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중심의 성소론 제 4 부 예수님과 함께 지성소에서 (죄의 존재로부터의 자유) 20. 쉐키나 (나의 모든 영광은 그리스도의 것임)
 쉐키나(Shekinah)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 단어의 어근(샤칸<shakan>)은 종종 나온다. 필자는 본서에서 이미 쉐키나에 관하여 몇 번 언급 하였는데, 본장에서 자세하게 연구하고자 한다.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임재를 표현하고자 이 단어를 만들어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태초부터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빛의 몇 가지 형태로 시현(示顯)하시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 모습을 보았다. 여호와께서는 구름이나 불로서 백성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시었고, 성막에서 자신을 시현(示顯)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영광으로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빛내어 주셨다. (247.1)
 그러나 이 성전이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파괴된 후에 쉐키나는 빛의 형태로 이스라엘에게 결코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에스겔은 쉐키나가 성전에서 천천히, 떠나는 것을 묘사하면서, 이 빛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칭하였다. 이 세상은 세상의 빛을 다시 한번 보고자 나사렛 예수의 오심을 기다리었다. (247.2)
 쉐키나는 장막에 거한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샤칸(shakan)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전술하였듯이 요한은 예수의 성육신을 묘사하면서 똑같은 자음 세개가 나오는 희랍어 한 단어를 사용한 것 같이 보인다(skn, eskenesen, 요 1:14). 이 희랍어 단어는 임시 천막에서 임시로 거주하는 것이나 혹은 사는 것을 뜻한다. (247.3)
 유대 백과사전(The Jewish Encyclopedia)은 유대인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서술하였다. ‘메므라(Memra)’‘예카라(Yekara)’가 아람어인 반면에 히브리어인 ‘쉐키나’란 용어가 탈무드와 미드라쉬에서 앞의 두 단어 대신 사용되었고, 그리하여 이 두 단어가 유일하게 나오는 탈굼에서의 의미를 포함하게 되었다. 쉐키나가 빛이기 때문에 광휘(光輝)가 나오는 외경과 신약 성경의 구절들과, 희랍어 사본에 독사(doxa, cf. doxology)가 나오는 곳은 쉐키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쉐키나에 상응하는 희랍어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누가복음 2장 9절에 의하면 ‘주의 영광’(독사 쿠리우<doxa Kuriou>)이 저희를 두루 ‘비취’었다는 표현이 나온다(비교 벧후 1:17; 엡 1:6; 고후 4:6). 요한복음 1장 14절요한계시록 21장 3절에서 스케눈(skenoun)과 스케네(skene)란 단어가 쉐키나를 시사하는 것으로서 특별히 택하여졌다.” (247.4)
 “하나님이 인간 안에 거하시고 인간이 그분의 성전이라는 사상(골 2:9; 고후 6:16; 요 14:23)은 쉐키나가 인간 안에 거한다는 것의 한층 더 현실적인 개념일 뿐이다 ∙∙∙ .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는 쉐키나를 메므라, 에카라, 로고스와 같이 하나의 뚜렷한 실체로, 또 하나님과 세상의 중개자(intermediary)로서 창조된 빛으로 여기었다. 반면에 나흐마니데스(Nahmanides)는 쉐키나를 뚜렷한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본질로 여기었다”(The Jewish Encyclopedia, “Shekinah”). (248.1)
 탈무드에 기록된 쉐키나 관련 문구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한 계획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임재의 불은 사막의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났다(출 3:2). 탈무드는 이 사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 가시여, 오 가시여, 네가 다른 나무들 보다 더 높기 떄문에 거룩한 분께서—그분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자신의 쉐키나가 네 위에 머물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네가 다른 모든 나무보다 작았기 때문에 그 분께서 자신의 쉐키나를 네 위에 머물도록 하시었느니라”(Sabbath, 67a). 불타는 떨기나무는 성육신의 상징이다. 그것은 연약한 인류 안에 거하시려고 몸을 구부리는 영원한 빛을 드러낸다. 그것은 케노시스(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우시는 것, 빌 2:5~9)를 예견하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조명의 궁극적인 계시인 것을 강조한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비하(卑下)를 표현한 상형문자이다. (248.2)
 “랍비 요셉(Joseph)이 말하였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창조주의 마음을 배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보라 거룩하신 분께서—그분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모든 산들과 언덕들을 무시하시고 자신의 쉐키나가 시내산에 거하도록 하시었고, 모든 아름다운 나무들을 무시하고, 쉐키나가 떨기나무 안에 거하도록 하시었다. ∙∙∙ 정신이 오만한 모든 사람을 인해 쉐키나는 슬퍼하신다”(Sotah, 5a). 쉐키나는 하나님의 겸허의 표현이고, 팔레스타인의 똥으로 뒤덮인 길을 맨발로 걸으신, 하루가 마쳤을 때에 머리둘 둥지나 굴도 없었던 그 나사렛 사람에 의하여 전 세계에 보여졌다. (248.3)
 한나가 자신이 기도하는 태도에 관하여 엘리가 공정치 못한 비판을 가할 때에 질책하였던 사건(삼상 1:15)에 관하여 탈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았다. “당신은 주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 행동에 관하여 더욱 가혹하고, 관대하지 않은 입장을 취한 것은 쉐키나와 성령이 당신과 함께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Berakoth 31 b). 이 말은 쉐키나가 인간의 필요에 대한 영감받은 통찰력과 관련있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봉헌식을 마치고 귀로 중에 “기뻐하”는 것(왕상 8:66)에 관한 탈굼은 “그들이 쉐키나의 광휘(光輝)를 즐거워하였다”고 말한다(Mo’ed Katan 9a).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 안에서 이 짜릿한 쉼을 경험한다. (248.4)
 예수께서는 시련과 낙담을 겪는 이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초청하신다(마 11:28~30). 영원하신 성령이시여 우리에게 이 쉼을 주소서. 탈굼은 왜 개종자들이 자주 괴롭힘을 당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그들이 쉐키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기를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 룻은 이 성취의 자리를 서둘러 택함으로 인하여 넘치게 복을 받은 한 사람으로서 나온다(룻 2:12; Yebamoth, 48b). (248.5)
 “히스다(R. Hisda)가 말하였다. 이스라엘이 [도덕에 대하여] 죄를 짓기 전 최초에 쉐키나가 각 개인과 함께 거하였다. ∙∙∙ 그들이 죄를 범하였을 때에 쉐키나가 그들에게서 떠났다”(비교 신 23:14; Sotah, 3b). (249.1)
 쉐키나의 날개
 이 시적인 은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낮의 작열하는 태양으로 길도 없는 사막을 피곤하게 행진하여 나갈 때에 그들 위에서 그들을 품는 거대한 새의 날개와 같이 상공에 펼쳐 있는 부드럽게 빛나는 구름에 관한 히브리인들의 기억에서 기인한 것이다(출 13:18~22, 14, 24; 33:9, 10; 참조, 유 20; 아 3:6, 7에는 인격화되어 있음). 이 흰눈같은 부드러운 광휘의 덮개는 백성들에게 갈 곳과 쉴 곳을 인도하는 구속 자의 날개를 나타낸다(민 14:14; 느 9:12~19). 유대인들은 후에 이 광채를 샤다이(Shaddai)곧 “전능자의 날개”의 표상으로서 여기었다(비교 시 91:1, 2). (249.2)
 서늘하게 하는 구름이 밤에는 훈훈한 불(구름이라고 계속하여 불림, 출 14:19; 민 9:21)로 바뀌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이 되고, 추운 사막에서 위로가 되었다. 이 구름은 “여호와의 영광”이라고도 칭하여졌다(출 16:10; 40:34; 민 17:7). 구주께서 예루살렘을 인하여 울으실 때에 이 은유를 사용하시었다. “예루살렘아 ∙∙∙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 23:37). (249.3)
 쉐키나는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더 가깝게 가기 위하여 자신을 두꺼운 구름 안에 감추었다(출 19:16~18). 이것은 “의의 교사”(욜 2:23, 난외주: 개역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은 난외주에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표준 새번역 성경에는 언급되있음)로 하여금, 그분의 눈부시는 진리의 빛과 모든 육체의 심판자인 그분의 “불같은 율법”(신 33:2)을 드러내도록 능력 주신다. 쉐키나는 또 이스라엘 백성이 그분께 진실하게 살아갈 때 그들을 위험과 유행병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었다(사 4:4, 5; 49:10; 시 121:6). 하지만 그것은 완고한 반역자들에게는 성소로부터 전광석화 같은 심판의 불을 내보냈다(레 10:2, 6; 민 16:35; 17:10; 참조, 시 27:1ff, 91:5, 6). 의로운 자들에게 빛이 되고 보호이었던 것이 악한 자들에게는 소멸시키는 불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37; 부조와 선지자, 339). 이 불은 죄(시대의 소망, 107)와 죄인들(시대의 소망, 107)을 드러내고 파괴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249.4)
 예수에게서 보여진 쉐키나
 쉐키나는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분의 신성은 이제 구름 속이 아니라 인성의 외관—예수의 몸—속에 감추어져 있었다”(Present Truth, vol. 2, 37). 하나님의 영광은 성육신에 의하여 덮어졌다(부조와 선지자, 330).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5~7). 이 말씀 가운데서 영세 전부터 감추어 있던 목적의 성취가 발표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려고, 즉 육신이 되시려고 하셨다. ∙∙∙ 우리가 그 광채를 보고도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영광이 나타내짐이 가리워졌다. 그의 신성이 인성으로 가리워졌으니, 곧 보이지 않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셨다. (249.5)
 “이 큰 목적이 표상과 상징으로 예시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불붙는 가시덤불은 하나님을 나타내었다. 신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선택된 표상은 별로 주목을 끌만한 것이 못되는 평범한 덤불이었다. 이 가운데 무한하신 자께서 감취어 있었다. 무한히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가장 평범한 표상 안에 감추셨으므로 모세는 그것을 보았을지라도 능히 살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교통하심으로 그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제한을 받고 그의 위엄이 가리워진 것은 유한한 인간의 미약한 시력으로 그것을 능히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낮은 몸’(빌 3:21), 곧 ‘사람의 형체’로 오실 것이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 그에게는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육신으로 화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빛이셨다. 그의 영광이 가리워지고 그의 위대하심과 위엄이 감추인 것은 그가 슬픔과 시험에 싸인 인간에게 접근하시려 하심이었다”(시대의 소망, 23). (250.1)
 쉐키나 장막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과 밀접하게 사시기 원하셨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성막을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내가 그들 중에 거할 내 쉐키나를 만들 것이라”(출 25:8, Targum of Onkelos)약속하시었다. 쉐키나는 주택으로 묘사되었다. 모세는 타락 후에 예배드린 원래 장소에 관한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설명하였다. 모세는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었다고 말한다(창 3:24). “두었다”란 단어는 샤칸(shakan)을 번역한 말이다. 여기서도 역시 불이 샤칸이나 천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관련 있다. 이 보증은 성전 건립 후에도 반복되어 나온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쉐키나에 기뻐 거하신다”(왕상 8:12, 13, Targum of Jonathan). (2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