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5 부 내 제사장이신 예수님과 함께 (죄와의 교제 관계로부터의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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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가 무지개를 그릴 수 없고, 조각가가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할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한 묘사조차도 우리의 감각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실체를 항상 빠뜨리는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성막을 재고” 하나님께서 모두 다 직접 설계하신, 그 눈부신 상징물들을 자세히 조사하고, 포착하기 힘든 그 의미들을 탐구하고, 상징물들이 표현하는 하늘과의 관계를 비교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구세주의 품성과, 봉사의 감추어지고 무언의 느낌 없는 그림자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검토하면서 또 다른 계시가 있는 분야를 발견하도록 해보자. (258.1)
 성소의 상징적 의미에 관한 검토
 우리는 뜰에 들어가서 저항하지 않는 제물이 피흘리는 것을 보고, 또 그 제물의 몸이 하늘의 불로 타오르는 놋 제단 위에서 재로 타버리는 것을 본다. 번제단은 “창세 이후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신 예수를 상징하였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물두멍을 보게 된다. 이 물두멍은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드린 거울들로, 정결케 하는 물을 담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물두멍은 우리 죄를 비추어주는 율법을 속삭여주고, 그 죄가 제거되는 방법, 즉 하나님의 정결의 샘을 나타낸다.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여 주는 이 물이 모세가 지팡이로 친 바위에서 터져 나온 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뜰에서 불과 물, 그리고 피에 관심을 두며(비교 요일 5:8), 구세주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자신의 성도들을 의롭게 하려고 주시는 삼중 선물을 찬양하는 복음의 삼 중창단이 하는 노래를 듣는다. (258.2)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궁전의 거룩한 곳 안으로, 명상에 잠겨하는 순례여행을 계속하여 나아간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사로잡도록 아름다운 그 번쩍이는 벽과 그 멋진 휘장(tapestry), 그리고 그 빛나는 상징물을 상상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에서 고요하게 타오르면서 우리가 가는 영광에로의 노정을 비추어주는 이 세상의 빛이신 분의 사랑과 희생을 단지 희미하게만 볼 뿐이다. 우리는 화덕에서 막 구워냈고, 정금으로 입힌 상 위에 놓여 있는 생명의 떡의 냄새를 맡는다. 우리는 그 진설병상 근처에 발로 밟아 짜낸 붉은색 포도음료가 놓여 있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두가지 상징물들은 신랑이신 왕께서 혼인 잔치에 모인 하객들이 영광에로의 여행을 계속하도록 힘을 내게 하는 영양 공급을 하여 주시고자 깊이 염려하시는 모습을 단지 희미하게 밖에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지 못한다. (258.3)
 우리는 그 곳에서 내내, 그리스도의 중보의 향기가 스며들어가 있고, 하늘로 올라가는 향의 흰 구름같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분위기를 마신다. 하지만 이 모든 가구들이 소중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대신하여 부드럽게 탄원하시는 동정에 찬 목소리를 이것들로부터 듣지 못한다. (259.1)
 그런 후에, 우리는 상상 속에서 안쪽 휘장 속으로 들어간다. 지성소에서 쉐키나로 번쩍거리며 우리를 압도하는 법궤를 느끼고, 반석에 새겨진 율법 위에 놓여진 속죄소 위에 서 있는 신비로운 그룹들을 상상한다. 그 상자 안에 있는 가지(the Branch), 목자의 지팡이, 생명으로 진동하는 왕의 홀과 유지시켜 주는 만나가 담겨 있는 금 항아리를 기억한다. 하지만 이 장대함 가운데서 우리는 영원한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분의 본성을 파악하는 것에 실패한다. 이 희미하게 비치고, 꿰뚫을 수 없는 광채가 그분의 사랑스런 인격에 접근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보인다. (259.2)
 개인적인 인도와 도움이 필요함
 우리는 멍한 낙담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인격에 관한 더 확장된 계시가 필요함을 느낀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은 이 거장 예술가의 붓놀림이 빛나는 모형들과 달아오르는 상징물들에다가 그리스도의 사랑스런 모습을 희미하지만 확실하게 남겨두기를 원한다. 이 “영광스러운 성소”“거룩함의 아름다움”(시 28:2, 난외주; 29:1, 2, 난외주; 96:9, 난외주; 110:13), 혹은 성막의 비길데없는 가구는 구세주의 애정어린 성향을, 인간의 필요에 대한 그분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관심을 전하여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시는 것과 우리의 상처와 필사적인 필요를 긍휼히 여기시는 점은, 인간의 이해를 위하여 그 깊이와 범위를 표현하여야 하는 살아있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연인의 목소리만이 사랑받는 자의 사랑을 깨울 수 있고, 인자의 임재의 따뜻함만이 죄인의 차가운 무관심을 녹일 수 있다. (259.3)
 여호와께서는 생명에 필요한 이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하여 인간이 제사장으로 봉사하도록 부르셨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오직 살아있는 사람만이 죄 가운데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동정을 항상 보이시며 사신 그분의 일부분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 가진 모든 제한점을 가진 이스라엘의 인간 제사장들에게서 우리의 대제사장(히 5:4, 5)이신 그리스도의 인간됨의 일부분을 관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제사장직을 고안하셔서 자기 아들이 고대 백성들에게 행할 은혜의 사역의 일면을 드러내 보이셨고, 바울은 이 모델을 사용하여 우리가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시는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히 3:1)를 이해하는 것을 도와 준다. 그분을 “깊이 생각”하면서 바울의 방법을 따라, 영원하신 성령님이시여 당신의 빛을 우리에게 주셔서 예수의 사랑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하소서 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아론의 제사장직에 관하여 연구를 하도록 하자. (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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