것이다. 그 신비는 왜 성육신해야 했나보다는 어떻게 성육신하였나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성경에서도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 지’ 아니면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 그분이 왜 오셨는지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성육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첫째 하나님께서 무엇을 제시하셨는지 그 빛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375.4)
 수세기를 지나면서 신학자들은 왜 성육신하셨느냐에 대한 답변을 하는 가운데 길을 잘못 들여놓았다. 그들은 매우 자주 사람에 대한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설명해 왔다. 대신 형벌받으심의 이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고통을 필요로 했다거나, 아니면 순결한 희생의 피가 죄를 용서하기에 필요했던 것처럼 나타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본부터 당신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출 34:6, 7) 시는 분으로 정의하였다. (375.5)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가 어느 정도까지 잘 못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 5). 확실히 예수님은 화가 난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심으로 당신을 드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 안에서 당신 자신을 해하지 않으셨다. 그분의 오심의 이유를 설명하는 모든 책들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 죄를 위해 보내셨다고 확증한다. 하나님은 항상 구원의 계획을 설계하신 설계자 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로 예수를 제시하신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롬 8:32)이시다. 예수는 주님의 만찬의 상징을 통하여 이 사실을 확증하였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 20). (376.1)
 바울은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를 이해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편지서 가운데서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벧후 3:16) 있다는 베드로에게 동의해야만 한다. 바울의 그리스도론은 참으로 어려운 한 가지 문제를 남긴다. 여하튼 성경의 어떤 곳에도 그가 한 편으로는 “죄에 팔린”(롬 7:14~24) 인간의 비참한 상황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2~4) 보내신 이유보다 더 한 계시를 나타내 보이시는 것은 없다. 바울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중에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자문하는 데 이에 답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 25)고 한다. (376.2)
 사도는 네 가지 특별한 이유를—하나님의 구원 행동에서 왜?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377.1)
 1. 속죄물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