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설명은 우선 매력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그것은 두 견해 사이에서 발생하는 반대를 공격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얼마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더 부가해 그리스도의 두 인간 본성이 있다고 함으로 더욱 혼돈을 초래할 수 있다고 비난할 수 있다. <애드벤티스트 리뷰>지의 독자란에 논평들과 항의가 쏟아졌다. 다음은 도널드 K, 쇼트(Donald K. Short)의 글 가운데서 발췌한 것이다.

 “엘렌 G. 화잇은 ‘그리스도의 타락전 본성’에 대한 언급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 이와 같은 것을 넌지시 비추면, 그가 말도 안한 것을 말했다고 하여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엘렌 G. 화잇이 예수님을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떠나게 할 리가 없고, 범죄 전(prelapsarian)과 범죄 후(postlapsarian)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할 리도 만무하다. 이런 혼란스런 일이 어떻게 ‘우리 교회 내의 연합’이란 명목으로 장려되어야 하는가?”20 (275.4)
 허버트 더글러스는 <애드벤티스트 리뷰>지의 편집인에게 두 가지 글을 써 보냈다. 둘 다 “왜 천사들이 베들레헴에서 노래를 불렀는가?”21라는 의미 깊은 타이틀로 1983년 크리스마스 때 출판한 것이었다. 더글러스의 견해의 전체적 요점은 빠짐없이 우리는 그의 독특한 표현들의 줄기가 엘렌 G. 화잇과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지도적인 신학자들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알게 된다. (276.1)
 “비록 예수께서 ∙∙∙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시고, ‘타락한 아담의 자리’‘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인간 본성, 그리고 ‘모든 자녀가 시험을 받듯 사단의 시험을 받았고’, ‘범법자 아담의 본성’‘인간의 죄를 범한 본성’ 그리고 ‘그 외의 많은 비슷한 표현’과 본성을 취하셨다 할지라도 이들 학자들과 엘렌 G. 화잇은 우리 주님의 타락하고 퇴락된 인간장비가 생각으로나 행동으로 주님을 죄 짓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비록 그분이 안팎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지만 더럽혀지거나 흠을 남기지 않으셨다.”22 (276.2)
 그 밖의 항의들이 대총회 회의가 있을 당시 대총회 안식일학교부장인 H. F. 램프톤(H. F. Rampton)에게 직접적으로 돌아왔다. 그들 중 한 가지는 1983년 1월 19일자로 된 항의인데, 캘리포니아 앤더슨 교회 지도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심각한 교리상의 잘못들(serious doctrinal errors)’이라는 표현을 썼고, 안식일학교 교과의 매체를 통하여 ‘음흉하게(subtly)’ 오류들이 소개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우리는 이 교과들이 안식일학교 학생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고안된 시도로 보며 전통적인 재림교회 교리들 곧 성서적 교리와 예언의 신에 기초된 교리 들에 총체적으로 반대되는 신신학적 개념들을 받아들이도록 안식일학교 멤버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본다.”23 (276.3)
 “1월 15일자 교과는 성육신 가운데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개념을 혼동시키고 있지만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취했다는 결정적 편견도 지니고 있다.”24 엘렌 G. 화잇 인용문들을 선택한 것이 비난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에 대한 교리는 신신학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276.4)
 “사단은 재림교회 내에 ‘신신학’ 개념을 소개하기 위해 부지런히 일해 왔다. 1950년대에 사단은 지도층 신학자들의 그룹을 통해 이런 그리스도론을 촉진시키기 위해 일해 왔으나 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단은 지금 자기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안식일학교를 이용하고 있는가?”25 (277.1)
 비록 교단적인 출판물은 아닐지라도 <현대진리의 외침(Voice of Present Truth)>이라는 정기 간행물은 안식일학교 교과에 의해 교회내에 ‘신신학’을 소개함으로 빚어진 그룹들과 교인들로부터 온 편지들을 출판하였다. “재림운동 기본원칙”26‘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을 전적으로 재확인하는 데 할애하였다. 이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하여 허버트 E. 더글러스와 데비스 E. 프리브 같은 저자들이 기사들을 제공하였다. (277.2)
 현대진리의 외침
 허버트 더글러스가 제출한 기사는 첫 페이지 맨 위에 대문자로 <모델이 되신 인간(The Model Man)>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실제로 더글러스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던 것은 이 기사에 아무것도 없었다. 목적은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았고 옛것을 상기시키는 데 있었다. (277.3)
 더글러스는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남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지구의 반쯤만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동정을 나타내는 천사처럼 아니면 모든 인간의 고통이나 연약성을 대처하는 슈퍼맨으로 오시지 않았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는 죄인들이 미칠 수 있는 모든 길에 닿을 수 있었다. ‘만일 그 사다리가 단 한 발판 때문에 지상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로 당신의 본성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311, 312).”27 (277.4)
 자연적으로 더글러스의 기사의 목적은 “예수님은 인간 가족 속에 들어오시고 ‘아담과 그 외의 모든 후손과 같은 본성’을 지니셨다. ∙∙∙ 예수는 진실로 인간이셨으며, 그분이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점 외에는 똑같은 인간이셨다.”28 그러나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한결같은 시험을 받으셨다. 요점을 드러내기 위해, 더글러스는 이 주제에 관한 엘렌 G. 화잇의 가장 강력한 진술을 인용하였다. 그 인용구들 중에서 더글러스는 만일 예수께서 정말 모든 인간과 같이 동일한 인성을 지니셨다면 그들과 같이 그분도 시험에 넘어지셨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엘렌 G. 화잇의 답변을 인용하였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인성의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이 시험을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당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주님께서 시험에 굴복하는 일이 가능치 않았다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자격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시려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숙한 진실이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과 쟁취하신 승리는 우리 인간이 모본이신 주님을 모방하여야 하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408).”29 (278.1)
 데니스 E. 프리브(Dennis E. Priebe)는 당시 패시픽 유니온 대학의 성경교수로 있었는데 그의 기사는 우리의 관심을 일으킨다. 그에게 있어서 “중추적인 교리, 신앙의 두 가지 조직의 방향 곧 전체적인 논쟁의 기초와 투쟁의 근거가 되는 방향을 결정짓는 논쟁점은 ‘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독자도 알다시피 복음은 어떻게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을 것인가에 대한 모든 것을 뜻한다. 우리로 잃어버림받게 하는 것이 죄이고 복음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는가에 대한 기쁜 소식이다. 우리 중 다수가 죄에 대해 정의하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우리가 안다고 추측해 왔다.”30 (278.2)
 첫째 프리브는 원죄(original sin)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개혁자들(The Reformers)에 의하면 “원죄는 단순히 우리가 아담의 자녀들로 출 생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278.3)
 “이 가르침은 우리가 선과 악에 대한 어떤 선택도 가려낼 수 있기 전에 본래부터 죄인됨을 가르친다.”31 프리브는 이 점을 주목해 제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연약성이나 불완전함 그리고 경향들이 죄이다. 개혁자들이 예정된 논리의 전제하에 그들의 원죄교리는 세워 놓았다는 것은 흥미 있고도 의미심장한 것이다. ∙∙∙ 그래서 예정론이 현대의 대다수 그리스도교인들에 의해 거절되어 온 반면, 원죄는 여전히 정확한 복음의 가르침의 기본으로 보여지는 것은 대단히 이상한 일이다.”32 (279.1)
 “확실히 그(그리스도)는 죄 없는 본성 곧 그대와 내가 유전으로 출생시부터 받은 본성과 같지 않은 죄 없는 본성을 지니셔야만 한다. ∙∙∙ 죄 있는 본성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있는 본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치 못할 사항이다.”33 (279.2)
 프리브의 죄의 본성에 관한 견해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그에게는 “죄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현 존재(現 存在)를 나타내는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택하는 바로 그것이다. 죄는 마음이 무엇인가 갈망하는 것에 동의 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릴 때 죄가 된다. 유전된 본성이란 용어 가운데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책임이라는 중대한 영역(카테고리)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에 연합시키기까지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노선으로 들어가기 까지는 죄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두고 있는 불순종,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가 죄이다. 죄는 본성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의 의지와 관계가 있다.” (279.3)
 “만일 죄에 대한 책임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타락한 인간본성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만드는 것이다. 불가피함이나 책임감은 도덕적인 면에서 공통으로 배타적인 개념들이다. 이와 같이 죄는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반역하기 위해 자원해서 선택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279.4)
 “이 복음 가운데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우리의 타락한 본 성대로 행하기로 우리가 기꺼이 선택하는 것이다.”34 (280.1)
 데니스 E. 프리브(Dennis E. Priebe)는 죄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그리스도의 본성에 적용하였다. 그는 기록하기를 “만일 죄가 본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선택에 대한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그것 때문에 한 죄인으로 되지 않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유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분의 양심적인 선택이 언제나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언제나 죄 없이 남아계셨고, 당신의 타락한 본성이 당신의 선택을 조절하도록 결코 허락지 않으셨다. 그의 유전은 우리의 유전과 똑같은 것이었으며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받는 것에서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중재에 호소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수준뿐 아니라 사람이 아담의 죄와 계속되는 세대들의 죄를 통해 타락한 수준에까지 내려가는 겸비를 받아들이셨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강렬한 어떤 것인가가 요구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타락한 그 깊이에까지 내려가셔야 하고 당신 자신의 인성 속에 그 깊이로부터 새로운 삶의 수준까지 인류를 높여야만 하셨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정상으로부터 맨 밑바닥까지 내려오셔서 우리를 승화시키고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35 (280.2)
 그래서 프리브(Dennis E. Priebe)는 “만일 예수님이 완전한 한 인성을 취하셨거나 아니면 타락 전의 아담의 본성을 취하셨다면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를 깊이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그분은 타락한 자들과 접촉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그분은 인간의 필요에 응하기 위해 인간 옆에 서 있지 않고”, “예수님과 그분이 하나님 앞에 대표했던 인간들 사이에는 큰 심연(深淵)이 있게 될 것이었다. ∙∙∙ 만일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큰 간격이 그대로 존재하였을 것이며 타락한 자와 타락치 않은 자 사이에 간격을 메울 또 다른 구주가 요구되었을 것이다.”36 (2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