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4. 야훼 샴마—거기 계시는 여호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야훼 샴마(Yahweh šammah)는 “하나님의 영광”이 성취한 일을 설명하는 에스겔의 계시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 거기 계신다”로 구약의 끝 부분에 소개된 성호들 중의 하나이다. 이 이름은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을 짓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고 있다(요 1:1-3, 14). 그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현현(顯現), 즉 육신의 모습에서 비쳐 나오는 신성의 광채를 본다(골 1:15-20). (347.1)
 성령의 감동 아래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광”의 사역을 공개한 것은(겔 1:28; 3:23; 8:4) 친히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받는 고마운 특권을 이스라엘이 느끼게 하기 위한 호소였다. 그러나 선지자의 호소는 거부당했다. 그 “영광”은 드디어 택함 받은 백성으로부터 떠나갔다. 이제 보게 되겠지만 호소가 계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배도는 계속해서 깊어졌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에게서 점점 떠나가고 있었다. 그는 상한 마음으로 마지못해 성전을 나와 그 위에 머무시다가 예루살렘을 멀리하고 그 백성을 버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겔 9:3; 10:4, 18; 11:22, 23). (347.2)
 그러나 이 계시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하나님은 사랑의 봉사와 호소를 그치지 않으셨다. 구원의 이야기가 절정에 다가갈 때 선지자는 주의 영광이 충성스런 남은 백성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이 상황은 성전을 다시 짓고 제사장들과 제사가 회복될 것을 말하는 성전의 “본”을 주의 깊이 “측량”함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겔 43:2, 4, 10, 11; 비교 계 10:8- 11:2). 이 하늘 건물의 본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온전한 성막”의 표상이었다(히 9:11). 그러므로 에스겔의 표상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성취될 일에 대한 통찰을 주는 동시에 그분을 바라보게 했다. 언젠가 그는 육신이 되어 사람들과 어울려 사실 것이다. 그 때 온 우주는 “그의 영광”을 볼 것이며 그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할 것이다(요 1:1-3, 14). 이 계시와 그리스도의 지상 봉사로 나타난 그 성취는 둘 다 “성육신하신 영광”에 의해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닌”(히 8:2) 영원한 성전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일을 예견케 한다. (348.1)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
 에스겔이 주의 깊이 “측량”한 그 아름다운 성전에 그의 말대로 하나님이 거하시게 될 때, 그는 영광스런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 거기에 그가 건설할 웅장한 도시에는 예수의 성육신으로 모습을 보이셨던 본체께서 영원한 왕으로 추대되어 나타나실 것이다. 계시자는 또한 이 황금 도성과 그 재창조된 나라를 놀랍고 상세하게 묘사했다(계 21:1-22:5). 에스겔의 외침을 되풀이하듯 그는 천국 묘사의 절정에서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야훼 샴마라고 외쳤다(겔 48:35 난외주; 비교 계 22:3-8; 22:1-4). 사실상 영원한 세월을 통해, 전에 구속하신 당신의 백성의 신분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셨던 하나님(계 14:1; 비교 계 3:12; 비교 창 4:26 난외주)은 새 예루살렘을 당신의 성호와 임재로 영원히 존귀하게 하실 것이다. (348.2)
 야훼 샴마 (Yahweh šammah)란 성호는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과 당신의 백성에게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한다. 우리는 이미 야훼 란 이름의 깊은 뜻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영원히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존재하는 나”이신 절대자, 삶의 이상(理想)이신 그는 그러므로 당신의 자녀들의 성품과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신다. 그러면 샴마 의 뜻은 무엇인가? (349.1)
 샴마 의 어원적 고찰
 샴마(šammah)의 히브리어 어원은 (šam)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뜻하는 “거기”란 뜻을 가진 말이며, 정확한 위치를 말한다. 이 말이 부사로 쓰일 때는 구체적 시점을 표시한다(시 14:5; 132:17; 삿 5:11). 접두어 (mem)과 합쳐지면 “그 때부터”가 된다. 문학적인 시각에서 (šam)은 시적(詩的) 장면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요소는 드디어 그 말이 표시하는 “거기”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움직여서, 시인이 예상한 사건과 때가 바로 그 절정이 된다. 예를 들면, 시편 기자들은 악인의 생애와 그 최후를 관찰했다(시 36:12). 이 선지자 시인들은 때로는 의인의 최후를 언급했다(시 66:6; 132:17; 비교 렘 18:2). 그들은 역사의 클라이맥스에 가서 그 모든 것을 예수께서 주장하실 것을 강조했다. 그는 당신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거기(šam) 계실 것이다. (349.2)
 하박국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구약의 문체 중 가장 유려하고 감동적인 글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는 찬란한 광채(뿔)가 그의 상한 손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말하고 거기에(šammah, 샴마) 그의 권능의 [비밀이] 숨어 있도다”라고 갈파했다(합 3:4 난외주). 이 구절은 “거기”라는 말로 어떤 공간 또는 구체적 상처 부위를 지적하고 있다. 지혜의 사람은 이 어휘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심판을 위해 정하신 구체적 장소와 정확한 시점을 말하는데 사용했다(전 3:16, “there,” KJV). (349.3)
 (šam)은 역동적 접미사 아(-ah)를 합쳐서 샴마(šammah)가 된다. 이 말은 “저쪽으로”라는 말이 된다. 이 말은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이는 동작을 강조하며(창 19:20, 22; 20:13; 24:6) 우리가 지금 연구하고 있는 성호에서는 부사로 쓰였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구체적 위치와 정확한 시점을 말하며, 그 장소와 시간이 합류하기 위해 접근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계신 여호와는 시간과 공간의 합류점에서 인류를 만나시려고 거기를 향해 움직이시는 분이시다. 그는 미리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거기 계시는 이”로 당신의 신실한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과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이다. (350.1)
 야훼 샴마 가 계시된 시점(時點)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호를 야훼 샴마 로 나타내신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사건을 통해서였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의 포로로 고생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나라는 폐허 속에 방치되고 촌락들과 도성들에는 주민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몰락하여, 솔로몬이 야훼 의 이름에 봉헌했던 아름다운 성전은 완전히 훼파되고 약탈당했다. 그 폐허는 이제 올빼미와 박쥐들의 거쳐가 되고, 말없이 부식되어 흙먼지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도성을 야훼 샴마 라 부를 수 있을까?”라고 선지자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그보다는 훨씬 좋은 상태에 그 이름이 합당하리라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350.2)
 이제 이 사상을 정리해 보자: 계시의 말씀으로 영감(靈感)은 잠시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사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영광”의 사역의 시종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셨다. 제 1 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보좌에 앉아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두려운 위엄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은 그 때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어 주시고 이스라엘을 위한 사역에 착수하도록 영감을 주신다. 그는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고 다시 처음 하던 의로운 생활로 돌이킬 것을 격려한다(겔 2; 3). 선지자는 후속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택하신 백성과 그 이웃 나라들에게 배척 당하는 것을 본다(겔 4-10). 그는 보좌에 앉으신 분이 천천히, 원치 않는 듯이 성전을 떠나고, 드디어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것을 목격한다. 감람산에서 동쪽을 향해 드디어 영광은 그 나라에서 영영 떠나고(겔 10:18; 1:22-24),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그곳에 계시 않으신다! (350.3)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결과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배척하고 또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버리신 까닭은 국가적 패망을 초래할 만큼 날로 악화된 그들의 배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완전히 포기하여 그들이 자업자득한 고난에 빠져 홀로 허덕이게 하지 아니하시고, 계속 성령을 통해 개인들을 불러서 당신과의 언약을 끝까지 고수하도록 격려하셨다(겔 12-39). 그들을 위한 당신의 계획을 설명하시기 위해, 그는 하늘의 한 건물을 보이시고 그 신비한 성전을 치밀하게 측량해 보이셨다(겔 40-46). 이 계시는 그의 충성된 자들에게, 임금께서 보다 크고 영화로운 집을 복구하고 그들 가까이 함께 사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계심을 암시했다. (351.1)
 그리고 성령은 선지자에게 명하여 그 제단 봉사의 뜻을 설명하게 하셨다. “너 인자야, 그 전을 이스라엘 집에 보여주어서 그들로 그들의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그들로 그 양식을 재도록 하라”(겔 43:10). 백성이 이것을 심사숙고했다면, 성소의 의미와 제사장들과 각종 제사의 뜻을 깨달아 자기들의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은 모본 되신 예수와 그의 생애와 봉사를 받아들일 준비를 잘할 수 있었을 것이다(히 8:5). 그랬다면 그들은 주의 사랑에 힘입어 생명수를 마시고 은혜의 강물에서 목욕할 수 있었을 것이다(겔 47:1-12). 결국 그들은 잃었던 땅을 되찾아 다시 온 백성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겔 47:13-48:29). 성령께서는 최후의 승리의 날 그 나라 수도 이름이 야훼 샴마 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이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정부가 위치하고 그가 그들과 함께 가까이 사실 것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실 때가 올 것과 지상에 그의 황금 도성이 자리잡게 될 것을 말한다!(참고 계 21-22). (351.2)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 살 때 어떤 이들은 버드나무에 거문고를 걸어 놓고 울고 싶은 시험을 받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억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해야 할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인생을 다른 관점에서 보며 살았다. 자기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성품을 묵상할 때 그들은 이런 서약을 노래했다: “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 손으로 그 기교를 잊게 하라. 내가 너를 기억하지 아니하면, 만일 예루살렘을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즐거움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하면 내 혀로 내 입천장에 붙게 하라”(시 137:5, 6). (352.1)
 일찍이 아브라함과 모든 부조들에게 주어졌던 확실한 약속이 에스겔에게 반복되었다: “인자야, [이곳은] 내 보좌의 자리와 내 발바닥의 둘 자리요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라”(겔 43:1-7). 그보다 몇 년 앞서 멀리 팔레스타인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와 똑 같은 환상을 보고 외쳤다: “영광스런 높은 보좌는 태초부터 우리 성소가 있는 곳이라!”(렘 17:12). (352.2)
 우주의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
 에스겔은 사도 요한 등 다른 선지자나 시편 기자들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계시를 하늘 도성을 묘사하는 말로 끝냈다. 이사야의 필봉은 구속받은 자들이 안식일마다 거기 경배하러 가는 장면을 서술했고(사 66:22, 23), 요한은 그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나온 자들로 설명했다(계 7:4-10). 그러나 신중한 연구자들은 그들을 인류의 모든 족속에서 나온 자들로 이해할 것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이 도성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각 시대의 하나님의 순례자 백성들을 끌어당긴 천연 자석이라 할 수 있다. 이 도성은 구원받은 자들의 집결지이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정부가 위치할 수도이다. (3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