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제단으로의 부르심 제4부 거룩한 열성 제23장 제사는 가시적인 기도
 토머스 핸포드는 오그레이디 대위를 찾기 위해 F-16기를 타고 보스니아 상공을 날고 있었다. 그 때 오그레이디 대위가 다음과 같은 무전를 보내왔다. “여기는 배쉬-52, 나는 살아 있다. 도와 달라.” 적의 속임수가 아닌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핸포드는 오그레이디에게 그가 한국에서 복무할 때 속해 있던 비행중대의 이름을 물었고, 오그레이디는 정확한 이름을 말했다. 그는 분명 오그레이디 대위였다. 핸포드는 상부에 실종된 조종사를 찾았다고 무전을 보냈다. 그가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본부로 돌아 왔을 때 그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 때문에 전투기를 잘 조종할 수 없더군요”라고 그는 회고했다. (183.1)
 오그레이디의 무전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누군가 있었기에 전달된 것이다. 핸포드와 오그레이디는 그들이 교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서로 호환되는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이 같은 전투 비행단 소속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오그레이디는 F-16을 조종했었기 때문에 핸포드의 조종석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183.2)
 오그레이디와 핸포드가 주고받은 짧은 대화가 그에게 실제적이었던 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도 우리에게 실제적인가? (183.3)
 우리는 응답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가? 하나님의 도움이나 용서가 필요할 때, 그분께 감사하기를 원할 때, 그분께 서원하기를 원할 때,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 그런 우리 마음의 소망을 이루는가? 아니면 우리 행동에 확신이 없을 때는 그 결과에 자신이 없는 것과 같이 기도도 실제적이라는 확신 없이 상투적인 문구를 잠꼬대 하듯 중얼거리는가? (184.1)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었다. 하나님은 땅에 그들의 기도가 향할 수 있는 주소를 가지셨다. 그분은 성소 위의 구름, 바로 그곳에 계셨다(출 40:34~38). 그분은 성소로 제한되지 않으시며 본래 하늘에 좌정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들은 성소를 통하여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184.2)
 솔로몬 왕은 기도를 위한 성소의 역할을 이해했다. 그는 성전을 봉헌하면서 백성들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기를 간청했다(왕상 8:27, 30). 솔로몬의 시각에서 기도는 수평적으로 성전을 향해 가고, 거기로부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184.3)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것를 하나님께 드리기 원할 때 혹은 어떤 것를 받기를 원할 때 그들은 희생 제사라는 실제적인 방법을 통하여 그분께로 나아가는 단계를 거칠 수 있었다. 희생 제사는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기도였다. 그들이 기도를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것이었다. (184.4)
 오늘날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의미의 하나님의 지상 거주지는 없다. 그분의 임재는 더 이상 지상에 있는 만남의 장소 위를 운행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더 이상 제사라는 의식을 통하여 그분과 교통할 수 없다. (184.5)
 그러나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림으로 그분과의 모든 상호교류를 이룰 수 있다. (185.1)
 우리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 놓으신 특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으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지금 계시기에 더 이상 지상 제사장의 중보가 필요하지 않다! (185.2)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생 제사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우리의 기도가 실제적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도와 제사가 가진 공통점과 제사의 한 형태로서의 기도를 살펴보자. (185.3)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로 그들의 희생제물을 가져간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기도를 가져갔기 때문에 기도와 제사는 연결되었다. 성경은 성소/성전에서 기도했던 한나(삼상 1:9~11)와 솔로몬(왕상 8:22~53), 히스기야(왕하 19:14-15) 같은 특별한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성전이 파괴된 후에도 다니엘은 그곳을 향하여 기도했다(단 6:10). (185.4)
 특히 다니엘은 성전 있던 곳를 향해 기도한 것뿐만 아니라(단 9:17, 20);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기도했다(단 9:21; 스 9:55; 왕상 18:36). 저녁 제사가 그렇게도 중요했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그날의 마지막 제사였다. 훗날 모두를 위한 예수님의 단 한 번의 희생의 죽음도 그 시각에 일어났다(참고 마 27:46~50). (185.5)
 우리의 기도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갔던 그리스도의 제사를 필요로 한다(레 1:9). 그분의 희생이 향과 같다는 것은 그리스도 당시의 사람들이 성전에서 향이 드려지는 그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과도 조화된다(눅 1:10). 요한계시록 8:4~5은 하늘 성소의 천사가 하나님의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향을 드린다고 설명하고 있다. (185.6)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통도 없을 뿐만 아니라 희망도 없다. (186.1)
 예수께서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부르셨다(마 21:13). 예수께서 인용하신 이사야 56:7에는 희생 제사가 기도하는 집인 성소에서 기꺼이 받게 된다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제사는 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도이다. (186.2)
 오늘날 셰키나(Shekinah)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 영광이 임하는 건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번제단이나 분향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기도하는 특별한 집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186.3)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셨을 때 그분의 말씀은 제사와 관련해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보여주셨다(마 6:9).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로 시작한다. 제사와 기도는 우리보다 높으며 물질적인 영역 너머에 계신 한 존재와 교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보다 위대한 신적인 존재와 특별한 관계 속에 있다. 우리의 창조주로서 그분은 우리의 최고의 존경을 받으실 만한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눅 3:38).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소통하는 것은 우리에게 바람직한 것이다. (186.4)
 그분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인자한 분임을 안다. 나는 가족들과 함께 따스한 햇빛과 만발한 체리 꽃을 즐기며 워싱턴의 백화점 옆을 걷고 있었다. 나는 여섯 살된 딸에게 워싱턴 기념비를 가리키며 그 거대한 탑이 조지 워싱턴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왜 그가 ‘미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줄 아니?”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분이 인자한 사람이었기 때문인가요?” (186.5)
 예수님의 기도는 계속된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다. 그분이 아바“아빠”인 것도 사실이나(롬 8:15; 갈 4:6), 그분의 성호나 칭호는 가장 고상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불리워져야 한다. 고대에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 지정한 장소였다(신 12:5, 11; 왕상 8:29). 그것은 그분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거하시고 소통하시기 위한 “회막(만남의 장막)”이었다. 성소의 기물들과 거룩한 영역 내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며 모든 거룩함이 그분에게서 나온다는 원칙을 반영하고 있다. (18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