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공동체적 중요성을 지닌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하나님의 계시는 개인적 차원에서 발생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두개의 초점을 갖는다.12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계시를 나누어 줄 특별한 사람을 선택하신다. 이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을 선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온 세상이 영적 도덕적 위기로 잃어버린바 되었을 때(창 6:5; 11:9) 노아와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계시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의 가치는 계시가 없는 온 세상 보다도 더 크다. 생명의 길은 다수의 사람들 속에가 아니라 계시를 받은 사람 속에 있다. 민주주의의 숫자를 강조하는 원칙은 여기에서 전혀 소용이 없다. 모든 백성이 계시를 받은 사람이 전파하는 계시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한다. 온 세상은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그 목소리를 침묵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은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침묵하도록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변경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대로 선포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를 혼잡케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이 발생한다. (307.1)
 계시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계시를 받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 계시 사건 속에서 그분 자신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계시에 전적으로 일치하기 위해 계시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전 자아를 바칠 필요가 있다. 계시는 개인에게 평생의 사명을 주고, 받은 사람은 그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이 기대된다. 계시 자체가 종말론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계시를 받은 사람은 종말론적 삶을 구체화해야 할 것을 기대 받는다. 노아가 종말에 관한 계시를 받은 후로 그는 이전의 노아와 동일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소명 받은 아브라함은 결코 이전의 아브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308.1)
 만일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자기의 사명을 무시한다면 그는 죽음의 형벌 아래 놓인다. 왜냐하면 그의 의무 태만 때문에 멸망 받는 백성들의 피 값을 그의 생명으로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308.2)
 7. 인류의 결정적 행동을 요구함
 하나님의 계시는 인류의 결정적인 행동을 요청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지적 호기심을 만족 시키거나 자기의 지식에 대해 교만하도록 개인을 만들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희생을 요구한다. 노아에게 주신 계시는 그의 돈, 에너지, 땀, 인내, 용기를 요구했다. 계시는 인간을 한담을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계시는 인류의 운명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엄청난 중요성은 즉각적이고 결정적인 행동을 요청한다. (308.3)
 하나님의 계시는 사적(私的)으로 주어졌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공공적(公共的)으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전 세계적인 종말에 대해서 계시하셨다. 노아의 계시를 듣고 그가 방주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목격한 이들은 노아의 메시지에 대해서 그들의 입장을 결정해야만 했다. (308.4)
 8. 신앙 공동체를 창조함
 하나님의 계시는 인류사회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다. 하나님의 전 세계적 심판의 배경 속에서 이들은 남은자라고 불려질 수 있다. 창세기의 홍수이야기는 마지막 시대의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사업과 운명에 대해 많은 신학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309.1)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첫 계시는 ‘모든 혈육 있는 자의 ∙∙∙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다’는 것이다(창 6:13). 이것은 하나님의 기별을 요약하고 노아에게 삶의 방향을 제공했다. 창세기 6:14 이하에 펼쳐진 노아의 정체성과 사업과 운명은 이 한 구절 속에 담겨있다. (309.2)
 히브리어 ‘케츠’(קֵץ, qëc) ‘끝, 종말’은 노아의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정의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공동체였으며,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그 공동체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색깔을 갖게 되었다. 그 공동체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yet)의 갈등관계 속에서 생활한다. 위대한 종말이 오기 전이라도 계시를 받은 자는 종말의 임재를 감지하며 종말론적 환경 속에서 산다. 인류에게 중요한 것은 종말론적 공동체에 속할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종말론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종말론적 존재로서 개인은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다. 방주를 짓고 그 속에 들어가라는 계속된 기별은 노아가 ‘케츠’를 자신의 본질적 부분으로 내면화한 후에나 의미가 있다. 종말론적 의식은 전도와 영적 도덕적 부흥과 개혁에 긴박한 동기를 부여한다. (309.3)
 히브리어 ‘콜 바사르’(כָּל־בָּשָׂר, Kol-BäSär) ‘모든 혈육’은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께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세계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신앙공동체는 인류를 창조주께로 돌이키는 신적 사명을 갖고 있다. ‘모든 혈육’은 인간 뿐 아니라 다른 생명체까지 포함하며, 노아는 인류의 남은 씨앗이 되어 새 아담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했고, 생명체들의 ‘씨앗’(גֶרַע, zeºra`, 창 7:3)을 보존함으로 모든 하등동물을 구원하였다. 종말론적 신앙공동체는 만물을 회복하고 구원하는 사명을 짊어진 인류의 희망이다. (309.4)
 참고 문헌
 1. J. I. Packer, ‘Revelation’, New Bible Dictionary, (Leicester, England;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96), 1014.

 2. Peter M. van Bemmelen, ‘Revelation and Inspiration’,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Commentary Reference Series, Volume 12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2000), 23.

 3. Stephen N. Williams, ‘Revelation’, Dictionary for 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London; Grand Rapids, MI: SPCK; Baker Academic, 2005), 678.

 4. Carl Ludwig Wilibald Grimm,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Being Grimms Wilkes Clavis Novi Testament, (New York; Cincinnati, OH; Chicago, IL: American Book Company, 1889), 62.

 5. Geoffrey W. Bromiley, ‘Reveal; Revelation’, ISBE 4:161.

 6. van Bemmelen, 23.

 7. ‘현몽하여’로 번역된 것은 문자적 의미가 ‘꿈 속에 오셨고’이다.

 8. J. H. Hertz, ed. The Pentateuch and Haftorahs Hebrew Text. English Translation and Commentary, 2nd ed. (London: Soncino Press, 1960), 26.

 9. 창 8:21‘레아 한니호아’(רֵיחַ הַנִּיחֹחַ, rêªH hannîHöªH, ‘향기로운 냄새’, ‘sweet savor,’ KJV)는 어떤 향기인가에 따라 코의 자극이 달라질 수 있는데 본문은 ‘기쁘게 하는 향기’(pleasing ordor)이다. ‘기쁘게 하는’‘마음을 진정시키는, 기쁘게 하는, soothing, pleasing’을 뜻한다. 문자적 사상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쉼을 주는, restful’이며 안식일의 쉼을 내포한다. Warren Austin Gage, The Gospel of Genesis: Studies in Protology and Eschatology (Winona Lake, IN: Carpenter Books, 1984), 10, 11; Reyburn, 198-199.

 10. Williams, 678, 680.

 11. 유 1:14-15은 주전 1세기 중엽의 위경(pseudepigrapha)인 제1 에녹서 1:9을 인용한 것이다. 비록 경전이 아닌 책에서 인용했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창 5:1-24의 족보에서 아담을 첫 번째로 세었을 때 에녹은 일곱 번 째가 되지만 완전 숫자인 7에 근거하여 에녹의 예언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해 ‘아담의 칠대 손’이라고 의도적으로 주장한 듯하다. 에녹서는 반복해서 에녹을 아담의 칠대 손으로 기록하고 있다(에녹서 37:1; 60:8; 93:3). ‘주’는 문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유 1:4).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7:708; Daniel C. Arichea, Howard Hatton, A Handbook on the Letter from Jude and the Second Letter from Peter, UBS Handbook Series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1993), 42; G. F. C. Fronmüller, Jacob Isidor Mombert, The Epistle General of Jude (New York,: C. Scribner, & Co., 1867), 23, 24.

 12. Packer, 1014. (3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