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제4부 재림교회 중심부의 그리스도론 논쟁 제12장 신 그리스도론에 대한 반격(1970~1979)
 미니스트리 편집장 시 J. R. 스팽글러의 그리스도론
 우리는 R. A. 앤더슨이 <미니스트리> 편집장으로 있을 때 그에 의해 시도된 역할을 기억한다. 그때에 ‘재림교회의 새로운 이정표’가 1956년 출 판되었다. 스팽글러(J. R. Spangler)는 1966년에 그를 승계하였다. 수년 간 심각하게 쌓여갔던 그 논쟁의 측면에 남아 있었다. 이런 요지를 생각해 보고 결국 많은 사람이 <미니스트리> 편집자가 그 논쟁점에 스스로 끼어들지 않았다는 것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256.2)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에게 주어졌다. “왜 <미니스트리> 편집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과 믿음의 의(righteousness of faith)에 관한 최근의 논란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는가? 당신은 이 논쟁점에 대해 어느 편에 서 있는가?”77 (256.3)
 스팽글러의 답변은 솔직하고 직접적이며 명쾌하다. 그가 36년간 목회직을 수행하는 동안 그의 견해는 이 논쟁점에 대해 변해 왔다. 그는 기록 하기를 “지금까지도 주님의 본성에 대해 그릇된 인상을 남기는 것이 두려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것을 주저한다”78고 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이 주제에 관한 대총회에서 결의된 선언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일에 자유를 느꼈다. (256.4)
 <교리에 대한 질의(Questions on Doctrine)>의 출판과 미니스트리지에 나타난 확실한 기사들이 있기 전에는 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그분이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심을 믿고 그분을 전도집회 때에 제시하였다. 내 목회의 초기 몇 년 동안 나는 그리스도께서 내가 그러하듯 악으로 기우는 의도와 경향을 가지고 계셨다는 견해 쪽으로 많이 기울었었다. (256.5)
 나는 그리스도께서 홀로 결코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신 것을 제외하고는 나와 똑같은 본성을 지니셨다고 믿었다. 아무튼 50년 정도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모저모로 초점을 맞추듯 내 견해도 바뀌었다. 유전적으로 그리스도는 시험과 실패에 예속 된 인간이셨지만 죄 없는 인성을 지니시고 총체적으로 악에 대한 어떤 의도나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우셨다는 견해를 이제 더 좋아한다.79 (257.1)
 성경이 그리스도에 관해 무엇을 가르쳤는지 관찰해 봄으로 스팽글러는 스스로 이처럼 질문을 해 보았다. “그리스도는 나처럼 더러운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는가? 그는 모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 그는 본성적으로 진노의 자녀이셨는가? 출생시 잘못된 성격의 흔적을 받았는가? 우리 주님은 당신이 출생하심과 더불어 악으로 기우는 강한 유전적 경향들에 대항키 위해 싸우셨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유전적 경향과 성향들이 어느 것에 속한 것인가? 아니면 비록 결코 굴복치 않으셨을지라도 모든 다양성을 그의 본성이 소유하셨는가?”80 베이커 목사에게 한 엘렌 G. 화잇의 편지에 어떤 부분들은 <교리에 대한 질의(Questions on Doctrine)>에 공적으로 인용한 것이며 “단 한 순간이라도 그분 안에 악에 대한 성향이 있는 것으로 제시하지 않도록이란 진술을 부분적으로 해서 자신의 입장을 결론지었다.”81 (257.2)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같은 분이셨는가? 스팽글러는 이 기본적 질문에 관해 방황하면서 외롭게 남아 있지 않았다. 토마스 A. 데이비스 (리뷰 앤드 헤랄드지 부편집인)은 그 문제를 깊이 숙고했음은 물론 1979년 출판 한 그의 저서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같으셨는가?> 가운데 한 답변을 제시하게 되었다.82 (257.3)
 토마스 A. 데이비스: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같으셨는가?
 만일 헤펜스톨의 책이 예수님은 죄 없는 인성을 지니셨다고 주장한 사람들 사이에 가장 완전한 연구가 되었다면 데이비스의 책은 양자택일의 흥미있는 견해를 제공한 것이다. (257.4)
 그의 초기 출판물에 대해 감사하자! 초기의 데이비스의 입장은 물론 잘 알려져 있었다. 이 요점에 대한 그의 목적은 그의 초기입장을 반복하는 데 있지 않았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와 같으셨는가? 그 저자는 예수께서 모방하도록 부르신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이 연구의 중심요지이다. 데이비스는 히브리서 2장 11~17절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초청하였다. 11절을 보면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또다시 12절“형제들(brethren)”이라고 언급하고, 13절에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children)”, 14절에는 “자녀들(children)”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16절에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Abraham's descendants)을 붙들어 주려”고 오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왜 예수께서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63 (258.1)
 데이비스는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은—하나님의 자녀들로 정해놓은 자들인데, 간단히 말해 거듭난 남녀들”84이라고 결론 지었다. 실제로 그는 더 부가하여 말하기를 “형제들이란 용어에 숨겨져 있는 뜻은 아마도 모든 성경에서 발견될 수 있는 예수님의 인성을 이해하는 데 가장 심각한 수수께끼 중 하나라고 하였다. 그 용어가 히브리서 2장 11~17절에서 사용된 방법은 성경에서나 예언의 신의 기록들에서 탐구해야 할 광대한 분야를 공개해 준다.”85 (258.2)
 히브리서 2장 17절로부터 데이비스는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본성을 지니고 성육신하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사람과 같이 모든 점에 처해 있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가 부여받은 인성은 거듭나지 않은 죄인들의 인성과 같지 않았다. 그의 인성은 영적으로 거듭남을 경험한 자들과 공통된 것이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께서 당신의 형제들과 모든 점에서 같다고 믿게 되고 그분이 거듭난 사람이 지닌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고 이해하게 된다”86고 결론지었다. (258.3)
 이 입장은 과거 또 다른 재림교회 신학자들이 지지한 것이었다. 데이비스는 신학자들 가운데 W. W. 프레스캇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는 자신의 출판물 가운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셨다. ∙∙∙ 혹자가 친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령으로 거듭날 때, 그는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경험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된다.”87 이런 개념은 1977년 12월 29일 케네드 우드가 자신의 편집기사 가운데 언급한 내용이었다.88 (259.1)
 이것은 예수께서 거듭남을 통과했어야만 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데이비스는 강조한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항상 충만하셔서 순간이라도 죄로 얼룩지지 않고 순수하고 죄가 없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결코 변화되는 경험이 필요치 않으셨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 대해 언급한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더 좋은 용어에 대한 갈망을 위해 좀 더 좋은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89 (259.2)
 “우리가 예수님의 신령하신 도덕적 본성을 ‘거듭남’으로 묘사할 때 그것이 거듭난 사람의 도덕적 영적 본성이 똑 같다는 사상을 갖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상적인 사람이시다(Jesus is the ideal Man), 모든 면에 우러러 보아야 할 완전무결한 품성의 극치에 이르신 분이시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결함을 제거해야 할, 여전히 결점을 가진 인간이다.”90 (259.3)
 데이비스는 로마서 8장 3절“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 사이에 매우 가까운 유사성이 있지만 똑같지는 않다. 거기에는 그 밖의 어떤 다른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성이 그분 안에 있었다”91는 의미로 해석 하였다. (259.4)
 6장에서 누군가는 받아들이기에 특별히 곤란하게 생각되는 엘렌 G. 화잇의 진술들을 검토한 후 데이비스는 자기 주장에 대한 ‘중심적인 요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항상 우리 앞에 우리의 모든 검증의 축을 이룰 개념, 곧 예수께서 거듭난 인간이 지닌 동일한 본성을 갖고 계셨다는 개념을 항상 고수해야 한다. 그분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히 2:17; 4:15).” (259.5)
 “우리는 그분의 인성이 ‘우리 자신과 같았다’92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자. 그분께서는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모든 부담들이 입증되어야 하고 시련을 당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으며93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자신이 취하’셨다.”94, 95 (260.1)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예수께서 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연극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인간—곧 거듭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난들을 감수하셨다는 개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예수님의 인성이 거듭난 사람의 것보다 못하였으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것과 같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 반면에 그분의 본성이 거듭난 사람의 본성보다 우월했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그분을 인간들 위에 두는 것이며, 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가질 수 없는 유리한 점을 그분이 가지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 난다는 것(the new birth)은 인간이 자신의 현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무대이기 때문이다.”96 (260.2)