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제4부 재림교회 중심부의 그리스도론 논쟁 제14장 역사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
 조지 스티븐(Georges Stéveny)은 Collonges—sous—Saleve의 재림 교회 세미나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제네바 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했다. 교수로서 여러 해를 지난 후 프랑스와 벨줌에서 목사와 전도자로 18년간 재림교회에서 봉사하였다. 뛰어난 설교자로 그는 자신의 철학적이고도 성서적인 주제에 관해 한 때 큰 청중들을 장악하였다. 1967년 Collonges—sous—Saleve의 재림교회 대학원에서 신학교수로 부름을 받고 그 후에 1970년부터 1980년까지 대학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스위스, 프랑스 합회장으로 그리고 1985년부터 1990년까지는 유로—아프리카 지회의 총무부장으로 봉사하였다. (324.2)
 비록 그가 수많은 기사를 썼고 많은 출판물의 편집인으로 일했지만 그는 그의 저서인 <A la decouverte du Christ>를 은퇴한 후에 집필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의 전 생애의 지적이고도 영적인 수고의 소산물을 나타냈다. 이것들은 두 분야에 대한 그리스도론 형태로 제시되었다. 첫 번 째로 ‘더 낮은 그리스도론(lower Christology)’ 으로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생애를 통해 그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역사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그 다음은 두 번째 것으로 ‘더 높은 차원의 그리스도론 (higher Christology)’으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의 이런 면모가 특별한 흥미를 끄는데 이는 성육신을 취급할 때 그 함축된 의미와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96 (324.3)
 그 다음 뒤따르는 방식은 그리스도론의 각 장마다, 요한복음을 서두로 시작해 바울 편지서까지 열쇠가 되는 페이지들을 끝까지 탐구해 조직적으로 그 해석을 다루고 있다. (324.4)
 그것은 성서적인 계시 연구에 전적으로 기반을 눈 그리스도론이다. 그의 연구는 독자들에게 “예수는 당신이 성육신되기 전에 하나님이셨다”는 것과 “그분은 당신의 굴욕에도 필연적으로 하나님 이심을 드러내셨다.”97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해 오셨다. 그는 사람이 되셨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러므로 한 질문이 생기는데 추호의 의심도 없이 섬세하면서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실제로 우리와 얼마만큼 동일시 되셨는가? 그는 타락 전 아담의 본성을 취하셨는가 타락 후의 본성을 취하셨는가?”98 (325.1)
 조지 스티븐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전의 본성과 같은 본성을 지녔다는 부분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바울식의 표현은 타락 전의 아담과 같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두 상황 곧 두 아담에 의해 경험된 아주 명백한 두 상황 사이에 차이점을 선언하기란 넉넉지 않다. 그들이 똑같은 육신으로 살지도 않았고 똑같은 본질로 살지도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잘 인식할 필요가 있다.”99 (325.2)
 “아담의 타락 전의 것과 같은 육신으로 예수께서 사셨다고 말하는 것은 거룩한 계시의 말씀과 맞지 않는다. 그러나 타락 후의 아담의 육신과 그는 동일하셨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또 다른 과오가 생길 것이다.” (325.3)
 “우리는 타락 전이라든가 타락 후의 예수의 본성을 단순하게 아담과 관련시켜 정의하려고 하므로 우리 스스로 거짓된 방편으로 묶는 것이다. 예수와 인간 사이에는 크고도 필연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이는 사람은 그 존재 사제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00 “예수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는 또한 사람이시다. 그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입장으로 새로운 영역을 점하셨다.”101 (325.4)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육신과 그분의 내적 기질이 정확히 무엇인가? 그분이 우리와 동일시되신다는 것이 어느 정도 그러한가?”102 인간의 상태를 새롭게 하기 위해 그는 전적으로 다른 국면을 취해야만 했다. (325.5)
 하나의 더 없이 순수하게 닮는다는 그 정도가 하나님이 “육신의 모양”(롬 8:3, KJV)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바울의 선언과는 조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멸하신 것은 육신 가운데서였다(역자 주: condemned는 폐기처분하다, 멸하다라는 의미가 있음). 사도 바울의 선언은 예수께서 우리와 동일한 조건들 아래서 저항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 가치가 있다. 이것을 허용하는 데 실패하면 모든 이유가 결함이 있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죄 된 본성을 따라 살지 않고 영에 의해 사는 우리 안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다’(롬 8:4).”103 (326.1)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똑 같은 조건에서 시험을 당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씨름은 불평등하고 그의 모본은 부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104라고 스티븐은 주장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육신 가운데 죄를 정하신 자를 통하여 다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런고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하자. 성령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성취할 수 있었던 똑같은 사역을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그 안에 복음의 필수적인 전망이 놓여 있다. ∙∙∙ 인도자격인 아담에 의해 위태롭게 된 인성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안심을 주는 말씀인지 모른다.”105 (326.2)
 윌리암 G. 존슨이 조화를 모색함
 <어드벤티스트 리뷰>지에서 발간한 다섯까지 편집물 시리즈 가운데 편집 국장인 윌리암 G. 존슨(William G. Johnsson)은 자신의 기사인 “비할 데 없는 우리의 구세주”106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논쟁을 잠잠케 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편집물을 내는 나의 목적은 한편이 옳고 다른 편이 틀렸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 나는 모든 마음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백성 중의 지혜 있는 자들에게 그리고 상식이 있는 자들에게 호소하려고 한다. 그들에게 나는 큰 확신을 가지고 있다.”107 (326.3)
 재림교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신성을 고백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존슨은 예수님의 인성도 똑 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명확히 말해 동 시대에 살고 있는 재림신도들 사이에 논쟁점이 놓여있다. 존슨은 객관적으로 쌍방의 요점을 잘 조율하고 재구성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예수의 인성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108 그의 답변은 정확히 히브리서에 관한 그의 주석서 가운데 나타나 있다.109 “이런 특별한 논쟁점에 있어 신약성서는 침묵하고 더 이상 잠잠하기를 바란다. 나의 판단으로는 한 교회로서의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를 성경보다 더 자세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기본신조이며 지혜로운 일이다.”110 (327.1)
 “그렇지만 엘렌 G. 화잇은 예수님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111 존슨은 질문한다. 그녀는 그분의 인성만을 강조한다. 그리고 쌍방의 신비스런 연합을 강조한다. “그는 슬픔과 아픔과 시험을 경험하셨다. 그의 시험들은 실제적이었다. 그는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에 직면하셨다. 그러나 그는 죄 없는 완전한 생애를 사셨다. 그는 우리의 비할 데 없으신 구주이시다.”112 (327.2)
 만일 엘렌 G. 화잇이 우리가 예수의 인성을 연구하도록 격려했다면 그녀는 또한 우리로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이 주제를 취급하도록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대할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아담의 타락 전이었는지 타락 후이었는 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는가?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그녀가 무엇을 기록하였는지는 물론 무엇을 기록하지 않았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113 (327.3)
 엘렌 G. 화잇은 재림교회 기별의 ‘기초(foundations)’‘기둥(pillars)’에 관한 수많은 언급을 했는데 그것들 중 그리스도의 인성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엘렌 G. 화잇의 진술들을 양편의 견해의 요지를 지지하기 위한 진술을 찾아내는 일은 쉬운 것이다. (327.4)
 실제에 있어 존슨은 엘렌 G. 화잇이 “예수께서 진실로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경험을 맛보셨으나 또 한편 그분은 중요한 관점에서는 우리와 닮지 않으셨다. 그는 신인[神人]이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정욕(passion)이나 악으로 기우는 기질, 죄에 대한 성향을 나누어 갖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와 같으셨지만, 우리와 같지 않으셨다. 긴장 가운데서 이런 두 가지 사실을 지지할 때 만이 우리는 그녀에게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114 (328.1)
 존슨은 그 토의가 실제적인 문제 곧 죄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자주 말하였다. “거론되고 있는 논쟁점 바로 뒤에 숨겨져 있는 논쟁점은 죄에 대한 개념 문제이다. 예수의 인성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만일 그들이 예수께서 인간의 타락 전에 오셨는지 그 후에 오셨는지 논쟁을 멈춘다면 그리고 죄 자체에 대해 성서가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 탐구하기 위하여 시간을 사용한다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이다.”115 (328.2)
 존슨은 성서가 죄는 불법이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관심을 촉구한다 “예리한 분석을 하는 가운데 바울은 죄를 하나의 권세, 내주(內住)하는 하나의 원칙, 상태 — ‘내 속에 거하는 죄’(롬 7: 14~20) 등으로 묘사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이 죄 될 뿐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과 원수 상태에 있다고 말한다.”116 (328.3)
 “예수께서 이런 본성을 지니셨는가? 아니면 만약 그가 그런 본성을 취하고 있다면, 그는 스스로 구주가 필요했으리라. 그는 악에 대한 어떤 경향도, 당신을 시험에 기울게 하는 도덕적 본성의 어떤 왜곡됨도 없으셨다. 그는 행동에 있어 전혀 무죄한 분이셨으나 또한 그의 내부에도 그런 것이 없으셨다.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셨다(히 7:26).”117 “그러나 나는 하나의 전혀 다른 구주가 필요한데 죄 문제가 없는 스스로에게 구세주가 필요치 않는 구주가 필요하다. 나의 구주는 죄의 얼룩으로부터 떠나 계실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셔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죄를 가져가실 수 있으시다.”118 (3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