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1. 야훼 막케—치시는 여호와 (엄격한 훈계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남용하고 그가 무한정 오래 참으실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죄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지 않으실 수 없는 한계점이 있으므로 심각한 문제들이 생긴다. ‘주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능력이 크시며 악인을 결코 면죄해 주지 아니하시도다’(나 1:3).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놀라운 것이다. 그는 자기의 본성을 제어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벌은 확실히 따르게 마련이다. 각 방탕의 세기마다 진노의 날을 위해 진노를 축적해 두었으므로 때가 차고 죄악의 잔이 넘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이상한 일을 하실 것이다. 하늘의 인내가 끝난 두려운 결과를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자비가 섞이지 않은 그의 진노는 심하고 맹렬하게 내려 땅을 폐허로 만들 것이다. 사단의 정책을 따라 나라가 하나님을 배신할 때 이 땅의 정치인들은 죄악의 사람과 한편이 될 것인데, 그 때 죄악의 도가 찰 것이며, 국가적 배도는 국가적 파멸의 전조가 될 것이다”(SM 2:372-373). (315.1)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사건은 연출(演出)된 비유인 동시에 야훼 막케의 역사를 설명하는 강력한 예증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 한 그루를 심은 후에 와서 그 나무에서 열매를 찾았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한지라, 그가 포도원 지기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삼 년 동안 내가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으나 얻지 못하니 ‘잘라 버리라. 어찌하여 쓸데없이 땅만 버리느냐?’고 하니, 그 포도원 지기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여, 금년만 그대로 두소서. 그러면 내가 그 주위를 파고 거름을 주리이다. 만일 열매를 맺으면 좋거니와 맺지 아니하면 그 때는 잘라 버리소서’라고 하였느니라”(눅 13:6-9).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를 대표하는 이 나무는 총 4년의 유예 기간을 선고받은 셈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음을 선언한 침례 요한이 외친 반년 기간에(마 3:10), 3년 반 동안 계속된 그리스도의 공중 봉사 기간을 합친 4년인 것이다. (315.2)
 당신의 공생애가 마쳐 갈 무렵, 그러니까 이 4년 기간이 끝나 갈 때 예수께서는 택하신 백성을 대표하는 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다. 그가 감람산 위에서 내려다보실 때, 그의 눈앞에는 도성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손에손에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 그를 메시야로 알고 환호하던 군중의 의혹과 흥분은 갑자기 잠잠해졌다. 그의 얼굴에서 그들은 기쁨과 만족 대신 말없는 눈물을 본 것이다. “그의 떨리는 입술에서 마치 깊은 상심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울음이 터져 나올 때 그의 몸은 강풍 앞에 굽어지는 나무처럼 흐느끼며 요동했다”(DA 575). “예수의 가슴을 찌른 것은 예루살렘의 광경이었다.... 그녀를 구하러 오신 그가 어찌 그녀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은 그가 돌보신 자식이었다. 부드러운 아버지가 고집스런 자식을 보고 우는 것처럼, 예수는 사랑하는 도성을 보고 우셨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네가 망하는 것을 보겠느냐?”(DA 576-578). 그는 눈물로 울부짖으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마치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 23:37, 38). (316.1)
 그 다음날 일찍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어떤 나무”로 가셔서(마 21:19, 이 “어떤”은 헬라어 성경에서 이미 독자가 아는 특정의 실물을 말함), 열매를 찾으셨다. 그러나 농부가 지난 4년 동안 특별히 거름을 주고 돌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향해 마르게 하는 저주를 말씀하셨다. ‘이후로는 영원히 아무도 네게서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구세주의 저주 아래 뿌리까지 마른 채 서 있는 시들고 꺼칠해진 그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은혜가 제거되었을 때 유다 백성이 어찌될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축복 받기를 거절했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그것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오 이스라엘아, 네가 멸망을 자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DA 582-583). 여기 마지막 문장들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의 저주는 그의 축복과 은혜가 거두어질 때 오는 것이다. 거절하면 그의 축복과 은혜는 제거되고 거절한 자의 영혼은 시들어 버린다. (316.2)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찾아오시기 전에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그가 가르치신 열매 없는 나무의 교훈과 직관된 것이었다.... 불모의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해 결과가 드러났다. 그들은 자기들의 파멸을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DA 584). (317.1)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인자하신 구주께서 왜 그런 무자비한 일을 하셨을까 하는 의아심을 품을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무화과나무 저주는 제자들을 대경실색케 만들었다. 그것은 너무도 그리스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빈번히 그들은 그가 오신 것은 세상을 저주하려 함이 아니고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라는 말씀을 들었었다.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눅 9:56). 그의 경이로운 일들은 회복을 위한 것이었지 결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자들은 그를 오직 회복자로, 치유자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야훼 막케, 치시는 예수의] 행위는 동떨어진 별개의 현실이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그들은 물었다”(DA 582). (317.2)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하나의 연출된 비유였다.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무성한 잎사귀들을 자랑이라도 하듯 과시하며 허세를 부리던 불모의 과수는 유대 나라의 상징이었다. 구주께서 원하신 것은 그 원인과 확실한 파멸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리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그는 그 나무에 교육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거룩한 진리의 해설자가 되게 하셨다”(DA 582). (317.3)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그 저주로 가르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오늘날 보다 폭넓은 세계사적 화폭 위에 옮겨져야 한다. 인류가 옛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배척하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을 멸할 것이다. “이 경고는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당신의 권능으로 만드신 나무를 저주로 치신 행적은 모든 교회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경고로 서 있다”(DA 584). 예수께서는 야훼 막케 의 절대 불변의 성품을 나타내신 것이다. (317.4)
 오늘 우리 구주의 음성은 옛날 예루살렘을 부르셨던 것처럼 우리를 부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영혼에 쉼을 얻으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마 11:28-30). 아무도 하나님께서 치심는 매를 맞을 필요가 없다. 예수께서 그를 위해 이미 십자가에서 대신 맞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7세기초 한 성도가 읊은 시를 읽고 그의 신학을 음미해 봄이 좋을 것이다. (318.1)
우리는 함께 모여 주의 축복을 기원하네.
   그는 견책하고 서두르며 당신의 뜻을 알리시네.
우리를 괴롭히던 악인들의 핍박이 멎었으니
   주의 이름을 찬양하세.
그는 자기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네.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도하시며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고 지키시도다.
그래서 처음부터 우리는 싸움에 이기도다.
   당신이 우리 곁에 계시니
주여, 모든 영광이 주의 것이옵니다.
(318.2)
 하나님, 우리 마음을 일깨우사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모든 공로를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고마워하게 하옵소서. (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