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1. 야훼 막케—치시는 여호와 (엄격한 훈계자)
 최후의 심판이 땅위에 쏟아질 때에 관한 에스겔의 계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 막케 (Yahweh makkeh), 즉 “여호와는 치시는 자”로 소개된다(겔 7:9). 우리는 그런 장을 너무 빨리 읽고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아마 사랑의 아버지께서는 자녀를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는 이론을 고수하려는 무의식적 거부 행위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한 짐작이나 우리 스스로 꾸며낸 어떤 이해를 비호하려 할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보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하나님의 성품과 다른 어떤 면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에 구애받음이 없이,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믿고 기도하며 신중히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304.1)
 우리는 이 연구를 이런 가설을 전제로 진행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 17). 그러므로 성경 연구자는 마땅히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고 그 말씀이 가르치는 전체적 내용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정리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05.1)
 이제 우리가 그분의 많은 이름을 연구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각 성호를 통해 알아 본 것은 그의 성품의 어떤 일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즉, 어떤 성호도 하나님을 완벽하게 제시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일면을 고의적으로 제외해 버린다면 분명히 전체를 왜곡시키는 결과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정보를 전체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 유한한 인간들에게 가르치기 바라시는 원만한 이해를 우리가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야훼 막케(Yahweh makkeh), 즉 “여호와는 치는 자”란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305.2)
 에스겔이 본 자기 희생적 사랑의 영광
 에스겔서는 그 처음 장부터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다루고 있다. 그 영광이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드러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봉사 생활을 통해서이다. 온 우주는 그의 얼굴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의 영광,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 즉 “자기 희생적 사랑의 영광”(DA 21)을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는 선물인, 아버지의 “영광”의 축도(縮圖)이신 그 사람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배척을 받을 것이라고 에스겔은 지적했다. (305.3)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는 자”로 나타내신 것은 에스겔 당시의 배경에 근거한 계시였다. 자신들의 반역의 대가로 하나님의 선민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가고 그들의 도성은 약탈당하고 성전은 소실되고 온 나라는 폐허가 되었다. 하나님은 당시 백성의 시대적 종말을 “끝”(겔 7:1-27)이라 했는데, 그 때의 끝남이 세상 “끝”에 있을 일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에스겔 선지자 때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말세”에 있을 역사의 모델로 알고 연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05.4)
 에스겔 7장에서 선지자는 하늘의 염려를 기술했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유일한 재앙이 임하였도다. 끝이 왔도다. 그 끝이 왔도다. 끝이 너를 찾나니, 보라, 끝이 왔도다”(겔 7:5, 6). 여기서 성령은 단순히 그 시대의 이스라엘의 종말을 고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의 장면들을 묘사하신다. 그가 사용한 어휘들을 검토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바로 “세상 끝”에 대한 예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선지자가 이 “끝”을 말할 때 “유일한 재앙이” 올 것이라 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유례없는 특별한 파멸을 예상하게 된다. 다니엘은 이 때를 “민족이 생긴 이래에 그 때까지 결코 없던” “고난의 때”라고 서술했다(단 12:1). (306.1)
 인류 역사의 이 시점에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당신의 결심을 공개하셨다. “내가 네 행위에 따라 너를 심판하고 네 모든 가증함을 네게 갚으리라. 내 눈이 너를 아끼지 아니하고,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행위와 네 가운데 있는 가증함에 따라 네게 보응하리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가 치는 주(야훼 막케)인 줄 알리라”(겔 8:8, 9).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는 그의 백성이나 세상이 마침내 그의 보호와 은혜의 한계를 벗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306.2)
 보통 구어의 막카(makkah)와 그 말의 여러 변형들은 나카(naḵah)라는 어근에서 나온 말들인데, 나카“치다, 죽이다, 말뚝으로 찌르다,” 등의 뜻을 가진 말이다. 로버트 영(Robert Young)은 KJV에 이 말이 모두 21가지로 번역되었음을 보여 준다(Young's Concordance를 보라). 이 말이 쓰인 용도와 그 배경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모든 경우를 고려해 볼 때 이 말의 의미가 분명해지고, 이 말로 표시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306.3)
 나카 의 뜻 몇 가지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소돔에 온 두 천사는 손님을 내 놓으라고 아우성치며 롯의 집 문을 부수려던 불량자들을 모두 쳐서 눈을 멀게 했다 (창 19:11). 여호와의 명령으로 우박이 내려 하나님을 무시한 참람된 애굽의 모든 것을 쳐서 피해를 입혔다(출 9:25). 여호와께서는 나일 강을 쳐서 강물이 피가 되게 함으로써 애굽 강신(江神)의 무력함과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다(출 7:25, 20과 대조).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을 무시한 백성을 전염병으로 쳐서 없앨 것이라 위협하셨다(민 14:12). 다윗의 양심은 하나님의 금하심과 친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계수한 그의 교만을 찔렀다(삼하 24:10). (307.1)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hakkotṯ naḵah의 변형) 자는 벌을 받으리라 하셨다(창 4:15).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지 않고 종으로 팔기로 결정했다(창 37:21). 모세는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묻었다(출 2:12).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그들의 원수를 치실 것을 약속하셨다(시 3:7). (307.2)
 질투심으로 발광하던 사울은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 했다(삼상 18:11). 이 동사는 또 사람의 용기가 꺾이고 슬픔으로 찌름을 당한 상태(사 66:2), 발이 불구된 것(삼하 4:4), 사람을 악담으로 잡아먹는 것(시 35:25) 등을 묘사한다. 원수들은 예레미야를 파괴할 것을 모의할 때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자라고 말했다(렘 18:18). 태양은 그 뜨거운 열로 요나를 쳤다(욘 4:7,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충성된 백성을 마지막 일곱 재앙 때 태양이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다(시 121:6). (307.3)
 우리의 죄 때문에 채찍을 맞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만일 우리가 야훼 막케 (Yahweh makkeh)께서 사법권을 발동하실 때 죄인을 어떻게 치실 것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아버지께서 겟세마네와 갈바리에서 아들이 어떤 형벌을 받도록 허락하셨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사 53:4). 구주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에 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섞인 것 없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몸소 당하셨다. 지구성 전 주민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께서는 그 결과 부득불 아버지와 결별하는 두려운 잔을 마셔야 했다. 그것은 죄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또한 그 결과로 그는 사람들의 욕설과 마귀의 보복,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배반까지 당하셔야 했다. 야훼 막케 는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 하여 아들의 고난과 매질을 조금도 감해 주지 않으셨다. 죄인들이 맞아야 할 매가 그에게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각 죄인이 당해야 할 처벌을 홀로 다 담당하셨다.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은혜의 시기가 끝날 때 그가 받으신 것과 유사한 매질을 마땅히 당해야 할 것이다. (307.4)
 영원하신 아버지여, 구주께서 우리 대신 갈바리로 가시도록 허락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원하신 성령님, 우리로 합당한 자가 되게 하소서. (308.1)
 주께서는 메시야의 고난을 이런 놀라운 말로 예언하셨다: “목자를 치라 그리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슥 13:7).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방황할 때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고, 그 물을 마시고 백성이 기운을 차리고 몸을 씻었던 사건에 의해 이미 상징적으로 예고되었다(참고 출 17:6; 시 78:20). 한 번 내려 쳤을 때 바위는 갈라졌다. 예수는 바로 이 예언적 성구들에 어렴풋이 묘사된 목자와 바위이다(참고 창 49:24; 마 26:31; 막 14:27). 목자요 희생양인 주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치심을 받으셨다(사 53:4). “내가 치는 자들에게 내 등을 ... 맡겼노라”(사 50:6)는 말씀은 우리 구주께서 그 일을 자원해서 당하셨음을 보여준다. 당신께서 그렇게 하시는 동기를 드러내기 위해 주님은 당신의 고문자에게 “어찌하여 네가 나를 치느냐?”(요 18:23)고 물으셨다. 그리고 마태는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마 27:30). (308.2)
 모세의 법에 의하면 재판관들이 어떤 범법 행위에 대해서는 죄인에게 매질을 40대까지 하도록 언도할 수 있었다(신 25:2, 3). 죄없는 구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빌라도의 법정에 서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가 그 무참한 매질을 두 차례나 당하시고 주먹질과 악랄한 폭행을 무수히 당하신 것은 인류를 위하심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대접을 받으신 것은 그가 마땅히 받으실 대우를 우리가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죄에 대해 그가 아무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죄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아무 공로 없이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당하신 것은 우리로 그분의 생명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DA 25). 갈바리 사건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야훼 막케 의 역할을 맡으신 분으로 계시되었다. (309.1)
 옛날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고 물으셨다(사 1:5). 여러 해 후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그들이 그런 매질을 당하도록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이유를 말했다: “오 주여, 주의 눈은 진실을 보지 않나이까? 주께서 그들을 치셨으나 그들은 슬퍼하지 아니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소멸시켰으나 그들이 바로잡히기를 거절했나이다. 그들은 얼굴을 바위보다 더 굳게 하여 돌아오기를 거부했나이다”(렘 5:3).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진노로 내가 너를 쳤노라”(사 60:10)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치심을 동시에 보게 된다. 그 둘이 하나로 결합된 것은 잘못된 것을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그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그는 사단에게 욥을 헌데를 앓는 병으로 치도록 허락하셨다(욥 2:7). 그로부터 16 세기가 지난 후 사도 야고보는 주의 치심에 대해 말하기를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또 주의 결말(궁극적인 의도와 목적)을 보았거니와 주는 인정이 심히 많으시고 자비로우시니라”고 하였다(약 5:11). (309.2)
 우리는 나카(naḵah)란 말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치다, 때리다, 죽이다, 찌르다, 상처를 주다, 재앙을 내리다 등의 여러 말을 쓴다. (3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