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신 그리스도론이 나타낸 방법이 계속 자체 내에 오류를 더해갔다. 저자들의 이름도 없이 그리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교리문답이란 제목하에 출판해 낸 것이 굉장한 반박을 일으켰다. 왜 <교리에 대한 질의(Questions on Doctrine)>에 수록된 신 그리스도론이 성서독본보다 더 성서적인 진리로 간주되어야만 하는가? (351.4)
 오직 다른 각도에서의 비평적인 검토로만 해답이 주어질 것이다. (352.1)
 교회에서 정죄 받은 교리
 신 그리스도론은 재림교회의 ‘새 지계석’이라고 지지하는 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확실히 이 가르침을 믿는 어떤 일부 재림교회 신자들에게는 새로 웠지만 그 외 다른 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것은 유감스럽게도 대중적인 그리스도교회들의 교리로 되돌아서는 것이었다. (352.2)
 아담의 타락 전과 같은 죄 없는 인성을 그리스도께서 가졌다는 것을 중시하기 위해, 가톨릭교회 공회의(公會議)는 마리아의 무죄 잉태설을 찬양 하는데 그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반대로 개신교회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나면서부터 허물이 있다는 것에 의거, 어거스틴의 원죄설을 그리스도론의 기초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저들과 같다고 할 수 없으니 그는 죄인도 아니고 허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육신 시 예수는 타락 전의 아담의 본성을 취하였다고 믿고 있다. (352.3)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무염시태설과 원죄설을 반대하였다. 재림교회에 들어온 개심자들은 때때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타락한 인성을 지니고 죄 없는 생애를 사셨는지 선구자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곤란해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갖고 계시지 않았고 만약 인간과 똑같은 성정을 가지셨다면 그와 같은 시험들을 받을 때에 패배하였을 것이므로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성정을 갖고 계셨는지? 확증해 달라”고 엘렌 G. 화잇에게 많은 편지가 왔다. 여기에 그녀의 답변이 있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의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가능치 않았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18 (352.4)
 신 그리스도론은 바로 이 옛 기독교 신조들로부터 돌아서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재림교회에 의해 공개적으로 거절된 신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육체 운동의 불행한 경험을 기억하자. 이 운동 또한 “그리스도는 타락 전 아담의 인성을 취했다. 그래서 그분은 에덴동산에 거했을 때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다”19고 가르쳤다. (353.1)
 이런 가르침은 1901년 대총회시 토의된 것인데 결국 거절된 것이었다. 엘렌 G. 화잇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떠났고 거룩한 육체 운동의 교리를 반대했던 사람들과 함께 하였다. 엘렌 G. 화잇은 그것이 “그릇된 이론과 방법들”로서 또한 “거짓의 아비로부터 비롯 된 값싸고 불행을 가져오는 인간들의 창안”이라고 묘사하는데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았다.20 (353.2)
 신 그리스도론의 지지자들은 재림교 교리 역사에서 이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명의 운동(Movement of Destiny)>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하여 선구자들이 어떻게 저들의 견해 차를 극복했는지 자세히 살펴보는 반면, 그분의 인성에 대하여 저들이 연합해서 무엇을 가르쳐 왔다는 것에 대하여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는 1888년 기별과 와그너와 존스에 의해 일어났던 역할에 대하여 몇 장을 언급하지만 저들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저들의 기별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353.3)
 특정한 의도를 가진 절차
 1956년 9월 미니스트리지 111항에 나타난바 된 신 그리스도론의 기원이 되는 진술은 엘렌 G. 화잇의 9가지 인용구들에 의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석이나 성서적 참고 없이 주어진 것이다. 그 제목은 신신학의 기본적 개념을 선포한다. ‘타락 전 아담의 죄 없는 인성을 취함.’ 그리고 그 인용문들을 개별적으로 소개하면서, 주요 이념을 다시 부각시킬 의도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인성을 취하셨다(Christ Took Humanity as God Created it).” (353.4)
 ‘더럽혀진 죄 있는 본성이 아닌 인간 형상을 취함(Took Human Form but Not Corrupted Sinful Nature)’, ‘아담의 죄 없는 인성을 취함(Took Adam's Sinless Human Nature)’, ‘인성의 완전한 죄 없으심(Perfect Sinlessness of Human Nature)’. 등등.21 (354.1)
 이 문서에 인용된 엘렌 G. 화잇의 인용문 중 어느 하나도 그 작은 표제에 진실로 일치하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어떤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엘렌 G. 화잇은 이 작은 표제들이 암시하고 있는 듯한 것을 결코 기록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녀는 그 반대의 것을 확실하게 단언 했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기독교 신앙의 주요 경로로 이 입장을 받아들임으로, 그리고 이것이 또한 엘렌 G. 화잇의 입장이었다고 확신시키므로, 편집인들은 객관적인 원본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견해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적절히 택한 인용문 조항들을 출판하였다. (354.2)
 <운명의 운동(Movement of Destiny)>가운데 간략하게 줄여 쓴 진술은 또 하나의 전형적인 본보기를 이루고 있다. 참고 없이 인용된 각 진술은 주의 깊이 검토할 가치가 있고 직접적인 원문에 근거했는지, 그리고 엘렌 G. 화잇의 일반적 가르침의 빛 가운데서 설명되었는지 주의 깊이 검토할 가치가 있다.22 우리는 다음 문장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스도는 타락 전(前)의 아담과 같았다. 그는 한 터럭의 죄도 없이,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였다.”23 (354.3)
 그러나 이것은 원문의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첫째 부분인 “그리스도는 타락 전 아담과 같다”는 그 문구는 실제로 엘렌 G. 화잇이 아니고 이 문장의 저자에 의해 쓰여 졌는데 그것이 마치 엘렌 G. 화잇이 쓴 것처럼 제시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인 “그는 한 터럭의 죄 없이,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였다”는 내용은 실제로는 엘렌 G. 화잇의 아담에 대한 묘사였고 그리스도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기록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 원문을 소개한다. (354.4)
 “첫째 아담은 죄의 오점이 없는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이셨다. 그는 인성을 친히 입으셨고, 모든 점에 있어서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과 같은 시험을 한결같이 받으셨다.”24 (355.1)
 만일 엘렌 G. 화잇이 W. H. L. 베이커에게 한 이 진술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다면, 시대의 소망의 다음 진술은 엘렌 G. 화잇이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는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시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25 (355.2)
 ‘잘못된 시도(Enonoeous Methods)’중 하나의 다른 예는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일부분은 동의하고 시대의 소망에 나와 있는 같은 내용의 진술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엘렌 G. 화잇이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 화잇 부인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타락한 인성(fallen nature)’이나 ‘죄 있는 인성(sinful natuure)’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중 “서너 곳”을 강하게 보충했다고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355.3)
 이 “그릇된 절차나 이론들”의 표면에는 모든 유력한 자료들이나 사용된 용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운데 오직 건전한 성서 해석만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연합된 해석을 회복시킬 것이다. 신 그리스도론의 최근 지지자들 중 소수는 아직도 그들의 창설자들의 잘못된 노선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단순한 어떤 논증—실제에 있어서는 단순한 하나의 낱말—이 그들의 견해를 정당화시키려고 사용된다. (355.4)
 그러나 이 논증이 면밀한 검토를 이겨낼 수 있을까? (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