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3. 야훼 샬롬—평화를 이루시는 여호와 (평강의 왕)
 예수께서는 그의 지상 봉사 초기에 에이레네(eirēnē)의 참 뜻을 보여주셨다. 그는 12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던 한 여인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완치시켜 편안히 집에서 살 수 있게 하셨다(막 5:34). 그는 막달라 마리아의 죄를 용서하시고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다(눅 7:44-50). 누구든지 그의 제자가 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이 완전한 화평을 갖게 하는 것이 그의 가르침과 이적의 목적이었다(요 16:33). (339.2)
 그가 주시는 이 평화, 즉 그들의 마음 속에 그가 계발하시고자 하시던 이상적 인격은 세상 철학에서는 찾을 수 없는 것이라고 주님은 경고하셨다(요 14:27). “땅 위에 평화”(눅 2:14)를 노래한 천사들의 찬양대가 선언한 평화의 왕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화평의 길”(눅 1:79)로 안전히 인도하리라 한 복음의 약속을 성취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화평에 대한 신학을 계발했다. 악인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나(롬 3:17),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프로그램을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롬 5:1). “평강의 하나님께서” 사단의 머리를 부수심은(롬 16:20), 원복음(창 3:15)에 예고된 약속의 성취이다. (339.3)
 “이기주의적 정신은 불안을 가져온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심성이 질적으로 보다 거룩해지며, 따라서 사람은 인내로 마음을 지키게 된다”(DA 330, 331). 겸비한 제자의 확고한 목적은 무슨 일이 있든지 예수 안에 굳게 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340.1)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와 굳은 의지를 주셔서 우리로 구주의 부르심을 끝까지 따르게 하옵소서. (340.2)
 인생 풍파 속의 평화
 어느 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작은 배로 갈리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여러 날 계속된 피로와 무수한 군중의 요구를 들어주시느라 지치신 주님은 곧 누어 깊이 잠드셨다. 그는 사단이 유발한 급작스런 풍우 대작 속에 제자들이 소동하는 줄도 모르고 조용히 주무시고 계셨다. 드디어 제자들이 격하게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신 주님은 완전한 하나님의 권위로 일어서셔서 그 살인적 흑암을 향해 명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즉시 바람이 자며 구름이 벗어지고 풍랑은 잠잠해져 배는 어둠을 헤치고 잠잠한 호수를 건넜다. 이 연출된 비유는 인생의 거울이다. 인간의 마음 속에 몰아치는 열정과 공포의 풍랑을 제어하시는 이는 예수뿐이다.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 평강의 왕이 되신다. 우리는 무슨 도움이 필요하든지 즉시, 그리고 항상 그의 도우심을 기대해야 한다. (340.3)
 어떤 경우에나 화평을 주시는 예수
 예수만이 죄와 슬픔으로 고민하는 영혼에 화평을 주실 수 있다. “죄는 우리의 평화를 파괴했다. 자아가 굴복되지 않고 있는 한 우리는 쉼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에 작용하는 거센 열정을 제어할 힘은 인간에게는 없다.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이 점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갈리리 호수의 파도를 향해 잠잠하라 하신 이는 모든 영혼에게 잠잠하라 하신다. 아무리 풍랑이 심해도, 예수를 향해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는 자들은 도움을 받을 것이다. 영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는 주의 은혜는 인간의 열정을 잠잠케 하고 심령을 그의 사랑 안에 쉬게 한다. ‘그가 폭풍을 잠잠케 하시니 그 파도가 잠잠해지는도다. 파도가 조용해져 그들이 즐거워하니, 주께서 그들이 원하는 항구로 그들을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9, 30).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을 갖느니라.’ ‘의의 행위는 화평이 되며, 의의 효과는 영원한 평안과 보장이 되느니라’[롬 5:1; 사 32:17]”(DA 336-337). 그러므로 주의 통할 아래 굴복하여 자신을 맡기면 그것이 즉시 안정과 평안의 확신을 마음에 가져온다. (340.4)
 옛날에 바울은 에베소의 친구들에게 편지할 때, 복음이 인종 문제에 작용하는 역할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한때 멀리 있었던 너희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니, 둘[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만드셨고,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중간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으며, 원수 된 것을 ... 그의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3-15). “그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화평을 이루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자기와 화목하게”(골 1:20) 된 것은 그의 갈바리의 죽음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사귀고 그의 뜻에 굴복하면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화평이 초래된다(욥 22:21). (341.1)
 메시야는 평강의 왕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면 화평은 메시야 왕국에 반드시 필요한 최고의 특성이다(사 9:6, 7; 27:5; 53:5; 겔 34:25; 37:26). 신약 기자들은 이 화평을 그 나라를 실현하는 영광스런 복음의 선포와 동등시했다(골 3:15). 메시야는 그의 평화의 기별을 선포하는 일에 그와 하나가 된 모든 사람과 함께(사 52:7; 행 10:36; 롬 10:15) 믿는 자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환경을 조성하신다(롬 5:1). 그리스도는 당신의 일하신 결과를 이렇게 선포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화평을 남겨 두나니 나의 화평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그리스도인은 이 선물을 받은 결과로 항상 “화평의 나라”에 살면서 날마다 “평강의 길”(롬 3:17)로 전진하게 된다. 그 나라는 다른 말로 “하나님의 나라”라고도 한다(엡 4:3). 그 결과 각 시대의 성도들은 하늘의 가납(嘉納)에 대한 완전한 보장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적하는 마음을 버리고 화평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롬 8:6).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행실은 의로워졌다. 이것은 그들이 하늘 나라의 원칙과 화평을 이룬 상태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롬 8:17). (341.2)
 “그리스도의 화평은 진리에서 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조화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율법을 반대하고, 죄인은 자기를 만드신 이를 대적한다. 그래서 인간은 저희끼리 서로 싸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거칠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고 하였다”(DA 302-303). (342.1)
 근심과 분노, 긴장과 좌절은 죄 때문에 초래된다. 그것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원칙에 의해서만 해소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은 화평의 선포인 것이 분명해진다(엡 6:15; 나 1:15; 비교 사 52:7).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평강”이라 부른다(빌 4:7; 골 3:15). 실로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빌 4:9)이시므로 당신을 신뢰하는 제자들을 온전히(몸과 영과 혼을, 살전 5:23; 엡 2:14) 성화시킬 방도를 예비해 놓으셨다. (342.2)
 이런 축복은 탕자인 죄인이 그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와 화해할 때 비로소 실현된다. 하나님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식을 먼 거리에서 보시고 달려나가 그의 귀가를 환영할 준비를 하고 서서 기다리신다(눅 15:20; 엡 2:16, 17). 이 재결합이 이루어지는 거래를 속죄라 한다. 영어로 속죄(atonement)는 at-one-ment 에서 유래된 단어이므로 하나님과 “하나 됨”을 뜻한다. 갈바리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로 인간의 마음에 이런 하나됨을 초래할 수 있게 되셨다(롬 8:6; 14:17; 비교 사 48:22; 롬 15:13). 화평은 메시야적 구원의 열매이다(엡 2:17). 그러므로 모든 남녀는 이를 얻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딤후 2:22). (342.3)
 그리스도는 당신의 “화평의 언약”을 이행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셨다(겔 34:25; 37:26; 눅 2:14; 롬 5:1). 그가 죄인을 위해 하시는 일과 그가 그들의 마음과 그들 공동체에 가져다주는 화평은 “자비”(시 85:9, 10)와 연결된 것일 뿐 아니라, “은혜”와 연결된 것이다(롬 1:7; 고전 1:3; 그 밖의 바울의 편지들의 첫 부분에 나오는 인사말들을 참고하라). 그런 뜻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제자들에게 인사한 것은 그 의미를 자못 두텁게 만든다. (342.4)
 이 평강은 아무에게도 강요되지 않는다
 싸우기 위해서는 두 편이 있어야 한다. 평화를 위해서도 역시 그렇다! 평화의 왕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는 타락한 인간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해야 할 부분을 완수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과 완전한 합일(合一)을 이룰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셨다. 그러나 제자가 이 화평에 들어가기 위해 자기가 해야 할 부분을 하지 않으면 그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시려는 일이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중의 평강”을 약속하셨지만(“평강이 있을지어다”를 두 번 말한 것은 누구나 원하는 자는 충만하게 받는다는 뜻의 히브리적 표현—사 57:19 난외주), 이 목표를 달성키 위해서는 신자 편에 투철한 의지와 완전한 신뢰가 요구된다(사 26:3). 실제로 제자가 이 “큰 화평”(시 119:165)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면에 야훼샬롬 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삶이 흐르는 강물처럼 평온하고 원만하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사 48:18; 66:12). (343.1)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사람이 무슨 노력을 해도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평강은 신의 능력을 의지할 때 온다. 영혼이 주어진 빛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심하기가 무섭게 성령은 더 많은 빛과 힘을 주신다. 성령의 은혜는 영혼의 결의를 돕기 위해 주어지나 그것이 개인적 믿음의 활용을 대신하지는 않는다”(TM 518). 하나님의 자녀는 전심 전력을 다해 “화평을 구하고 그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시 34:14). 한 무명의 시인은 이런 글을 남겼다: (343.2)
“하늘의 평강을 받은 마음, 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인가!
죄인이 보혈로 화목케 된 것, 이것, 이것이 평강이다!”
(344.1)
 예수께서 다스리는 곳에는 평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