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포격을 받고 있는 안식일 제 5 장 바울과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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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일-일요일 논쟁에서, 일반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을, 특별하게는 안식일의 폐지 견해를 옹호하기 위해 주로 그 책임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이 관례가 되어 왔다. 특히 이 전에 안식일을 준수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최근에 시작된 안식일에 대한 공격에서 사실로 판명되었다. 예컨대, 하나님의 세계교회의 목사인 요셉 트카(Joseph W. Tkach)가 1995년 4월 1일에 인터넷에 제기한 공개 서한에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인 행위의 도덕적인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방 세계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윤리의 기초로 이해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난, 그리스도의 율법, 성령의 열매와 지도력, 본성, 창조와 도덕적인 원칙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결코 율법이 그리스도인 윤리의 기초라고 논쟁하지 않는다. 바울은 시내산이 아니라 골고다를 바라보고 있다”고 기록한 것이다. (108.1)
 같은 범주의 진술들이 이 전에 재림교회의 성경교사요 목사였던 데일 라쯔라프의 위기에 처한 안식일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기록하기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언약의 율법 아래 있지 않다. . . 갈라디아서 3장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시내산 언약 아래 있지 않다고 진술한다. . . 로마서 7장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인 봉사의 안내자로 제시하고 있다. . . 로마서 10장은 그리스도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율법의 목적이 되신다고 제시한다”1)고 하였다. (108.2)
 이러한 단정적인 진술들은 율법의 준수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의무 사항이 아니라는 율법과 복음 사이의 관계에 대한 편만한 복음주의적인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안식일이 “시내 언약의 표징이 되었고, 그리고 그 언약을 대신할 수 있은” 이 후로, 로마서 6:14; 고린도후서 3:1-18; 갈라디아서 3:15-25; 골로새서 2:14; 에베소서 2:15; 그리고 로마서 10:4 같은 본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으로는 율법을, 그리고 특별하게는 안식일을 준수해야 할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빈번히 인용되곤 한다.2) (108.3)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술들은 너무나도 단정적이어서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조사 연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소위 말하는 “새 언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서” 살고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도덕적인 원칙을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도덕률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나타난 사랑의 원칙으로부터 받는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108.4)
 예를 들어, 라쯔라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 언약의 생애에서, 도덕성은 빈번히 수많은 소상한 법들에 대한 의무로 보여졌다. 새 언약에서, 도덕성은 살아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우러나온다.”3) “새 율법[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짐]은 옛 율법[모세에 의해서 주어짐]보다 더 훌륭하다.”4) “새 언약에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에 의해 알려질 것이다! 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마치 십계명이 구약에서 여러 번 반복된 것처럼 신약에서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5) (108.5)
 본 연구는 그러한 진술들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 율법의 역할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에 대해 노골적으로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신약이 그리스도께서 구약에서 주어진 것들보다 “더 좋은 계명들을” 제정하셨다고 결코 암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바울은 명쾌하게 진술하기를 “이로 보건대 율법[구약]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우리가 아노라”(딤전 7:12)고 하였다. (108.6)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얽어매지 않는다는 이런 편만한 오해는 율법을 그리스도인들의 행위의 표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많은 바울의 구절들을 거스리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고 질문을 던 진 후, 그의 대답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였다. 꼭 같은 진리가 갈라디아서에서도 확증되는바,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3:21) 였다. 이러한 진술들은, 왈트 카이젤이 말하는 것처럼, “율법이 신속히 그 울타리를 벗어나면 어떤 해결책도 성경의 위안과 지지를 통해 받을 수 없을 것이다”6)라고 한 것처럼 유럽 폐기론 자들을 경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109.1)
 신약과 그리스도인들의 생애 모두에서 율법의 위치와 중요성에 대해 많은 오해들과 관련하여 성서 신학의 전반적인 범위 안에서 몇 교훈들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점차로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제시하고 있다. 예컨데, 크랜필드(C. E. B. Cranfield)가 스코팃쉬 저널 오브 디올로지(Scottish Journal of Theology)에 기고한 “사도 바울과 율법”이라는 기고문에서 기록하기를, “성경에서 율법의 위치와 중요성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해 보는 것이 오늘날 필요하다. . . 최근의 저술들이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할 예수와 사도 바울의 율법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혼란스러운 사상들과 점검되지 않는 가정들이 심각할 정도에 이르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들을 뛰어넘어 현 세대의 목회자들과 교사들의 의견들을 조형하는데 도움을 주어 온 신약 학자들의 어떤 문헌들 안에는 심각하게 혼란을 주는 사상이나, 아니면 적어도 부주의하거나 또는 불명확한 진술들이 많다”7)고 한다. (109.2)
 진실하지 못한 성경학자들이 율법의 준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해방되었다는 잘못된 개념을 유포하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이샤르 크랜필드(Ishare Cranfield)는 확신하고 있다. 그리스도인 생애에서의 율법과 그 위치에 대한 신약의 이해를 재점검할 필요가 절실하다. 이러한 긴박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생애에서의 율법의 역할에 대한 혼란스러운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신앙과 생활 국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안식일에 대한 반대 논쟁은 신약, 특히 바울의 편지서가 일반적으로는 율법의 준수를, 특별하게는 안식일 계명의 준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해방된다는 잘못된 가정으로부터 오고 있다. (109.3)
 본 장의 목적
 본장의 목적은 가장 복잡한 자신의 신학의 교리적인 문제 중의 하나인 율법에 대한 바울의 태도를 연구하는 것이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별한 네 영역을 연구해야 한다. 그것들은 첫째, 바울의 회심의 경험 전과 후의 관점으로부터 율법 대한 그의 견해의 배경, 둘째, 율법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바울의 기본적인 가르침, 세 번째, 율법의 폐지 견해를 지원하는데 빈번히 활용되는 바울의 본문에 대한 다섯 가지의 오해, 네 번째, 율법주의가 회심한 이방인들 사이에 어떻게 해서 주요 문제로 부각되었는지 등이다. (109.4)
 결론으로, 본인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인 진술들과 긍정적인 진술들 사이에 있는 현저한 모순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문맥들에서 발견하도록 제안한다. 그가 구원의 문맥(하나님 앞에 정당하게 서는 칭의)에서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율법의 준수는 소용이 없다고 확증한다(롬 3:20). 그렇지만 바울이 그리스도인 행위의 배경에서 율법에 대해서 말할 때(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 성화), 그는 하나님의 율법의 가치와 유효성을 높이고 있다(롬 7:12; 13:8-10; 고전 7:19). (1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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