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20. 야훼 므카데쉬—성결케 하시는 여호와 (거룩하게 만드시는 주)
 이스라엘 12 지파가 시내 산기슭에 장막을 친 후, 산꼭대기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나란히 서서 모든 백성이 듣는 앞에 율법을 공포하셨다(BC 1:1103; HSM 231). 그리고 두 분은 모세에게 성소 건축에 관한 상세한 지시를 친히 말씀하셨다. 그 지시를 모세는 책에 기록하여 영감 받은 건축 기사들에게 전해 주었다. (284.1)
 그와 동시에 주께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생애와 봉사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의식에 관한 율법을 모세에게 주셨다. 그 밖에도 당신의 율법이 백성들의 개인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 것을 말해 주는 세칙들이 주어졌다. 십계명은 죄를 지적하는 것이고 그 외의 율법들은 죄에서 정결케 되는 절차를 규정하는 법이었다. 성소는 깨달음이 있는 경배자에게 구주를 지적해 보여주고 속죄 과정을 해설해 주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궁극적 목적]”(롬 10:4)이 되신다는 말의 뜻을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 (284.2)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율법을 말씀하신 후 이렇게 모세에게 명하셨다: “너는 또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들을 참으로 지킬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걸쳐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임이라. 이로써 내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임을 너희로 알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들 대대에 걸쳐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며, 그것이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히 표적이 되리라. 이는 엿새 동안에 주께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에 쉬시어 숨을 돌리셨음이라 하라’ 하시니라”(출 31:13- 17). (285.1)
 이처럼 안식일을 영구히 성일로 지키라고 다시 강조하신 후 주께서는 모세에게 두 돌 판을 내려 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쓰신 두 증거 판인 돌판들”이었다(출 31:18; 비교 마 12:28; 눅 11:20, “손가락”은 성령의 상징). 그러므로 십계명은 세상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함께 주신 율법이다. (285.2)
 십계명의 중앙에 있는 안식일 계명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이 야훼 므카데쉬 란 사실을 최초로 공포하셨다. 그후 그는 이 이름을 아홉 번 사용하셨다(레 20:8; 21:8, 15, 23; 22:9, 15, 32; 겔 20:12; 37:28). 시내 산 이후 거의 9세기가 지난 후,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 그는 이렇게 약속하셨다: “나는 이방 가운데서 더렵혀진, 즉 너희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힌 나의 위대한 이름을 거룩하게(qaḏeš, 카데쉬) 하리니, 내가 그들의 눈앞, 너희 안에서 거룩하게 될 때에 이방은 내가 주인 줄을 알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 36:23). 이스라엘과 유다가 바벨론으로 유배된 원인 중의 하나는 그들이 안식일을 공공연히 무시한 것이었다(대하 36:21). (285.3)
 “거룩하게 하다”로 번역된 말의 어원적 고찰
 이 이름의 어근은 코데쉬(qoḏeš)인데, 그 뜻은 “거룩한, 성별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구별된” 것을 말하며 구약에 무려 1,700번이나 나온다. 이 말은 영문 성경에 18가지로 번역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상관없는 다른 모든 것에서 구별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러므로 “속된” 또는 “통속적,” “일상적”이란 말의 반대의 뜻을 가진다. 여호와는 항상 모든 거룩함의 중심이요 요체요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없이는 진정한 거룩함이란 있을 수 없다. (286.1)
 거룩함(holiness)의 동의어로 성결 또는 성화(sanctification)가 있다. 이 말의 라틴어 근원을 보면 상크투스(sanctus)=holy (“거룩한,” 예: saint)와 파치오(facio)=I make (“만들다,” 예: factory)이다. “참된 성화는 하나님과의 화합, 즉 그분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이는 그의 성품의 사본인 원칙들에 순종함으로써 받는 것이다”(TC 6:350). 코데쉬(qoḏeš)는 속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사람, 장소, 건물, 집기(什器), 시간 등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온전히 구별된 것이면 성별된 것이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이므로 거룩한 것으로 간주된다. (286.2)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모든 것들로부터 구별된다. 그는 만드신 분이므로 만들어진 것들과 동급이 되실 수 없다. 그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자족하신 분이다. “주와 같이 거룩한 분은 없나니”(삼상 2:2), 그는 특이한 존재이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 그가 자기 것을 삼기로 결정하시면 그것은 즉시 그의 구별되심에 참여한다. 그 이후에는 아무도 그의 허락 없이 그것을 만질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범할 수 없이 구별되는 구별됨을 거룩함, 즉 성별(聖別)이라 한다. 성경에서 거룩함, 거룩하다 등의 말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과 유관한 것이면 무엇에나 적용된다. “거룩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된 상태를 말한다”(DA 556). (286.3)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계명을 내리실 때 사람이든 짐승이든 아무도 시내 산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그 산을 거룩하게 만들었던 것이다(출 19:12, 13; 히 12:20). 지성소 안에 안치된 법궤는 하나님의 보좌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거룩했다. 그러므로 광야를 행진할 때 백성은 법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 행진해야 했다: “너희가 주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와 레위인 제사장들이 그것을 메는 것을 보거든 그 때에 너희는 너희 자리를 이동하여 그것을 따라 가라. 너희와 언약궤 사이에 약 이천 규빗을 재어 간격을 두고 그것에 가까이 오지 말라”(수 3:3, 4).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항상 분명히 격리하고 구분하도록 명하셨다(레 10:10). 수세기 후에는 이 구분이 해이해져서 지도자들 간에도 분명치 않게 되었다. 다윗과 그의 제사장들은 법궤를 운반할 때, 블레셋인들의 방식을 모방하여 소달구지를 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안치할 장소도 자기들 마음대로 도성의 한 곳을 정하여 거기에 가져다 둘 생각이었다. 그날 제사장 웃사는 분명한 명령을 어기고 법궤에 손을 댄 결과 즉석에서 죽임을 당했다(대상 13:9, 10).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시면, 그의 뜻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 한 그것은 항상 거룩하다. (286.4)
 코데쉬가 최초로 사용된 배경
 “거룩하게 하다”란 뜻을 가진 동사 카다쉬(qaḏaš)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창조주께서 안식일을 당신의 뜻하신 특별한 목적을 위해 제정하시고 구별하신 이야기에 나타난다(창 2:1-3; 막 2:27). “거룩하게 하다”“거룩한 것으로 만들다,” “성별하다”를 의미한다. 이 특별한 날을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신 고로 그와 같은 특별한 날은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으나 이제는 그 날이 그분의 날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수 천년 세월이 흘러도 계속 그 날을 “내 거룩한 날(聖日)”(사 58:13, 14)이라 하시며, 성령께서는 그 날을 “주의 날”(계 1:10; 막 2:28)이라 하셨다. 변치 않으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그 날에 쉬시고, 당신의 특별한 임재로 그 날을 성별하시고, 그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으므로 그 날은 특별하고 독특한 거룩함과 구별됨을 가진 날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명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들 대대에 걸쳐 안식일을 지켜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라”(출 31:16). 창조주께서 이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위해 정하신 것이므로(사 66:22, 23), 그분 외에는 아무도 이것을 변경할 수 없다. 코데쉬 가 처음으로 쓰였을 때의 이런 배경과 의미는 성경 전체에 걸쳐 그 말의 뜻을 지배한다. (287.1)
 승리로 홍해를 통과한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봉헌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누가 주와 같이 거룩함이 영화로우며 찬양 받을 만큼 두려우며 이적들을 행하리이까? ...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주께서 주의 자비로 인도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주의 권능 안에서 주의 거룩한 처소로 인도하셨나이다.... 주께서 그들을 데리고 오시며 주의 유업의 산, 그곳에 그들을 두시리이다. 오 주여, 이는 주께서 거룩한 곳을 만드셨으니, 곧 성소 안이라. 오 주여, 이것은 주의 손으로 세우신 것이니이다. 주께서 영영 무궁토록 다스리이다”(출 15:11, 13, 17, 18). (288.1)
 하나님은 방금 이스라엘을 택하여 당신의 백성을 삼으신 영광스런 업적을 이루시고 유월절 양을 희생함으로 그들을 속량하셨다. 죄의 지배 아래 머물던 그들의 과거는 이제 끝났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망령된 바로와 그의 반항적이고 무신론적인 애굽 군대에 심판을 내리시는 한편,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피묻은 구원의 문들을 통해 은혜의 구원을 획득하게 하셨다. 그가 그들을 구원했으므로 그들은 그의 것이 되었다. 그들은 “값으로 산바 되었으니,” 그들은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 그는 그들을 당신의 친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다. (288.2)
 그들을 위해 하나님은 이미 한 땅을 예비하고 계셨으니, 그 땅이 바로 거룩한 땅 성지(聖地)였다. 또 하나님은 거기 이미 건축되어 있는 집들을 주셔서 그저 들어와 살게 하셨고(신 6:10, 11), 당신께서 고안하신 성소에 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모든 약속을 믿으라고 도전하셨다: “너희는 내가 애굽인들에게 어떻게 하였으며,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들로 너희를 실어 내게로 데려왔는지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이제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 음성에 복종하고 나의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보다 나에게 특별한 보물이 되리니 이는 온 땅이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에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출 19:4-6). 여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생애를 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설정하신 목표인 “성화”를 이루는 데 방해되는 모든 장애물에서 격리될 것을 요구하셨다. (288.3)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성화를 위해 지정하신 좁은 길은 무엇인가? 성화는 오직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택하시는 장소에서,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수단을 통해서만 성취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는 성소를 주셨는데, 거기엔 성소 지성소와 거기 속한 기구들이 있었고, 제사장들과 축일들과 각종 희생과 제물을 드리는 제도가 주어져서 그가 지정하신 날과 시에 그가 규정하신 방법으로 그에게 경배함으로 거룩함을 계발하도록 고안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살도록 당신께서 택하신 땅에서 그들이 성장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마련하셨다. 그는 그들에게 안식일을 특별한 성일로 주시고, 당신의 임재로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을 거룩하게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 모든 지시에서 그는 거룩한 생애로 성장하기 위한 조건을 분명히 제시하셨다. 성화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이 “길과 진리와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계발되는 것임을 그들은 배웠다. (289.1)
 성화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이상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께서 거룩하시므로 그들도 거룩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레 20:7). 그의 임재와 권세는 참된 거룩함의 유일한 동력이다. 그의 은혜는 죄인을 거룩한 생활로 전진하게 만드는 유일한 힘이다. 이 진리를 성령께서는 구약에 다섯 군데, 신약에 두 군데서 언급하셨다(레 11:44; 19:2; 20:7, 26; 21:7, 8; 살전 4:7; 벧전 1:15, 16). (289.2)
 하나님은 우리의 첫 조상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을 가능성을 구비한 존재들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특성과 방불한 특성들을 부여하셨으므로 그들은 생각하고 뜻을 정하고 계획하고 실행할 능력이 있었다(참고 벧후 1:4). 그들은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아담은 다른 어떤 피조물과 비교해 보더라도 그 잠재력이 무한한 독특한 존재였다(창 2:19, 20). 그러나 그의 범죄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복안을 가진 상전을 섬기기로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을 떠나 그들의 아비 마귀의 가족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신의 성품”(벧후 1:4)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28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