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역사에 나타난 안식일 제 3부—안식일 신학 제16장—안식일 신학에 대한 고찰
 이처럼 안식일 계명은 명백하게 일의 중단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안식일의 요구가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단순한 육체의 휴식보다 더 큰 무엇이다. 안식일은 “거룩한”날이고 “거룩하게 지켜져야 하는”날이다. 안식일의 거룩성은 하나님이 창조 주간의 그 특정한 날에 쉬시고 그 날을 거룩하게 했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출 20:11). 그래서 사람도 그 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image dei)으로써 그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모본을 알고 따르는 것이다. “이마고 데이”(하나님의 형상)의 실재는 “이마타티오 데이”(imatatio Dei:하나님을 본받음)인 것이다.15 (284.3)
 즐거워하는 날. 안식일을 지키는 두번째의 동기가 있다. 그것은 안식일이 대속을 기념하는 기쁜 날이라는 데에 있다. 신명기 5:15은 안식일의 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을 받은 기억에 연결시키고 있다. 안식일 계명은 명하기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하였다(신 5:15). 여기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안식일을 지키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한 사실을 기쁘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매 안식일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해방자이시며 그가 그들의 노예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그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신이나 법률들이 그의 피조물들을 괴롭히도록 허용하지 않으시는 창조주이시며 언약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해방자이시기도 하다. 그는 애굽으로 부터 이스라엘을 대속했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하셨다. 안식일과 대속의 관계는 이처럼 분명한 것이다.16 (284.4)
 신명기 5:15의 진술은 모세가 창조의 기념만 가지고는 안식일 준수의 이유로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거나 모세가 하나님의 창조의 안식을 기념하는 안식일의 본래적인 요소에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또 하나의 낯 서른 요소를 추가시켰다는 말이 아니다.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할 수 있는 추가적인 이유를 소개할 뿐이다. 게리 코헨(Gary C사ien)이 적절히 말했듯이 하나님의 태초의 창조는 무존재의 상태에서 사람을 하나님께 출현시킨 사건이며 대속은 잃어버려진 상태에서 사람을 하나님께 출현시킨 사건이다.17 (285.1)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유추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만큼 분명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구원받은 것은 옛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구원 받는 것 못지 않은 중대한 사건이다.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을 받았고(딛 2:14; 엡 1:7; 골 1:14; 히 9:11-22). 마귀의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아(요 16:11; 히 2:14-18)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갈 6:15).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 그와 더불어 새로운 친교를 갖게하신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엡 4:24) 새 사람의 본성을 입도록 초청되었다. 우리는 신약과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일과 하나님의 구속의 일이 서로 단절되어있지 않고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신명기 5:15에 명백히 나타나고 있는 이 통일성은 히브리 4장에서 더욱 더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창조시대의 안식일의 문맥에 서서 그의 독자들에게 믿는 자의 안식으로 들어가도록 촉구하고 있다(히 4:1-5; 8-10).18 (285.2)
 이와 같이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며 구원의 표징으로서 하나님의 이중적인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안식일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능력을 선포하고 있다.19 창조와 구원의 이같은 통일은 분명히 창조에 관한 신약 성경의 증언의 가장 독특한 특징의 하나로 표현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는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의 실질적인 행위자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말씀이시며 하나님이 이 말씀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요 1:1-18; 히 1:1, 2; 골 1:15-17). (285.3)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의 진리를 늘 새롭게 인식시켜주는 안식일의 준수는 앞에서 언급한 신약 성경의 거듭되는 선언들에게도 의미와 실재성을 부여해주고 있다. 즉 안식일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 창조된 것들 가운데 그로 말미암지 않은 것이 없다는 신약 성경의 주장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286.1)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매 7일마다 한번씩 제7일에 하나님이 우리의 예속과 종살이에 종지부를 찍은 우리의 해방자란 사실을 기억하도록 특별히 초청받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 안식일의 경험은 그의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하나님이 그를 더 이상 세상의 어떤 권력이나 심지어는 죽음에 의해서도 지배받지 않도록 그를 자유케 하신 사실을 증거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안식일 선언과 준수에는 언제나 창조에 대한 강력하고 기쁜 긍정이 표현될 것이다. 즉 이 세계나 인생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긍정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살아계신 주인이시며 창조와 구원과 마지막 완성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안식일의 선언이며 준수이다. (286.2)
 희망의 날. 우리는 이제 안식일을 지키는 세 번째의 동기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창세기 1장2장은 창조를 만물의 시작으로, 그리고 안식일을 그 기념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에 대한 신앙은 세계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교리(Protology)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는 현 순간의 활동이기도 하다. 창조는 종말적인 회복의 시간까지 계속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안식일은 안식과 기쁨의 날이면서 동시에 희망의 날인 것이다. (286.3)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사람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기초적인 사실을 표명하는 이 안식일은 동시에 하나님과의 충만한 사귐이 다시 한번 실현되는 그 날이 오기까지 사람의 삶에 관여하는 하나님의 계속적인 현존의 표징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한 주간마다 맞이하는 안식일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 역사의 마지막 절정을 이끌어내는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하나님의 날”을 상기시킨다(사 13:9; 겔 13:5; 욜 2:31; 암 5:18; 고전 1:8; 5:5; 빌 1:6; 2:16; 살전 5:2, 4; 딤후 1:12). 이와 같이 안식일은 창조와 구원의 기념일이면서 또 세상 끝에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으로 재림할 것을 고대하는 소망의 표징이다. 미래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될 완전한 자유와 모든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바 자유와 회복을 바라보는 희망의 표징이다(롬 8:20-22). 이처럼 안식일은 사람의 존재 자체와 또 6일 동안에 행한 자신의 일까지 포함하는 사람의 삶 전체에 대한 관점과 신뢰와 깊이를 제공한다.20 (286.4)
 그러나 안식일의 안식은 적극적인 종말론적인 표징으로 그 기능이 끝나고 있지 않다. 안식일은 종말적인 안식을 고대하게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안식일이 지적하고 있는 그 사건에 우리로 하여금 직접 참여 할 수 있게 하고 있다는 표징이기도 하다. 즉 안식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미래에 들어갈 하나님의 기쁜 안식을 미리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안식일은 앞으로 올 영원한 평화의 표징일 뿐만 아니라 그 맛보기이며 그 견본인 것이다. 매 안식일은 영원한 안식일 곧 모든 압제와 투쟁이 끝나고 사람이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의 절정에 도달하는 그 날을 향하여 달려가는 약속의 긴 행렬 가운데 인간의 여러 세대들이 거쳐가야 하는 여러 단계나 이정표 같은 날이기도 하다.21 (286.5)
 이같은 이유 때문에 안식일은 전혀 다른 약속들 위에 있다. 나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의 일과 대속의 일 사이에 있는 계속성과 통일성의 상징으로서 갖게 되는 결정적인 중요성에 대해서는 카알 바르트와 전적으로 입장이 같다. 그런데 바르트의 입장이 창세기 첫 장들의 목적론적인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해석으로는 이스라엘의 기원론이 이스라엘의 구속론과 종말론에 흡수된다.22 바르트는 아담의 본래적인 완전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본래적 상태에서 나타낸 인간 활동을 기뻐했다고 말할 수 없다.23 따라서 하나님이 최초의 제칠일에 쉬신 사건은 목적론과 구속론적으로만 해석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제칠일 안식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구속 사업의 예표이며 출발일 뿐이다. (287.1)
 나는 창조와 구속과 종말의 밀접한 관계를 기쁘게 인정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의 타락과 구속과 회복의 역사적 실재성이라는 문맥에서 인식하고 있다.24 나의 관점으로는 신약 성경도 구약 성경과 마찬가지로 위의 세 부분을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계 1:17; 2:8; 22:13; 21:5, 6). 이 세 부분은 모두 창조주이시며 대속주이시며 주님이신 한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있다(골 1:15-20; 엡 1:3-14). 은혜의 하나님은 동시에 창조와 역사의 하나님이시며 처음이며 마지막이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약 성경이 만물의 종말론적인 회복을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을 단지 창조의 최종적인 실현으로서 말한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손상된 하나님의 첫 창조의 최종적인 회복으로 말한 것이다. 창조와 대속, 그리고 만물의 회복은 서로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역사적인 실재로 인정하는 창세기 사건의 이야기, 즉 창조 사건의 문맥에서 고려할 때 비로소 제칠일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함축은 진실로 엄청난 실재성을 띄게 된다. (287.2)
 사람의 삶의 전체를 밝히고 있는 안식일
 안식일을 그 성경적인 기원과 그 본질적인 의미와 목표의 문맥에서 살펴보게 될 때 안식일은 하나님과 마주서는 날이다. 이 날은 기념의 날이며 기쁨의 날이며 소망의 날이며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 새롭게 받는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중요성은 이러한 것들로 부터도 넘어서고 있다. (287.3)
 십계명 중에서 안식일 계명이 차지하는 위치가 하나님을 섬기는 명령들과 동료 인간들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 관한 명령들이 갈라지는 정확한 지점이라는 사실은 진실로 놀라우리만큼 두드러진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안식일은 모든 다른 날들이 마땅히 어떠한 날이 되어야 하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안식일은 인간의 모든 행위들에 있어서 사람이 마땅히 취할 제도를 규정하고 그 규범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로 사람의 전체 생활과 모든 행동은 하나님에게 속한 날로서의 안식일에 의해 표시되고 있는 바 사람의 근본적인 태도가 무엇이냐 하는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신앙과 생활이 그리고 교리와 실천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한스 떠불유. 울프(Hans W. Wolf)의 말 그대로 “우리의 신학의 원형적인 모델”이라고 볼 수도 있다.25 (287.4)
 예컨대 안식일 사상의 핵심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예배가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말은 기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곧 안식일을 구별하는 것이고 안식일을 거룩하게하는 것이란 뜻이 아니라(참조. 암 5:21-24) 안식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떼어 놓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26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함께 고백하고 나누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와 찬양을 올리기 위해 함께 모이는 것이기도 하다. (288.1)
 그러나 안식일 예배는 하나의 고립된 행위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일상의 세계로부터 사람을 유리시키는 것으로 안식일을 인식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안식일은 한 주간의 모든 날들이 그 의미와 빛을 받는 중심같은 날이다. 이것은 최소한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그렇다. (288.2)
 인간의 일을 상대화시킴. 안식일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쉼 곧 사람의 일상적인 노동을 중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안식일은 사람의 노동을 반복적으로 상대화시키고 있다. 사람은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총합이라는 교훈을 배운다. 안식일, 그리고 안식일 안에 나타나는 노동의 중지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수고에 궁극적인 신뢰를 두지 말도록 교정시키는 행위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또 자기 자신의 능력과 효능성에 취하기 쉬운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경고이다. 안식일은 인간의 수고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기 생존의 유일한 근원으로 생각하게 하여 그를 바라보게 한다. 안식일은 인간의 노력이 제아무리 인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노동을 초월하여 아주 구체적인 방식으로 인간에게 말한다.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의 일도 아니고 너의 활동도 아니다. 너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은혜이다. 내일 일을 가지고 속태우지 말라. 너의 업적에 의해 정신을 잃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그 어떤 때 못지 않게 풍성히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첫 번째로 구하라. 그러면 그 밖의 모든 것들도 너의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288.3)
 그러므로 안식일의 신학은 중용의 신학이요 절제의 신학이다. 안식일 신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에서 이룩하는 자신의 성취에 대하여 올바른 관점을 갖게 해주며 자신의 업적을 신뢰하지 않도록 권고한다. 안식일 신학은 또한 은혜와 자유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제칠일에 쉬도록 명령했을 때 사람 안에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정신을 회복시키는 것이며 이로써 하나님은 창조된 세상의 사물들로부터 사람을 다시 자유케 하는 것이다.27 그리고 사람이 일상의 수고로부터 쉼으로써 그의 창조주와 더불어 안식일 안식을 함께 공유하는 만큼 그는 자신의 영적 자유를 인식하게 된다. 일로부터 쉬고 세속적인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짐으로써 사람은 자신을 창조하고 대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명상하고 경험할 기회를 얻게된다. (288.4)
 하나님은 안식일 이외의 그 어떤 날들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잠재력을 안식일에 부여하였다. 그것은 재창조와 관계의 특성이다.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지이다. 이러한 경지는 한 주간의 어느 날에도 열려있지 않다.28 왜냐하면 아브라함 헤셀(Abraham Hes아iel)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들어가는 그 경지는 “심상”(心像)의 다른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전혀 다른 기후이기 때문이다.29 (2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