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칠일 안식일과 기독교 신앙 ― 왜 하필 제칠일 안식일인가? 제 3 부 바울과 안식일 제 2장 골로새서 2장 16절의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
 골로새서 2장 16절의 시대적 배경: 새 시대의 새 종교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골 2:16)고 하였다. 우리가 이 성구의 바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구절의 문맥뿐만 아니라 그 시대적 배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이러한 주장들은 어떠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는가. (310.1)
 그는 사람들이 내면적인 동기나 정신보다는 종교의 외형적 형식과 외형적 순종에 더 신경을 쓰던 시대에 살았다. 그리고 외형적 형식과 외형적 순종을 대표하는 말이 곧 “율법”이다. 바울이 살던 시대는 이른바 “율법”의 시대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와 오순절의 성령 사건 이후로는 사람들에게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종교보다도 종교의 근본 정신과 진리 자체가 구도자의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였다. 종교인에게는 율법의 외형적인 준수보다는 신앙이 더 핵심적인 사항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사람은 외형적인 율법의 준수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의지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형식이나 계율보다는 새로운 신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강조되었다. (310.2)
 그리고 이 새 신앙은 종교의 외형적 형식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 마음에 기초한 것이어야 했다. 특정 공간의 차별성이나 종교의 외형적 의식의 우월성에 기초하는 예배가 아니라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라는 것이 새 신앙의 주장이었다. (311.1)
 이 새 시대는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역사하는 성령의 시대였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는 지난 시대의 특성이었던 지역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계급주의 같은 차별주의나 우월주의가 극복되는 보편주의의 시대였다. 그 이전 시대가 지역주의의 시대라면 새 시대는 세계주의의 시대였고 기독교 신앙은 세계주의적인 새 시대의 새 종교였다. 국경과 인종과 국가를 초월하는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신앙이었다. 기독교는 새 시대의 새 종교였다. 따라서 민족 종교로서의 유대교는 낡은 종교였고 세계주의의 새 시대에 마땅히 그 종말을 고해야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역적, 민족적, 국가적 종교체제로서의 유대교에게 종말을 예언하였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하였다.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1-23)고 하였다. (311.2)
 그리고 신약 성경의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식 예배를 철폐시킨 십자가의 의의를 상세히 설명했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는” 예배하는 자들의 영혼이 “온전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히 7:11) 새로운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직분이 필요하게 된 것이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는 “제사 제도로 달라졌은즉 마땅히 율법도 달라져야 한다”(히 7:12)고 하였다. “전에 있던 율법의 규정은 무력하고 무익하기 때문에 폐기되었다”(히 7:18)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에 따르면 이 때까지의 제사 제도가 “세상에 속한 성소”(히 9:1)에 따른 것이고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쫓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새 종교는 “하늘에 속한 성소”에 따른 것이고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쫓아하는”(히 7:16) 것이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는”(히 10:19) 제사 제도이다. 예수의 피로 “우리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히 10:22) 종교이다. (311.3)
 다시 말해서 이 때까지의 형식적이고 외형적인 유대 종교를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그 예물과 제사를 받드는 사람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가 없었다”(히 9:9). 유대교식 종교는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예식에 관한 인간적인 규칙들로서” 이런 종교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을 개혁할 때까지만 유효한 것이었다”(히 9:10).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가 염두에 둔다면 바울이 율법을 유대주의의 개념으로 말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미 용도가 폐기되어 이제 그 특권의 자리에서 사라져야 할 종교의 특징으로서 율법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바울은 이 율법에서 인간을 겸양과 믿음으로 인도하는 순기능보다는 인간을 교만으로 부추기는 비극적 오용을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깍아내리는 말을 많이 했다. 우리는 일단 골로새서 2장 16절을 바울의 이같은 태도에 비추어 생각해야 할 것이다. (312.1)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실도 똑같이 평가해야 한다. 바울은 신앙과 도덕의 표준으로서의 율법을 결코 정죄하지 않았다. 정죄하기는커녕 오히려 찬양하였다. 그가 정죄한 것은 구원의 방식으로서의 율법이었다. 사람은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삶의 표준과 이상을 나타내는 율법의 권위를 배척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사람을 정죄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권위만을 배척했던 것이다. (313.1)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의 문제는 율법의 본질과 관련된 것만이 아니다. 그가 심각하게 제기한 율법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출현된 새 시대의 정신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에게 있어서 율법의 문제는 율법의 시대착오적 전횡에 있었다. 바울은 베들레헴과 갈바리와 오순절의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시대는 이미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율법이 마치 그 엄청난 시대변혁적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기라도 한 것 같이 계속하여 지나간 시대의 부당한 권능과 권위를 사람들에게 행사하려고 한다는 사실에 항의하고 있다. 바울은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13.2)
 그러나 그는 인간의 삶의 이상과 표준으로서의 율법 권위와 기능에 대해서는 철저히 옹호하였다. 갈바리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서도 인간의 삶의 이상과 표준으로서의 율법의 위상과 기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고 강조하였다.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당한 기능과 권위는 오히려 더 높혀졌다고 주장하였다. 신자들은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도덕적 교훈이 영적이고 의롭고 선하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롬 7:12).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에서 율법이 완성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골로새서 2장 16절을 바울의 이같은 율법관에 비추어서도 함께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율법 전체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비판과 긍정적인 지지를 균형지게 취급해야 한다. (313.3)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골로새서 2장 16절의 안식일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 문제의 구절 하나에만 매달려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바로 다음 장인 골로새서 3장에서는 십계명의 원칙들이 거듭하여 강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편지서에서는 십계명의 대부분이 언급되었다. 따라서 십계명의 중앙에 기술되고 있는 에덴의 안식일이 바울의 공격의 대상이라고 성급히 결론짓는다면 이는 조급하고 부당한 판단이 될 것이다. (314.1)
 십계명의 안식일 계명에는 제의적인 요소와 세세한 행동 규칙들이 들어 있지 않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모든 형태의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살고 물을 마셔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모든 형태의 안식일 준수를 일괄적으로 반대했던 것도 아니다. 우리들은 바울과 초기교회 신자들이 절기들과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행 18:21; 13:14,42,44; 16:13; 17:2; 18:4; 20:16; 27:9). 그가 비판하고 거부했던 것은 특정한 문맥 안에 있는 “먹고 마시는” 일과 특정한 문맥 안에 있는 “안식일 준수”였다. 그리고 그 특정한 문맥은 바로 금욕주의와 관련된 율법주의적 제의주의와 인간이 만들어 낸 규칙에 따라 이행하는 천사 숭배였다. 바울은 율법적 제의주의나 천사 숭배에 관련된 “안식일 준수”“먹고 마시는 일”을 비판했던 것이다. (314.2)
 바울의 경고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온건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모든 형태의 절기와 모든 형태의 안식일 준수를 철폐해야 한다고 직접적으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결코 그런 취지가 아니었다. 그가 주장하려 했던 것은 우리가 절기와 안식일 준수 문제로 사람의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절기와 안식일 준수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특정한 제도와 법을 만들어 우리를 지배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는 것이다. (315.1)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복음서의 그리스도께서도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행동 방식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 규칙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한사코 반대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안식일 문제로 논쟁이 자주 발생하였던 것이다. (315.2)
 골로새서 2장 17절: 안식일의 그림자와 성취
 골로새서 2장 17절에서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뜻은 분명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교의 제의적 그림자는 드디어 실체를 찾아낸 것이었다. 유대교의 제의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든 이교적 열망까지도 부지불식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315.3)
 진실로 그리스도는 에덴의 안식일을 완성했다. 예수님 한 분만이 안식일을 충만히 지켰고 안식일의 축복의 기능을 확대시켰다. 그는 안식일의 육체적 안식으로 예표된 양심의 안식을 우리에게 제공했다. (315.4)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안식일이 폐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서진 몸과 흘린 피를 먹고 마시었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성만찬을 폐해야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예수님의 성육신과 봉사와 십자가 희생의 구원을 통하여 안식일의 상징성이 성취되었다고 해서 안식일이 철폐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안식일의 충만한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재림의 때는 아직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러나 안식일의 예표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의하여 충만히 성취된 이후라 할지라도 안식일이 폐하는 것이 아니다. 성만찬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구원의 실재를 기념하는 기능을 계속 발휘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기념하듯이 안식일도 그리스도의 구원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316.1)
 유사한 실례는 또 있다. 침례가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의 예표와 상징으로 시행되어 왔던 침례의 기능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철폐되는 것이 아니다. 또 기원전 여러 세기 동안 유월절 저녁 식사에서 먹었던 술과 빵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적하는 것이었으나 그 상징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만찬으로 영속화되었던 것이다. (3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